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4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6일 연중 제14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66,10-14ㄷ)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 제 2독서
(갈라 6,14-18)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0,1-12.17-20)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이사 66,10-14ㄷ
오늘 제1독서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기뻐하고 그를 두고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던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11 너희가 그 위로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리라. 너희가 그 영광스러운 가슴에서 젖을 먹어 흡족해지리라.
1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13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14 이를 보고 너희 마음은 기뻐하고 너희 뼈마디들은 새 풀처럼 싱싱해지리라. 그리고 주님의 종들에게는 그분의 손길이 드러나리라.
갈라 6,14-18
오늘 제2독서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14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15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16 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
17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18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
루카 10,1-12.17-20
오늘 복음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6일
양진홍 제랄도 신부
✚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소개 00:20
✚ 미사시작 01:14
✚ 강론시작 16:45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평온하고 화목함
제1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선포되는 오늘의 주제는 ‘평화’입니다. 제자들이 하는 선포의 핵심, 곧 복음의 요약은 평화입니다. 평화는 ‘평온하고 화목함’을 뜻합니다. 평온은 평안한 것이고, 화목은 ‘함께’ 누리는 것으로 ‘공동체성’을 띱니다.
‘평안함’의 반대말은 ‘불안’,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며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루카 10,3) 같다고도 하십니다. 어떻게 평온할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은 그들이 선포하는 메시지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10,9).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고 돌보시며, 영원한 생명까지 보장해 줍니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는 데서 평화가 옵니다. 이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릅니다.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존재 자체가, 삶의 방식 자체가 선포입니다.
‘화목’의 반대말은 ‘전쟁, 싸움, 갈등’으로, 이는 결핍의 상황일 때 생깁니다. 제자들의 상황 자체가 바로 결핍의 상황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결핍은 마음에서 옵니다. 많은 재산을 가졌으면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탐욕’과 ‘분쟁’이 나올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탐욕’의 반대말은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신 가난한 삶을 스스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난을 통하여 연대하고 함께함으로써 부요해짐을 배웠습니다. 가난하지만 함께 뭉침으로써 화목과 부요를 얻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Peace Maker? Peace Breaker?
오늘 연중 제14주일의 주제는 주님의 평화 선포입니다. 오늘 첫째 독서 이사야서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러니까 이 두 말씀을 연결하면 주님께서 어딘가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시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그 평화 선포의 일꾼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Peace Maker(평화 조성자)인가, Peace Breaker(평화 파괴자)인가? 내가 가는 곳마다 나는 평화를 강물처럼 흘러들게 하는 자인가, 내가 가는 곳마다 나는 분란을 일으켜 평화를 파괴하는 자인가?
나는 내 마음의 평화도 지니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내가 어떻게 세상에 평화를 흘러들게 하고 그것도 강물처럼 흘러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이 맞습니다. 평화의 선포자가 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평화의 담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 평화의 담지자(擔持者)!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맡아 지니고 사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먼저 인격적인 평화입니다.
아기가 어머니와 같이 있으면 그 자체로 평화롭고 어머니와 떨어지면 그 자체로 불안하여 평화가 없듯이 주님이 곧 우리의 평화인 평화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평화를 먼저 사는 평화입니다.
쉽게 말해서 평화란 다투거나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너 왜 그러냐고, 왜 그렇게 지지리 못났냐고, 너 왜 내 말 받아들이지 않고, 내 사랑 받아들이지 않냐고, 너 왜 나를 존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냐고 시비 걸지 않고 그러냐고 하는 겁니다.
평화? 왜 그러냐고 하지 않고 그러냐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에 평화를 빌라고 하시는데 그 집이 평화를 받아들이면 그 집은 평화가 머물러 좋고 나는 평화를 전한 사람이 되어서 기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평화를 빌어주고 주님 평화를 전해줬는데 거절할 때 그것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화가 나고 미워지고 하면 평화를 준다고 하다가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Peace Maker가 되겠다고 갔다가 Peace Breaker가 되는 겁니다. 어쨌거나 나는 주님의 평화를 줄 수 있을 만큼 평화가 있습니까?
나는 주님의 평화를 전하고픈 강한 열망과 원의가 있습니까?
