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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7/09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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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7월 9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41,55-57; 42,5-7ㄴ.17-24ㄱ)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 오늘 복음
    (마태 10,1-7)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창세 41,55-57; 42,5-7ㄴ.17-24ㄱ
오늘 제1독서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무렵 

55 이집트 온 땅에 기근이 들자, 백성이 파라오에게 빵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러자 파라오는 모든 이집트인에게 말하였다. “요셉에게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56 기근이 온 땅에 퍼지자, 요셉은 곡식 창고를 모두 열고 이집트인들에게 곡식을 팔았다. 이집트 땅에 기근이 심하였지만, 

57 온 세상은 요셉에게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몰려들었다. 온 세상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42,5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가는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6 그때 요셉은 그 나라의 통치자였다. 그 나라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이도 그였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들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절하였다. 

7 요셉은 형들을 보자 곧 알아보았지만, 짐짓 모르는 체하며 그들에게 매몰차게 말하면서 물었다.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 

17 그러고 나서 그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18 사흘째 되던 날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살려거든 이렇게 하여라. 나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19 너희가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너희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만 감옥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굶고 있는 너희 집 식구들을 위하여 곡식을 가져가거라. 

20 그리고 너희 막내아우를 나에게 데려오너라. 그러면 너희 말이 참되다는 것이 밝혀지고, 너희는 죽음을 면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21 그들이 서로 말하였다.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애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 주지 않았지.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 거야.” 

22 그러자 르우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기에 내가 ‘그 아이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하고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말을 듣지 않더니,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23 그들은 자기들과 요셉 사이에 통역이 서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알아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24 요셉은 그들 앞에서 물러 나와 울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0,1-7
오늘 복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9일
이종욱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3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그들을 묶어 주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처음으로 하신 일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마태 4,17-22 참조).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어 공동체를 형성하셨고 그 가운데에서 특별히 열두 명을 뽑아 사도라는 칭호를 주시며(루카 6,13 참조)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것은, 본디 열두 지파로 이루어졌으나 유배 후에 사라진 지파들도 많아서 지금은 그 명맥조차 잇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재건하시려는 의도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는 공동체가 중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들을 하나하나 곰곰이 살펴보면 이들의 공동체 삶이 녹록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유다의 독립을 위하여 무장 투쟁마저 마다하지 않았던 열혈당원 시몬은 로마 제국을 위하여 일하였던 세리 마태오와 관계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뚫린 손과 발, 옆구리를 보고 손가락을 넣어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할 만큼 신중하고 의심 많은 토마스는 성급하고 충동적이던 베드로와 다혈질이던 제베대오의 아들들과(루카 9,54; 마르 3,17 참조) 같이 지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신중하게 공부하던 지식인 나타나엘은(요한 1,48 참조) 많이 배우지 못한 어부 출신 제자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거짓이 없는 그는(1,47 참조) 공동체 지갑에서 자주 돈을 빼내 가던 부정직한 유다 이스카리옷을(12,6 참조) 보면서 분통이 났을 것입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묶어 주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핵심을 잃으면 우리의 공동체는 바로 서지 못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부터, 가정에서부터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파견하시는데 다른 민족에게는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만 가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른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주님께서 원치 않으시기에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왜냐면 같은 복음 맨 마지막에서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다른 사명 곧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그러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은 ‘지금 여기서부터’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또는 ‘지금은 우리 가정에서부터’라는 말씀도 될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사도로 뽑힌 지금은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복음 선포는 나중으로 미루고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부터 찾으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자기 가정부터 복음화하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종종 자기 가정은 팽개치고 전도한답시고 길거리로 나가는 사람이나 가정 살림은 돌보지만 신앙 면에서는 자기 가족들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복음 전하러 가는 사람에게 주님은 같은 말씀을 하실 겁니다.  

그런데 왜 이러는 겁니까? 마음이 없어서입니까? 사랑하지 않아서입니까? 아닙니다. 제일 사랑합니다. 그런데도 자기 가족에게 복음 선포하는 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구절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처음부터 복음적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사랑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관계가 틀어졌기 때문입니다.  

