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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7/07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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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7월 7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7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28,10-22ㄱ)
    야곱은 하느님의 천사들이 층계를 오르내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 오늘 복음
    (마태 9,18-26)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창세 28,10-22ㄱ
오늘 제1독서

야곱은 하느님의 천사들이 층계를 오르내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 무렵 

10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다가, 

11 어떤 곳에 이르러 해가 지자 거기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12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13 주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5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16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면서, 

17 두려움에 싸여 말하였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18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에 베었던 돌을 가져다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 

19 그러고는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성읍의 본이름은 루즈였다. 

20 그런 다음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21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22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9,18-26
오늘 복음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24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7일
김덕재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0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고난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

오늘 독서의 배경은 야곱이 형의 미움과 살해의 위협에서 벗어나 살고자 어쩔 수 없이 도망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온순한 사람으로, 천막에서 사는 사람, 곧 집에 머물기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창세 25,27 참조) 여행 자체가 커다란 시련이고 장거리 여행에 이미 지쳤을 것입니다.

형의 미움과 분노를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며 풀이 죽어 있었고, 처음 겪는 여행에 지쳤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사실에, 또 언제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희망마저 사그라든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이전까지는 아버지의 믿음을 배우고 함께 나누었지만, 이제는 하느님을 직접 마주하게 됩니다. 고난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떨고 있는 야곱을 당신 힘으로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은 그에게 든든한 방패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은 야곱에게 눈물겨운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주님께 드리는 서원의 내용을 보면 지금 당장 겪는 어려움, 곧 양식, 보호 등만을 이야기하는 점으로 보아 당장 필요한 것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이 없는 것에 아쉬움이나 부족함도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좁은 식견을 훨씬 뛰어넘어 풍족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해 주신 미래에 대한 약속은 그가 더 높은 곳, 더 넓은 곳을 바라보며 희망 속에서 삶의 여정을 계속 걸어가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에페 3,20)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앞뒤 좌우가 막힐 때 위를!

“야곱은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오늘 창세기에서 야곱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 유명한 야곱의 사다리(층계) 꿈입니다. 이 꿈은 환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환시라는 말이 있고 환청이라는 비슷한 말도 있는데 환청은 심리 정신과적으로 볼 때 병적인 증상입니다. 실제와 달리 듣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는 실제 아무 소리 없었는데도 들었다고 착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환시는 종교적으로 좋은 뜻이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것 곧 계시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환청과 환시나 물리적으로 듣고 보는 것이 아니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환시가 분명히 하느님께서 뭘 보여주신 것임에 비해 환청은 하느님의 소리도 어떤 누구의 소리도 아닌 자기가 그렇게 들었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그렇기에 야곱이 이 환시를 보고 난 뒤 한 말,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라고 한 말은 환시를 통해 하느님 현존 체험을 한 사람의 정확한 토로라고 할 법합니다.  

어쨌거나 이 환시를 통해서 야곱은 이제 하느님과 소통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꿈에서 본 사다리는 땅과 하늘을 소통하게 하는 사다리이고, 하느님께서 이 사다리를 통해 자기에게 내려와 함께 계시게 되는 사다리입니다.  

그는 지금 형 에사우에게 사기를 치고 도망치는 신세입니다. 뒤로는 형에게 쫓기며 죽임당할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고 앞으로는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몰라 매우 불안한 상황입니다.  

말하자면 앞뒤가 꽉 막힌 상황이랄까, 진퇴양난의 상황이랄까 그런 상황에서 막막해할 때 이 환시를 통해 하느님께서 앞뒤 좌우만 보지 말고 위를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봐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절망적일 때가 바로 구원의 때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야이로는 회당 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뿐입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모든 희망이 무너져 버린 참담한 순간입니다.  

