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토는 그 이름대로 복을 받아 거룩하게 살았네. 그는 가족과 유산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거룩한 수도 생활을 추구하였네.
하느님, 복된 베네딕토 아빠스를 뛰어난 스승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을 섬기라 가르치셨으니 저희도 오로지 하느님만을 사랑하며 열린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살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11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46,1-7.28-30)
내가 너의 얼굴을 보았으니,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 오늘 복음
(마태 10,16-23)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창세 46,1-7.28-30
오늘 제1독서
내가 너의 얼굴을 보았으니,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그 무렵
1 이스라엘은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그는 브에르 세바에 이르러 자기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다.
2 하느님께서 밤의 환시 중에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부르시자,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3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4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요셉의 손이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
5 그리하여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났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태워 오라고 파라오가 보낸 수레들에 아버지 야곱과 아이들과 아내들을 태웠다.
6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얻은 가축과 재산을 가지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이 함께 들어갔다.
7 야곱은 아들과 손자, 딸과 손녀, 곧 그의 모든 자손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28 이스라엘은 자기보다 앞서 유다를 요셉에게 보내어, 고센으로 오게 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고센 지방에 이르렀다.
29 요셉은 자기 병거를 준비시켜, 아버지 이스라엘을 만나러 고센으로 올라갔다. 요셉은 그를 보자 목을 껴안았다. 목을 껴안은 채 한참 울었다.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렇게 너의 얼굴을 보고 네가 살아 있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마태 10,16-23
오늘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11일
강태현 안드레아 신부
✚ 성 베네딕토 아빠스 소개 00:06
✚ 미사시작 01:34
✚ 강론시작 10:03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하느님과 그분 뜻만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의탁하는 자세
제자들은 앞으로 박해를 겪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나를 증언하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18)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렇게 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고통과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제자들은 그 순간에 오히려 더욱더 예수님의 제자임을 증명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까요?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시고, 해야 할 바를 하도록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하기에 죽음조차도 그들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힘으로만 증언할 수 있기에, 인간의 힘만으로 해 보려는 태도를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걱정한다’는 것은 자기의 지혜와 힘으로 해 보려는 자세이기에 주의해야 합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미리 알려 주시지 않고 증언해야 할 바로 그때에 알려 주시는 것도, 미리 앎으로써 인간이 자기 지혜와 힘을 섞게 되는 것을 막으시려는 의도라고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 박해받을 제자들에게 미리 당부하시는 ‘뱀 같은 슬기’란, 증언이 하느님의 몫이며 우리의 몫은 온전히 그분께 의탁하는 것임을 아는 것인 듯합니다.
그리고 ‘비둘기 같은 순박함’은, 순박함이라는 단어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함과 외곬, 단순함을 뜻한다는 점에서 오직 하느님과 그분 뜻만을 바라보는 단순한 자세를 일컫는 듯합니다. 하느님과 그분 뜻만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의탁하는 자세가 참제자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조심하되 걱정하지 않는
오늘 늦잠을 부득이 지난 강론을 올림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연중 14주 금요일-2021
오늘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위해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네 가지 지침을 주시는데 명령어 형태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요약하자면 이제 파견되어 복음을 잘 선포하기 위해서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해야 하는데 사람을 조심하는 것이나 걱정하지 않는 것이나 박해 시 피하는 것이 바로 슬기롭고 순박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거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이제 왜 이런 것들이 슬기롭고 순박한 복음 선포인지 보겠습니다.
슬기로운 복음 선포는 우선 사람들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람을 조심하라고 할 때는 그 사람이 사기꾼인지 강도인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것이고, 사기나 강도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사람을 조심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박해받게 되는 것을 기본으로 상정하십니다.
사실 복음은 모두에게 듣기 좋은 복음이 아니고, 특히 세상의 지배자들에게 듣기 좋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지 이 세상의 복음이 아니기에 근본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들에게는 도전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박해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런 박해 때 박해자는 말할 것도 없고 밀고자도 조심해야 합니다. 며칠 전 김대건 신부님 축일을 지냈는데 김대건 신부님 가족을 밀고하여 아버지가 순교하고 어머니를 실성케 한 것이 바로 이 집 사위였지요.
