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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7/13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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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7월 13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5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신명 30,10-14)
    그 말씀이 너희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 제 2독서
    (콜로 1,15-20)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0,25-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신명 30,10-14
오늘 제1독서

그 말씀이 너희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0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율법서에 쓰인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키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11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12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 

13 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도 없다. 

14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콜로 1,15-20
오늘 제2독서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15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0,25-37
오늘 복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13일
임재민 벤자민 신부

 

✚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소개 00:20

✚ 미사시작 01:15

✚ 강론시작 16:2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사랑은 관심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비유를 보면서 사제와 레위인을 나쁘다고, 사마리아인을 착하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인들의 생각과 습관을 고려한다면 더 깊이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옷이 벗겨진 채 온통 상처와 멍이 가득하며 반죽음 상태로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을 것입니다. 지나가다가 이 사람을 본 사제와 레위인은 아마도 그가 시신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시신을 만지는 것은 부정해지는 일이고 이는 율법에 금지되어 있으므로 제단에 봉사하는 이들이라면 더욱 조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정결함을 지키고 거룩한 상태에 머물러 있고자 이 사람을 피해 갔을 것입니다. 만일 그 시대의 유다인들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들이 의인이라고 칭찬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유다인들이 보기에 사마리아인들은 이단자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어떤 사마리아인도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피해 갈 수도 있었지만, 사제와 레위인과는 달리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는 곳 근처까지 가 보았습니다(루카 10,33 참조). 아마도 그에게 관심이 있어서 유심히 보았을 것이고,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면서 연민을 품고 다가가 도와줍니다.

사랑은 관심에서 시작하여 유심히 바라보기로 이어집니다. 그래야 그의 상태를 알고 연민을 가지고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가까운 사랑부터 먼 사랑까지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주제는 ‘가까이 있음’과 ‘멀리 있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오늘 첫째 독서 신명기가 하느님 말씀이 아주 가까이 있다고 말하고, 복음에서 주님은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더 뜯어보면 진정한 가까움은 거리나 물리적인 가까움이 아니라 마음의 가까움이고 마음의 가까움은 사랑만큼의 가까움이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하느님 사랑과 우리 사랑의 가까움과 멂을 보겠습니다. 오늘 창세기가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고 하는데 하느님의 말씀이 실제로 그만큼 가까이 있는지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사랑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데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께 얼마나 가까운지 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내리사랑과 치사랑만큼 기울기가 있다는 점입니다.  

어머니와 아들 간의 사랑을 예로 들면 아들의 어머니 사랑이 어머니의 아들 사랑에 훨씬 못 미치는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들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온 관심이 아들에게 쏠리게 만들지요.  

관심이란 누구 또는 무엇에 관한 마음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관심이 온통 아들에게 있는 어머니의 사랑은 몸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또 상황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마음은 아들에게 가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마음은 아들에게 가 있어 늘 아들과 가까이 있는 데 비해 아들의 마음은 어머니가 아닌 것에 가 있어 늘 어머니와 멀리 있습니다.  

이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있을 때도 마음이 다른 데 있어서 결국 자기 몫을 챙겨 아버지를 떠나지만 아버지는 마음이 늘 아들에게 있고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바로 가까움은 회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율법서에 쓰인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키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래서 다시 우리는 마음이 어디에 있고, 사랑이 어디에 있고, 마음 안에 무엇이 있고, 곧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고,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가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 차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 계명이 마음에서 멀리 있지 않게 되면 이웃도 우리에게 멀리 있지 않고 가장 가까운 이웃부터 사랑하고, 점차 멀리 있는 이웃까지 우리의 사랑이 확장되어 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나에 갇혀있지 않고, 우리 사랑이 가족에 국한되지 않고, 점차 확장되어 나갈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나로부터, 그다음 가까운 이웃인 가족들에게, 그다음 가까운 이웃인 친구들에게, 생면부지의 먼 이웃인 사람들에게, 심지어 강도를 만난 원수들에게도 사랑이 확장되어 나갈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7월의 무더위가 한창입니다. 불타는 사랑을 그려봅니다. 이채 시인의 “7월의 꿈꾸는 사랑”을 떠올려봅니다. 