내 평화가 깨질까 봐 남의 평화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지금 북한이나 분쟁 지역에 프란치스코처럼 평화의 사도로 갈 마음은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오늘 말씀전례는 ‘말씀의 선포’와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귀양살이 후에 있게 될 예루살렘의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이사 66,12-1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로운 창조를 입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감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갈라 6,17)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흔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장면과 당부 말씀, 그리고 돌아온 제자들의 활동보고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이 말씀은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곧 복음 선포의 시급성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먼저 필요한 것이 ‘기도’임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추수는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기를 명하십니다.
이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몸소 가시려는 곳으로 앞서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리 떼’가 없는 곳이나 ‘이리 떼’를 제거해 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화로운 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에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서 보내진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요, 내가 파견된 곳입니다.
(사실, “이리 떼 가운데 양처럼” 보내신 것은 종말에 늑대와 새기 양이 평화롭게 뒹굴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닐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이사 11,6;65,25 참조)에 따른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나타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앞 장에서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권고하셨듯이, ‘하지 말 것’과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 어떤 안전장치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신발이 아니라 ‘주님의 신발’을 신고 걸으며,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짊어지고 다니며,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고,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면서 먼저 ‘축복의 인사’를 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 함은 빈부귀천 없이 어느 집에든지 평화를 빌어주며, 인사를 받으려하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인사를 나누며,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에서 오는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입니다.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은 먹어라” 함은 음식물에 대한 유대적 관습에 매여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방해 받지 않도록 하며, 일꾼으로서 정당한 삯을 마련해 줄 것이니 먹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함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을 전파하고 증거 하는 것이 소명임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파견의 본질과 당부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곧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과 ‘주님께서 하시고자 한 일’을 깨달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며’, ‘먼저 신뢰하고 먼저 평화를 빌며’, ‘먼저 하느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파견 받은 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행위’에 앞서 먼저 ‘존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파견 하신 분’을 섬기고 따르는 존재 말입니다. 먼저 자신의 정체성과 신원을 알아야, 그에 합당하게 그분이 ‘하라 하신 일’을 하고, ‘하지 말라 하신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0,3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주님!
이리 떼에 둘러싸인다 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허리에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주머니를 차게 하시고,
등에는 여행보따리가 아니라
믿음의 보따리를 지게 하시고,
발에는 신발이 아니라
희망을 등불로 삼고
당신께만 의탁하게 하소서.
길에서 인사하느라
서성거리지 않고
오로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따름이 오로지
저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평화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평화를 줄 때 더 큰 평화가 오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평화의 사명’으로 파견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으면 주님이 주신 평화를 전하라는 복음 전파 사명으로 파견받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평화의 사명으로 파견되는 것이 왜 기쁨으로 끝날까요? 그러한 사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왜 기쁠 수 없는지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평화의 사명이 없는 사람들이 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느냐면 필연적으로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명령을 수행하며 삽니다. 대부분은 자아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자아는 생존이 목표입니다. 그런 자아의 명령을 받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만날 때 기본적으로 ‘어떻게 하면 나를 평화롭게 할까?’를 생각합니다. 평화란 생존에 대한 보장입니다. 육체의 생존을 보장받고자 하는 이들은 돈과 맛과 힘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될까요? 이런 것을 추구하면 외로워집니다. 누구도 자신들에게서 돈과 맛과 힘을 빼앗는 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기는 자기 평화를 위해 남의 피를 노립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음을 압니다. 모기약에 죽을 수도 있고 손바닥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찮은 평화를 위해 그런 두려움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영화 ‘에비에이터’가 그려내는 억만장자 하워드 휴스의 삶은, 자기 생존을 위한 평화만을 추구하는 ‘모기’와 같은 인생이 결국 얼마나 비참한 파멸로 끝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그의 비극은 유년 시절, 어머니가 심어준 깊은 불안감에서 시작됩니다. 영화의 초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목욕시키며 세상의 세균에 대해 경고합니다.
“너는 안전하지 않아(You are not safe).”