또한,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은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느라 고생하였지만, 가진 것마저 모두 탕진해 자포자기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바로 이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이 순간, 하염없이 넘어지는 이 순간이 그들에게는 ‘더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에 대한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그를 더 깊은 믿음에로 이끄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혈루증 여인도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믿었지만, 사실 그들의 믿음은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언뜻 보기에는 미신적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주술적이고 마술적이기 까지 합니다. ‘이미 죽은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회당 장의 믿음 역시 억지 부리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짓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실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순간 주님을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의 옷깃을 만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만약,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한 까닭일 것입니다.  

사실,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거나, 예수님이 손을 얹어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요,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전능한 손길에 우리의 손을 맡겨드려야 할 일입니다. 믿음의 손으로 그분의 옷을 부여잡고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우리들 안에 흘러들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9,18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소원성취를 원하면 버튼을 찾아야!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우리를 두 개의 다급한 장면으로 초대합니다.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절박한 외침이고, 다른 하나는 12년 동안 하혈하며 고통받던 여인의 소리 없는 절규입니다. 죽어가는 딸을 살리려는 아버지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한 여인. 이 두 사람의 간절함이 예수님의 발길을 붙잡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몇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전능하신 예수님께서는 어차피 살리실 아이라면, 왜 그 자리에서 바로 “네 딸이 나았다.” 하고 선포하지 않으시고, 굳이 회당장의 집까지 그 먼 길을 함께 가셨을까요? 또한 하혈하던 여인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주술적인 믿음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그 여인의 믿음의 공식을 그대로 인정하고 치유해 주셨을까요? 

한 노병사에게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원숭이 손’을 얻게 된 가족. 병사는 이 물건이 소원을 들어주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운명을 거스르는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며 불 속에 던져버리려 하지만, 가족은 호기심과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을 빼앗듯 가져옵니다. 

그날 밤, 가족은 반신반의하며 첫 번째 소원을 빕니다. “집 대출금을 갚을 수 있도록 200파운드를 달라.” 바로 그 순간, 원숭이 손이 손안에서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음 날, 아들이 다니던 공장에서 사람이 찾아옵니다. 아들이 공장 기계에 끼어 끔찍하게 사망했고, 회사는 위로금 명목으로 정확히 200파운드를 건넵니다. 첫 번째 소원은 아들의 목숨값과 맞바꾸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이성을 잃은 아내는 남편을 다그쳐 두 번째 소원을 빌게 합니다. “내 아들을 다시 살려내라!” 남편은 훼손된 아들의 시신이 돌아올 것을 두려워하며 말렸지만, 아내의 절규에 못 이겨 결국 소원을 빌고 맙니다. 시간이 흐른 뒤, 한밤중에 누군가 현관문을 둔중하게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아들은 돌아온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아내는 아들을 볼 수 있다는 기쁨에 문을 열어주려 하고, 남편은 문밖에 서 있는 것이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끔찍한 훼손된 시신임을 직감하고 공포에 떱니다.  

아내가 빗장을 풀려는 찰나, 남편은 미친 듯이 원숭이 손을 찾아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을 외칩니다. “그것이 사라지게 해달라!” 문 두드리는 소리가 멎고, 아내가 문을 열었을 때 밖에는 텅 빈 어둠과 바람만이 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모두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는 아들을 잃고, 그 아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가 영원히 사라지는, 파멸뿐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명확히 보여줍니다. 봉헌의 과정을 건너뛴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욕망이 성취될 때, 그 결과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바로 들어주시지 않고 믿음의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를 이처럼 끔찍한 파멸에서 지키시려는 사랑의 배려입니다.  

성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나무는 은총입니다. 이 은총을 위해 주님은 선악과를 봉헌하는 의지적 행위를 요구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봉헌 없이 탐욕으로 메추라기기를 먹다가 멸망하고 맙니다(민수 11,33 참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까지 ‘굳이’ 가셨는지를 말입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한 아버지의 ‘의지’라는 봉헌에 동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는지를 말입니다. 군중 속에 숨어서라도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려는 그 겸손한 ‘행위’를 통해, 그녀가 자신의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온전히 봉헌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 버튼은 장대 위의 구리 뱀을 쳐다보는 행위(민수 21,9)였습니다. 아람의 군대 장수 나아만의 믿음 버튼은 자신의 지위와 상식을 봉헌하고,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는 순명의 행위(2열왕 5,14)였습니다. 태생 소경의 믿음 버튼은 자신의 체면을 봉헌하고, 실로암 못까지 걸어가서 씻는 순종의 행위(요한 9,7)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인간의 전략을 봉헌하고, 병사들의 방패에 십자가를 그리게 하는 행위로 믿음을 증명했습니다.  