하찮은 풀 한 포기에도
뿌리가 있고
이름 모를 들꽃에도
꽃대와 꽃술이 있지요
아무리 작은 존재라 해도
갖출 것을 다 갖춰야 비로소 생명인 걸요

뜨거운 태양 아래
바람에 흔들리며 흔들리며
소박하게 겸허하게 살아가는
저 여린 풀과 들꽃을 보노라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견딜 것을 다 견뎌야 비로소 삶인 걸요

대의만이 명분인가요
장엄해야 위대한가요
저마다의 하늘을 열고
저마다의 의미를 갖는
그 어떤 삶도 나름의 철학이 있는 걸요

어울려 세상을 이루는 그대들이여!
저 들꽃처럼 들꽃처럼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 무엇 하나 넉넉하지 않아도
이 하루 살아 있음이 행복하고
더불어 자연의 한 조각임이 축복입니다.

ㅡ 7월에 꿈꾸는 사랑, 이채


오늘 <복음>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처럼, 길을 피해 달아나는 저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낯선 이를 여관으로 옮겨가며 돌보아 준 사마리아인의 용기와 사랑 앞에, 그지없이 부끄럽고 숙연해집니다. 말없는 그의 헌신과, 뒷날까지 챙겨주면서도 고요히 떠나는 그이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이 질문 뒤에는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라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라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묻기 전에, 오히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것과, 자신은 그분께 매여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직책(소임)을 맡느냐?’보다, ‘어떤 존재로 그 직책을(소임)을 수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지?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고 묻기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그가 나의 형제인가?’를 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인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일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인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10,37)라는 말씀에 있을 것입니다.

이는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하라’는 요청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하라는 말씀이요,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표현해 줍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먼저 그 힘을 주셨습니다. 이를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4) 

이는 이미 우리 안에 말씀이 와 계시니, 그 말씀을 입으로 선포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2독서>의 ‘그리스도 찬가’ 역시 만물이 그분 ‘말씀’에서 창조되었고, 그분 안에 우리가 존속함을 말해줍니다(골로 1,15-20). 곧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마리아인처럼 그렇게 해야 할 일입니다. 곧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0,37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초주검 당해 쓰러진 이들이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건만
나는 그들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앉아 
핸드폰을 바라보며
혀만 끌끌 차면서 
슬며시 길을 피해 
슬금슬금 달아나고 맙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묻기보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게 하소서. 

그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사랑이 필요하기에 
사랑하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기보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랑을 간직한 사람, 
무엇을 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는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를 가두는 목소리, 자유를 주는 시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답하십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어떻게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그 근원적인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저는 그 힘이 바로 '시선', 나를 바라보는 사랑의 시선을 느끼며 살아가는 데서 시작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비유 속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 만난 이를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그들은 율법 전문가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습니다. 바로 자신들을 끊임없이 사랑으로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입니다. 

저 역시 고속도로에서 사고 현장을 보고 119에 신고만 한 채 떠나온 부끄러운 경험이 있습니다. 그 후 저는 지옥을 겪었습니다. 구급대원과 경찰에게서 연이어 전화가 걸려왔고,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픈 사람을 길 위에 버려두고 왔다’는 죄책감이 심장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너무 크자, 제 안에서는 ‘그래도 나는 신고라도 했잖아! 다른 차들은 그냥 갔는데!’ 하는 자기 합리화의 목소리가 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며 제 죄를 가리려는 사탄의 속삭임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시선을 잊는 순간, 우리는 외면의 죄를 짓고, 자기 정당화라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이웃과 단절되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그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루카 10,33) 자신의 시간과 돈과 계획, 모든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움직였을까요?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쉽니다. 1985년, 망망대해에서 96명의 베트남 보트피플을 마주한 전재용 선장을 생각해 봅니다. 이미 25척의 배가 그들을 외면하고 지나간 뒤였습니다. 희망이 꺼져가던 그들에게 전 선장은 단순한 구조선이 아니라, 인류애라는 이름의 응답이었습니다. 이 선택으로 직장을 잃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는 평생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물에 빠진 장애인을 구하기 위해 30분 넘게 밧줄 하나에 매달렸던 김태현 씨를 생각해 봅니다. 팔의 모든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고통 속에서 그를 버티게 한 것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라"고 늘 말씀하시던 경찰관 작은아버지의 목소리, 그를 바라보던 사랑과 신뢰의 시선이었습니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소방관과 산소마스크를 나누어 쓰며 불길 속으로 다시 뛰어든 아버지의 부정(父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을 움직인 공통된 힘은 바로 **'정체성'**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형성된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 시선을 외면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일임을 알았기에, 그들은 자비로운 행동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 삶은 누구의 시선 아래 살 것인가를 선택하는 영적 싸움입니다. 사랑의 시선을 배신했을 때의 고통은 우리를 지옥으로 이끕니다. 최근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즈'는 이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주인공 진우는 K팝 스타라는 성공을 위해, 자신의 꿈을 묵묵히 지원했던 어머니와 여동생을 차갑게 버립니다. 그는 악마와의 계약으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지만, 그의 내면은 한순간도 평화롭지 못합니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악마의 저주가 아니라, 자신을 믿어주었던 가족의 사랑 가득한 눈빛, 그리고 배신당했을 때의 슬픈 눈빛에 대한 기억입니다. 이 기억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는 자신을 지배하는 악마에게 다른 무엇도 아닌 그 기억을 지워달라고, 더 이상 가족의 시선을 느끼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합니다. 사랑을 배신한 자가 느끼는 그 시선의 고통이 바로 지옥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마지막, 그는 모든 것을 잃을 위기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여 가족을 구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행위를 하는 순간, 그를 옭아매던 악마의 목소리는 힘을 잃고 그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기억을 지워서가 아니라, 그 기억, 그 시선이 원하는 사랑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의 시선은 우리에게 엄청난 힘을 줍니다. 영화「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수많은 전우들의 희생 끝에 살아남은 라이언은, 노인이 되어 가족들과 함께 자신을 구해준 밀러 대위의 묘비를 찾아옵니다. 그는 부와 명예, 모든 것을 가진 성공한 노인이지만, 묘비 앞에서 아이처럼 흔들리며 아내에게 묻습니다. “나, 괜찮게 살았어? 좋은 사람이었어?” 그의 전 생애가, 죽어가던 밀러 대위의 마지막 시선, “헛되이 살지 마라”는 그 한마디에 대한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평생 그 시선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그 시선 앞에서 마침내 위로와 평화를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방식입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밀러 대위와 같은 시선을 선물로 주십니다.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했다. 이 사랑을 헛되이 만들지 마라.” 이 시선은 우리를 짓누르는 부담이 아니라, 우리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별빛과 같은 선물입니다. 