이 말은 단순한 위생 교육을 넘어, 세상은 위험하고 너는 언제든 오염될 수 있다는 공포의 씨앗을 그의 영혼 깊숙이 심어놓습니다. 여기서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돈과 여자와 권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타인의 돈과 힘, 쾌락이라는 피를 빨아먹으며 자신의 생존과 평화를 보장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재정적 상황이 불안해질수록 그의 강박증은 더욱 심해져,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자신을 어두운 방 안에 격리합니다. 세균이 두려워 통조림만 먹고, 손톱과 머리카락이 흉측하게 자라도 내버려 둔 채 자신만의 감옥에 갇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나를 살리려는 마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타인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아가 명령하는 것을 안 들으려면 그와 반대되는 내어줌의 명령을 내리시는 하느님을 주인으로 삼아야 합니다. 저도 사실 저의 평화를 위해 살 때는 언제나 불안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완전히 다른 사명, 곧 “이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삶이 아닌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자!”를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그 집의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다른 이의 평화를 위해 살라는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한 여인으로 살다가 어머니가 되면 어떨까요? 자신이 한 여자였음을 잊고 이젠 자녀에게 평화를 주어야만 하는 사명으로 다가갑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런 아내에게 남편은 평화를 줍니다. 만약 자녀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면 어떨까요? 평화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의 평화가 다시 돌아옵니다.
호세아 예언자의 삶은 하느님께서 한 인간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얼마나 절절하게 드러내시는지를 보여주는 한 편의 살아있는 비유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가서 음행하는 아내를 맞아 음행의 자식들을 낳아라. 이 나라가 주님을 버리고 음행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호세 1,2)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처음부터 호세아의 결혼이 그의 개인사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깨어진 관계를 상징하는 공적인 예언 행위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또,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간음하는 그 여자를 다시 사랑하여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 건포도 과자를 좋아하는데도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여라.”(호세 3,1)라고 하십니다. 이미 창녀와 같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이젠 그리스도를 보내어 또 구속하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아내를 사랑하면서 호세아는 어떤 평화를 누릴까요?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며 참 평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얻은 것은 하느님의 가장 깊은 마음을 엿보는 영적인 통찰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예언자 요나가 자기를 서늘하게 해 줬던 박넝쿨이 말라버렸을 때 니네베 시민들에게 가진 하느님의 마음을 알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주는 이유는 그것 때문에 악령들이 쫓겨나고 그래서 그들이 평화의 사도로 변하는 나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이름을 자녀로 삼아 하느님 나라의 상속권을 받았다는 사랑받는 느낌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기가 되지 않고 사랑이 외면당해도 상관없는 사랑을 전하는 사명을 수행합시다. 주님의 평화가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에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과 결혼한 사람이 당신과 싸울 사람이고, 당신이 선택하는 꿈의 직업이 당신에게 스트레스를 줄 직업이다.”
크게 와닿는 말이었습니다. 결혼은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본인이 그토록 원하는 결혼이어도 부부싸움 한번 없이 살고 있다는 분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 때문에 어렵고 힘든 삶을 살 때도 많습니다.
또한 꿈이 스트레스를 준다는 말에도 크게 공감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의 꿈은 신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 1월 28일에 그토록 꿈에 그리던 신부가 드디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원하던 길이었으니 지금까지 전혀 스트레스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길이 절대 쉽지 않음을 자주 깨닫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에서 고통과 시련은 계속되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고,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서 고통과 시련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코헬렛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허무로다 허무”(코헬 1,2)였습니다.
세상 삶에서 스트레스를 없애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던 모범인 겸손과 사랑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해서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 10,2)
일흔두 명은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모든 민족의 목록을 말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을 넘어서 온 세상을 향한 선교를 암시합니다. 이 일흔두 제자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을 때 너무나 큰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세상의 편안함과 안락함과 거리가 있었습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해서 무조건 세상의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전혀 없을까요? 이것도 아닙니다. 스트레스는 어떨까요? 역시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을 실천함으로 하늘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는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얻는 나의 행복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 (윌리 페이머스 아모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거라.
우리 모두 하느님의 길 위에 있는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익숙함을 떠나는 파견이 있기에 새로운 만남이 있습니다. 우리는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라 떠나고 보내심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속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삶이 바로 제자들의 삶입니다. 복음 전파는 미룰 수 없는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물질과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신뢰의 삶입니다.
신뢰의 삶은 사람의 반응에 초연한 삶입니다. 파견의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작입니다.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향한 사랑의 여정입니다. 이 사랑의 여정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겸손의 여정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하느님의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의 도구는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깁니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의 감사의 응답이 복음으로 드러납니다.
복음은 익숙한 것을 떠나는 신앙의 용기를 보여줍니다. "가거라." 그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하느님의 길 위에 다시 서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랑의 시작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하느님의 뜻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보내심 받은 사람들임을 기억합시다. 보내심이 가장 좋은 은총입니다. 우리는 가기만 합니다. 그 외에는 하느님께서 모두 하십니다.
루카복음 10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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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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