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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7/15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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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보나벤투라 주교의 천상 탄일을 기념하며 비오니 저희가 그의 높은 지혜와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며 언제나 그의 불타는 사랑을 본받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7월 15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탈출 2,1-15ㄴ)
    물에서 건져 냈다고 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 그는 자란 뒤,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

  • 오늘 복음
    (마태 11,20-24)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탈출 2,1-15ㄴ
오늘 제1독서

물에서 건져 냈다고 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 그는 자란 뒤,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

그 무렵 

1 레위 집안의 어떤 남자가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겨 길렀다. 

3 그러나 더 숨겨 둘 수가 없게 되자, 왕골 상자를 가져다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 

4 그리고 아기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아기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5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내려왔다. 시녀들은 강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공주가 갈대 사이에 있는 상자를 보고, 여종 하나를 보내어 그것을 가져오게 하였다. 

6 그것을 열어 보니 아기가 울고 있었다. 공주는 그 아기를 불쌍히 여기며, “이 아기는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로구나.” 하였다. 

7 그러자 아기의 누이가 나서서 파라오의 딸에게 말하였다. “제가 가서, 공주님 대신 아기에게 젖을 먹일 히브리인 유모를 하나 불러다 드릴까요?” 

8 파라오의 딸이 “그래, 가거라.” 하자, 그 처녀가 가서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왔다. 

9 파라오의 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아기를 데려다 나 대신 젖을 먹여 주게. 내가 직접 그대에게 삯을 주겠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아기를 데려다 젖을 먹였다. 

10 아이가 자라자 그 여인은 아이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갔다. 공주는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 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 

11 모세가 자란 뒤 어느 날, 그는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가, 그들이 강제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는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12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이고서 모래 속에 묻어 감추었다. 

13 그가 이튿날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자는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당신은 이집트인을 죽였듯이 나도 죽일 작정이오?” 하고 대꾸하였다. 그러자 모세는 “이 일이 정말 탄로 나고야 말았구나.” 하면서 두려워하였다. 

15 파라오는 그 일을 전해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파라오를 피하여 도망쳐서, 미디안 땅에 자리 잡기로 하였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1,20-24
오늘 복음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15일
류호영 안토니오 신부

 

✚ 성 보나벤투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22

✚ 강론시작 10:1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카파르나움은 예수님 활동의 거점입니다. 코라진은 카파르나움에서 북쪽으로 삼 킬로미터 떨어진 아주 가까운 도시이고 벳사이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필립보의 고향입니다.

이 세 도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과 활동을 아주 가까이에서 자주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하신 것처럼 먼저 사랑의 표징으로 치유의 기적을 이 고을 사람들에게 베푸셨고, 그들은 기쁨과 해방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았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면서 자기에게만 머물러 있다면, 이는 하느님 없는 삶, 죄의 삶으로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불행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 불행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꾸짖으신 것입니다.

단죄와 저주는 내치는 행위이지만, 꾸짖음은 행동을 고치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이 그 바탕에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불행하여라.”(마태 11,21)라고 하실 때 사용된 낱말은 장례식 때 슬픔과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는 낱말입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은 죽음의 상태이기에,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슬프고 걱정하는 마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11,23)라는 말씀에는 마치 떼쓰고 고집부리는 아이를 무섭게 겁주는 듯한 부모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잘못된 고집을 버리기를 바라서 엄하게 말을 하지만 실제로 그대로 하려고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바라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모세와 파라오

어제와 오늘 복음은 탈출기의 시작 부분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탈출기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구원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 역사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역사이고 그래서 탈출기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이스라엘의 이 탈출 역사에 있어서 영도자요 영웅은 단연 모세입니다.

그런데 이집트 탈출만 놓고 본다면 다시 말해서 탈출한 후 가나안 가기까지 역사를 보지 않는다면 모세보다 더 중요한 역할 곧 악역을 한 사람은 파라오였습니다. 파라오가 주님의 악역을 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결코 그리고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천국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승 생활이 너무 행복하면 저승 행복을 찾지도 않을 것이고, 저승이 더 행복하고 영원한 행복이라는 교리도 배우고 자신도 그러리라 생각할지라도 이승에서 결코 한 발짝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고 고통이 심한 사람은 하느님께 빨리 데려가 달라고 청할 것입니다. 이런 병자에게는 이승에서 탈출이 곧 구출이고, 데려가는 분은 저승사자가 아니라 하느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끄집어내 가나안으로 데려가실 때 쓰신 도구가 모세만이 아니고 탈출 순간에는 파라오를 더 중요하게 쓰셨습니다.