우리 안에는 끊임없이 우리를 비난하고 이기심으로 이끄는 사탄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 목소리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시선 아래 사는 것입니다. 그 시선이 우리를 죄책감의 늪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우리를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매일의 기도와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자비로운 시선을 느끼고, 그 시선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 시선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선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독일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괴테는 ‘인간에 가장 끔찍한 모습은 익숙함으로 무감각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거룩한 것, 위대한 것, 숭고한 것 등에 대해 아무 감흥 없이 익숙해지면 결국 그것들에 무감각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신 삶 안에서 무감각해지면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행복하지 않습니다. 
 
한때 음악을 너무나 좋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공부할 때 반드시 음악을 틀어야 했고, 일어나서도 또 잠들기 전에도 음악을 들었습니다. 새 음악 테이프를 사기 위해 용돈을 아끼고 아꼈고, 그 음악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습니다. 
 
요즘에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쉽게 얻을 수 있어서 그럴까요? 그냥 익숙해졌고 무감각해졌습니다. 음악 듣는 기쁨이 사라지면서, 지금은 전혀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쉽고 편안할 때 하느님께서 보일까요?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상황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귀하게 여겨서 정성을 쏟아야 하느님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때 자기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기쁨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귀하게 여겨서 정성을 쏟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삶,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느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 교사는 신명기 6,5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 19,18의 ‘이웃 사랑’을 통합해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라고 하시며,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사제,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율법의 정결 규정을 지키기 위한 것이 될 수도 있고(시체 접촉 회피), 무관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즉, 그는 자기가 원하는 상황으로 생각했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떠나 그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행동을 실천합니다. 그는 귀찮지 않았을까요? 당시에 죽은 척하고 강도질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원하는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의 삶을 살라고 이르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오늘의 명언

“당신도 그래요? 나는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순간 우정이 탄생한다(C.S.루이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물음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는 하느님의 물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이웃 사랑의 참된 본질을 만납니다.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이웃은 삶의 태도와 선택인 행동하는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진정한 신앙은 경계 짓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허물고 다가가는 용기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우리의 앎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며 지식은 사랑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참된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이 곧 사랑의 사람이며 신앙의 사람입니다. 이웃은 찾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이에게 복음으로 다가가는 것 그것이 참된 이웃의 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연민만 느낀 것이 아니라 먼저 다가가고 붕대를 감고 노새에 태우고 여관에 데려가고 비용까지 지불하며 끝까지 책임을 집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길은 바로 예수님의 길이며 그 길은 오늘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웃 사랑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참된 믿음이 됩니다.

이웃을 향한 도움과 사랑이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기도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곳에 이웃이 있고 이웃이 있는 곳에 함께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웃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신명기 30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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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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