이 모든 행위의 공통점은 ‘봉헌’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자존심, 나의 시간을 하느님께 바치는 겸손의 행위이자, 그분만이 왕이심을 인정하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혹시 지금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는 소원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나만의 ‘믿음 버튼’을 만들어 보시길 권합니다. 나를 왕이 되지 않게 하고 그분의 자녀로 머물게 만드는 나만의 선악과, 나만의 봉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54일 기도처럼 오랜 시간 자신을 봉헌하는 인내일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무릎을 꿇는 겸손일 수도 있고,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를 끊어내는 작은 단식일 수도 있으며, 가장 용서하기 힘든 그 사람을 위해 나의 분노를 봉헌하며 자비의 기도를 바치는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분께 봉헌하며 ‘믿음 버튼’을 누를 때, 우리의 기도는 “제 뜻대로 해주소서!”라는 명령에서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사랑의 고백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옷자락을 스치는 믿음만으로도 영원한 생명나무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포기’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우리가 더 큰 가치를 실현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준비된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어떻게 따랐습니까? 포기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물을 내려놓고, 가족을 뒤로하고 따라야 했습니다. 심지어 부모의 장례까지 포기해야 했습니다. 
 
신부로 살기에 많은 죽음을 봅니다. 그중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바쁜 사업으로 인해 전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너무 바쁘다고 병원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암 말기에나 병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이미 늦었다고, 이제 얼마의 시간이 남지 않았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안타까워하는 다른 신자의 부탁으로 병자성사를 주러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분께서는 포기하지 않았다면서 병자성사를 강력하게 거부하셨습니다. 병자성사를 죽기 직전에 받는 성사로만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병자를 위한 기도만 하고 병실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형제님은 삼 일 뒤 의식을 잃으셨고, 그때서야 가족이 제게 연락하셨습니다. 얼른 병원에 갔지만, 이미 주님 곁으로 가신 상태였습니다. 
 
신앙 안에서 포기라는 것을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 것의 포기가 있어야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는 분이 많습니다. 다 가지고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만 할 뿐, 하느님 안에서의 행복을 상상도 하지 않고 계십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가 해야 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선택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을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는 기적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여인을 고치시는 주님의 기적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먼저 회당장은 유다인 공동체의 중심인물로 존경받는 위치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간청한 것은 자기의 지위와 명예를 모두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이 포기가 있었기에, 사람들이 모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확신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자기 딸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혈루증은 유대 율법상 부정한 질병으로, 사회적, 종교적 배제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몰래 접근해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댑니다. 율법을 어긴 것이지만, 그녀는 율법보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앞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마태 9,2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녀 역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세상의 관습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선택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포기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나를 철들게 한다더니, 살림이 그렇다 (은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은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참된 믿음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삶 전체를 회복시키는 전인적인 치유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죽음조차도 생명으로 이끌어집니다. 주님의 자비는 조건 없이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병든 존재가 아니라 존귀한 자녀로 부르십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용기는 곧 믿음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여인의 믿음은 단지 마음속 생각이 아니라 손을 뻗어 옷자락을 만지는 실천적인 믿음입니다.

구원은 몸의 치유만이 아닌 관계의 회복 소중함의 회복 영혼의 치유까지를 포함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만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회복시키는 구원의 본질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사랑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렇듯 구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믿고 다가가는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응답입니다.

오늘 하루 두려움보다는 믿음을 선택하며 예수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구원의 날 되십시오. 구원은 용기와 믿음의 결합입니다.

 

 

 

창세기 28장 15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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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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