다음으로 이런 박해 때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슬기로운 것입니다. 순교의 열망으로 밀고할 테면 해보라며 조심하지 않거나 심지어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천주학쟁이라고 신앙을 증거 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무모하게 그러지말고 박해를 피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조심도 하고 박해를 피했는데도 붙잡히게 되면 그때는 오히려 걱정하지 말고 당당하고 담담할 것이며 순박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당당하고 담담하라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순박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순박한 어린이처럼 걱정하지 않는 것이고 이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머리를 굴리지 않는 것인데, 그러는 이유가 성령께서 다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순박하게 걱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뜻에서 오늘 창세기 하느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어서 박해를 받게 되었다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어야 할 것이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얼마나 믿는지는 이때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만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꼭 박해 때 뿐이어야겠습니까? 일상의 어려운 순간에도 마찬가지여야겠지요? 아무튼 조심은 하되 걱정은 하지 않고, 슬기롭되 순박한 우리가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죽기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희망하라.
오늘 <복음>도 여전히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그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게 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무장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제자들을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이리 떼를 제거해주거나 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로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세상’이라는 어장은 결코 환상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질곡과 어려움 속에 던져진 것입니다.
사실,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서로가 이리가 되어 헐뜯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곳이 우리의 파견지인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대처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여기서, “슬기롭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지혜롭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을 경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20)
이는 “슬기로움”이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슬기로움’은 ‘사랑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하고, 끝내는 죽기까지도 합니다.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순박하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성품과 덕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순박함”이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순박함’은 끝까지 믿고 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지막까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굴욕을 받기까지, 끝내는 배반 받고 죽기까지 하면서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은, 설혹 이리 떼에게 생명을 노략질 당한다하더라도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요, “끝까지 믿고 희망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박해를 두고, 산상설교에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 5,11).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0,22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미움 받고 거부당할 때에도
박해 받고 배신당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받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 입에서 언제 힘 있는 말이 나오는가?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앞둔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할까,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 10,19-20)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신앙의 위대한 선조들이 남긴 마지막 말에서 우리는 그 답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마지막 증언에는 한 가지 놀라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교회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원망이나 저주가 아닌 용서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사도 7,59-60)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 대신 평화가 가득합니다. 뜨거운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는 고통에 찬 비명 대신 박해자를 향해 태연히 외쳤습니다.
“자, 이쪽은 다 익었으니, 나를 뒤집어서 다른 쪽도 굽게 하시오!”
죽음을 조롱하는 듯한 이 거룩한 담대함 앞에 공포는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원수가 아니라, 하느님께 데려다줄 친근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는 눈을 감으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오소서, 나의 자매인 죽음이여.”
이태석 신부님은 “Everything is good.”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음까지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말씀을 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마귀가 세속과 육신을 통해 우리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런데 이 무기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영혼, 즉 삼구가 죽어버린 영혼 안에는 텅 빈 공간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텅 빈 자리는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채우실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할 때 성령의 말씀이 나올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이 영적 원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알아두시오. 우리의 원수는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으니, 바로 세속(世俗)과 육신(肉身)과 마귀(魔鬼)입니다. 이 세 원수는 밤낮으로 우리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 이 삼구와 싸워 이기지 못하면, 천국의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성인들은 바로 이 전투의 대가들이었습니다. 그들 안에서 '나'라고 불리는 옛 인간이 죽었기에, 죽음은 더 이상 그들을 위협하는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자신에게서 비워졌을 때, 성령께서 그 안을 가득 채우시고 당신의 말씀을 그들의 입에 담아주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죽음이라는 무기를 역으로 사용하여 나의 자아와 삼구의 욕망을 이길 때, 우리의 한마디 한마디는 힘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성인이 바로 오상의 비오 신부님이십니다.