그래서 계속되는 탈출기에서 이런 표현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더 완고하게 하셨다는 표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승에 사는 우리에게 파라오도 보내고 모세도 보내십니다.

파라오를 먼저 보내고 모세를 나중에 보내십니다. 파라오를 통해 탈출케 하시고 모세를 통해 구출케 하십니다. 고통을 먼저 주시고 은총을 나중에 주십니다. 그래서 사실은 고통이 은총이고 악이 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의 애타는 호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왜 인가?’ 

그 이유는 그들이 티로나 시돈처럼 바알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소돔처럼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또는 단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그렇습니다. 단지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가장 많은 기적을 보았는데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은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영적 무지로 가려져 있는 어리석음과 굳어진 완고함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영적 무지의 어리석음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돌아온 탕자이야기’에서, 특은을 받고도 받은 줄도 모르고 죄지은 줄도 모르기에 돌아오지도 않은 ‘큰아들’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 우리가 하느님과 공동체로부터 많은 사랑과 특은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영적무지로 어리석고 완고하고 고집스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이야기”(루카 12,41-48)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바로 제가 당신의 뜻을 알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요, 많이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주저하고 망설이며, 이기심과 자애심과 편리와 안주에 사로잡혀 깊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경고하신 것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애타는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멸망으로 빠져드는 그들에 대한 동정과 애도의 한탄이요 경고였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애타는 호소를 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주님께서 저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희에게 그 사랑을 주신 까닭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제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에게 그만큼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부를 건네주신 우리 주님께 우리도 전부를 건네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1,20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
당신의 꾸짖음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으듯 품으신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토록 많은 사랑을 요구하심은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음입니다. 

그토록 받고 또 받으면서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비뚤어지고 변덕스런 
제 마음을 바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경 통독을 많이 하면 그만큼 착해질까?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 도시들에서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지만,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21)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숨어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그것을 소화시켜 영양분으로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듯, 하느님의 말씀이나 기적이라는 영적인 양식도 우리 안에서 살과 피가 되기 위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묵상’이라고 부릅니다. 묵상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되새기고, 그 의미를 깨닫고, 마침내 삶을 바꾸는 결심, 즉 ‘회개’로 나아가게 하는 영혼의 소화 과정입니다.  

오늘 복음의 도시들은 기적이라는 진수성찬을 맛보기만 했을 뿐, 그것을 묵상으로 소화시켜 회개라는 영양분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에서 내린 만나(기적)는 먹었지만, 믿음으로 바위를 쳐서 나온 생수(회개)는 마시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소화되지 않은 음식은 오히려 몸에 해롭듯, 묵상 없는 기적 체험은 영적 교만으로 이어져 더 큰 심판을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보고도 믿지 않는’ 비극은 역사 속에서도 반복됩니다. 19세기 조선, 흥선대원군의 시대를 생각해 봅시다. 당시 조선의 문 앞에는 거대한 ‘시대의 표징’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서양의 검은 배, 이양선(異樣船)이 출몰했고, 목숨을 바쳐가며 새로운 하느님을 증거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가 이어졌습니다. 이것들은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이자, 기존의 질서만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강력한 표징이었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그 표징들을 어떻게 ‘소화’했습니까? 그는 변화의 가능성을 묵상하며 미래를 준비하기보다, 오직 ‘위협’으로만 해석했습니다. 그의 눈에 서양 세력은 왕권을 위협하는 오랑캐였고, 천주교는 성리학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표징 앞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과거의 질서를 지키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며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고, 전국에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즉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결국 조선은 변화의 물결을 외면한 채 문을 닫아걸었고, 머지않아 더 큰 힘에 의해 강제로 문을 열리고 국권을 상실하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반면에, 아주 작은 표징이라도 그것을 깊이 묵상하여 위대한 믿음에 도달한 이들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순교자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 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에 정통한 학자였습니다. 그에게 천주교 교리, 즉 ‘서학(西學)’은 그저 하나의 새로운 학문, 낯선 사상(표징)으로 다가왔을 뿐입니다. 다른 많은 유학자들처럼, 그는 그것을 쉽게 비판하고 배척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달랐습니다. 그는 이 낯선 가르침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신의 모든 지성과 영혼을 다해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 인간 영혼의 불멸, 상선벌악과 같은 교리들을 깊이 연구하고 되새겼습니다. 이 묵상의 과정 속에서 그는 천주교가 단순한 서양 학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과 목적에 답을 주는 참된 진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의 묵상은 너무나 깊어서, 마침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국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하기에 이릅니다.  