비오 신부님은 마지막 순간뿐 아니라, 평생의 모든 순간이 삼구와의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그의 몸에 새겨진 오상(五傷)은 그리스도와 함께 매일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의 표징이었고, 밤마다 악마와 싸운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는 세상의 편안함과 명예를 철저히 멀리했고,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렇게 매일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았기에, 그의 평범한 한마디 한마디에는 엄청난 힘이 실렸습니다. 그가 고해소에서 죄인에게 건넨 짧은 권고, 불안에 떠는 이에게 던진 “기도하고, 희망하며,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단순한 말은 수많은 영혼을 뒤흔들고 하느님께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말이 힘이 있었던 이유는, 그 말 안에 비오 신부님 자신의 자아가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 정화된 영혼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힘이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 삼구를 죽이는 '죽음'을 두려운 원수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나의 이기심이 고개를 들 때, 헛된 욕망이 나를 유혹할 때,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오려 할 때, 우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자매인 죽음'을 초대하여 그 모든 것을 기꺼이 죽여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단언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1코린 15,31)
우리가 이렇게 날마다 죽을 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될 것입니다(갈라 2,20 참조).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입을 통해 말씀하실 것입니다. 매일을 마지막 날로 삼는 이들에게서 나오는 말은 가정을 살리고, 이웃을 위로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 '성령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시험 성적을 잘 맞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사업에 성공하려면 어떻게 할까요? 그렇다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아마 열이면 열, 모두 이렇게 답변하실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말했었고 또 이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노력만으로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열심히 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가능성이 커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논리보다 하느님의 뜻이 중요했습니다. 이 뜻을 찾은 사람은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힘든 일을 피해 가지 않으며, 가진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느님 안에서만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로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했다고 반드시 행복할까요? 또 가진 것이 많아야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손길 없이 행복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적인 노력은 세상의 물질적 가치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는 운이 좋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에 이어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는 장면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이야기하시지요. 그래서 “내가 너희를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양처럼 보낸다.”(마태 10,16)라고 말씀하시면서, 회당에서 채찍질 당하고,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이라고, 또 가족 간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고(마태 10,19 참조),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마태 10,22 참조).
어떻습니까? 세상의 논리로 따졌을 때, 과연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끔찍한 삶이고, ‘왜 저렇게 살아야 해?’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세상 것 너머에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시간과 이 세상의 시간은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을 ‘영원한 생명의 삶’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 이 세상 삶은 짧은 순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1초의 행복을 구하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행복을 구하겠습니까? 세상 논리만을 좇는 사람은 모두 1초의 행복을 구하기 위해 아등바등 사는 사람이 아닐까요?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하느님 아버지께서 일러 주실 것이고, 우리 안에서 아버지의 영이 말씀하신다고 하십니다(마태 10,19-20 참조). 이것이 하느님의 손길에 굳게 믿고, 하느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면서 끝까지 견디는 이만이 구원을 받습니다(마태 10,22 참조).
오늘의 명언
사람은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 (에이브러햄 링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하느님을 향한 여정은 한순간의 열정보다 매일의 충실함에서 시작됩니다. 기도하고 일하며 그리스도 안에 머문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그가 남긴 것은 말이 아닌 기도하고 노동하는 삶이었습니다.
모든 생활의 중심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입니다. 모든 일에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자세로 일상과 노동도 거룩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그 어떤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동도 거룩한 기도입니다. 노동은 우리 실존을 정직하게 직면하는 도구이며 기도는 존재의 근원을 여는 문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기도와 노동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을 거룩하게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개인의 자아는 관계 속에서 정화됩니다. 이렇듯 다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곳에 뿌리내리고 인내하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지향합니다. 쉽게 떠나지 않고 깊게 머무는 성화의 길입니다.
자기 부정이 아닌 균형 잡힌 내적 자유를 지향합니다. 머무르는 정주 생활은 도피가 아니라 사랑의 뿌리내림입니다. 오늘도 조용히 기도하고 묵묵히 일하며 가장 좋으신 하느님 안에 머물게 하소서.
마태오복음 10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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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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