오늘 복음의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엄청난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묵상이라는 소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미사 안에서 말씀과 성체라는 기적을, 그리고 일상 속에서 수많은 주님의 손길이라는 표징을 만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또 읽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건으로만 여긴다면, 우리 역시 코라진과 벳사이다의 사람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이든 기적이든, 우리가 받은 은총은 반드시 묵상하고 생각하고 소화시키는 과정을 거쳐야만 참된 믿음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사제로서 이 묵상의 힘을 절감하며 살아갑니다. 신학교 시절, 성체를 영할 때 제 마음속에 아주 선명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저는 이 짧은 한마디를 되새길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때로는 위로로, 때로는 질책으로, 또 때로는 제 소명을 확인시켜주는 빛으로 다가옵니다. 그 말씀이 제 안에서 계속 소화되면서, 지치고 나태해질 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제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도록 이끄는 힘이 됩니다.  

하나의 말씀, 하나의 성체라는 표징이 수십 년에 걸쳐 한 사람에게 끊임없는 영적 영양분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묵상의 힘입니다. 부족한 제가 체험한 것처럼, 말씀과 표징의 소화불량에 시달리지 말고, 깊이 되새기는 은총의 시간을 꼭 가지시길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낡은 운동복을 입고 조깅하다가 길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넵니다. 그 말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자기가 우주선을 만들고 있고, 원숭이 뇌에 마이크로 칩을 삽입할 것이고, 인공 지능으로 구동되는 가정용 로봇을 만들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그 자리를 떠납니다. 만약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여러분이라면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마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환자나 허언증 환자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직접 말을 들은 이 사람은 크게 감동했다고 합니다. 너무 기뻐했고, 이 이상한 말을 모두 믿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이 사람은 테슬라, 스페이스 X 등을 만든 억만장자 일론 머스크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설득력이 전혀 없겠지만, 너무나 유명한 일론 머스크의 말이기에 신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어떻게 받아들이시고 있습니까? 굳게 믿고 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에 설득력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의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성모님을 떠올려보십시오. 불가능한 일이 자기 앞에 펼쳐져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가능하다고 믿었고,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 세상 삶을 힘차게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갈릴래아 지역의 도시들인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습니다. 그들은 놀라움을 느꼈지만, 마음 깊은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은총과 사랑을 그렇게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선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았기 때문일까요? 은총과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자동으로 받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판 날에 티로와 시돈이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하시지요. 티로와 시돈은 구약 성경에서 교만과 우상 숭배로 대표되는 이방 도시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며 교만에 빠진 유다인보다 이방인이 더 낫다는 충격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커다란 은총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회개하지도 믿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론 머스크보다 더 크고 위대한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또 믿지 않아도 될까요? 성사, 성경, 교리, 교회 공동체를 계속 접하고 있음에도 회개하지도 또 믿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주님의 꾸짖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회개는 다시 하느님을 향해 걷는 삶을 의미합니다. 지금 다시 하느님을 향해 걷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때로는 짐이 버거울 때도 있겠지만 짊어지는 방법을 배운다면 우리에게 유익할 거야 (영화 ‘작은 아씨들’ 중에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응답인 회개입니다. 오늘이 중요합니다. 내일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감탄이 아니라 회개를 요구합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자비이며 동시에 책임입니다. 기적은 순간이지만 회개는 여정입니다. 회개는 삶 전체를 바꾸는 긴 여정입니다.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회개가 시작됩니다. 영적 무감각인 익숙함의 덫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회개의 기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특권 의식과 교만에서 무너집니다.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깨어있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다시 바라보는 회개의 오늘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회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마태오복음 11장 20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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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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