제일 사랑하기에 바라는 것이 제일 많고 그래서 상처를 제일 많이 주고받는 것이 가족이지요. 그리고 이미 인간적으로 상처를 주고받은 상태에서 복음적 사랑이 뚫고 들어가는 것이 싶지 않고, 아직도 복음적 사랑이 앞서지 못하고 감정이 앞서기에 밖에 나가서는 복음적 사랑을 시도하고 집에서는 그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뿐이 아니고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치색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적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참 신앙인이라면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복음적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복음적 사랑이 정치적 견해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면에서 제가 아는 한 부부는 아주 모범입니다. 인간적 성숙으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할 뿐 아니라 복음적 사랑으로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부터 복음을 살고, 가정에서부터 복음적 사랑을 살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늘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다.

오늘부터 우리가 듣게 되는 말씀은 <마태복음>의 다섯 개의 설교모음집 중에 두 번째에 해당하는 제10장의 “파견설교”입니다.

앞 장면에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37)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당신의 일꾼으로 파견하시면서, “먼저” 사도로서의 권위와 힘을 부여해주십니다. 곧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이는 제자들의 권위와 능력이 그들 자신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요,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징표가 됩니다. 이제 제자들은 단지 예수님만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 스승과 하늘나라를 증거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특별한 이들, 곧 ‘사도’가 된 것입니다.

이는 여기 모인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로부터 파견 받았다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소명을 부여받은 특별한 이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5-6) 

복음전도의 대상을 이스라엘로 제한한 이러한 사실은 민족적 편견이나 영원히 지켜져야 할 지침이 아니라, 복음이 하느님의 경륜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아직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된 것은 <사도행전>에 따르면, 스테파노가 순교한 후라 할 수 있습니다(사도 11,19-20).

또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하시니, 먼저 우리 곁에 있는 “길 잃은 양들”이 누구인지를 찾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인 것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선포되고, 하늘나라가 “우리 안에” 흘러넘쳐야 할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분의 나라, 그분의 지배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그분의 제자요 사도임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이 선포됩니다. ‘가까이 왔다.’라는 말의 원어의 뜻은 ‘주먹 안에 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하늘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선물로 주어진 나라요, 동시에 우리의 협조를 통하여 함께 이루어나가는 나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나라를 우리 안에서 발견하고, 또 실현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0,7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주님!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곳으로 가게 하소서.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게 하소서.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게 하소서. 

해야 할 바를 그만두지 않고 
가야 할 길을 멈추지 않으며 
지켜야 할 바를 끝까지 지키게 하소서. 

내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늘 나라가 왔다가 아니라 '다가왔다'고 선포하라는 의미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늘 나라가 여기에 있다’가 아니라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하늘 나라가 단순히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우리 현실의 문턱을 넘어섰고, 그 도래하는 힘 앞에서 모든 이가 자신의 입장을 선택해야만 하는 ‘결단의 순간’이 왔음을 알리는 가장 긴급한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이 선포는 마치 C.S. 루이스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에서, 마녀의 저주로 영원한 겨울 속에 갇혔던 나니아에 “위대한 왕 아슬란이 오신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과 같습니다. 왕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겨울은 여전히 매섭습니다. 그러나 왕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만으로 얼었던 강이 녹고, 눈 속에서 꽃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미세한 변화 앞에서 나니아의 모든 존재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다가오는 봄의 소식을 기뻐하며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이들과, 오히려 녹아내리는 눈과 얼음을 보며 불안해하고 어떻게든 겨울의 질서에 집착하려는 이들로 갈라집니다. 한쪽은 생명을, 다른 한쪽은 익숙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이 갈림길의 본질을 이렇게 꿰뚫어 봅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 3,19) 

이 선택의 드라마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의 종살이에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 모세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10가지 재앙을 통해 이집트의 신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십니다. 나일강의 신, 태양신 라, 생명의 주관자 파라오의 권능이 하느님의 힘 앞에서 차례로 무너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던 파라오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보며 진정으로 기뻐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파라오의 권세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자유의 희망에 가슴 벅차했던 이들만이, 눈앞의 홍해를 건널 용기를 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도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며 불평하던 이들은, 결국 자유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노예 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그 고통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도 이 영적 전쟁은 동일하게 벌어집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C.S. 루이스는 ‘신은 없다’는 지성의 성채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 차가운 어둠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 J.R.R. 톨킨은 끈질긴 우정 속에서 참된 신화이신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루이스는 훗날 자신의 회심을, 오랫동안 지켜온 자기 생각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 무너짐을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감옥에서 풀려나는 ‘기쁨’과 ‘안도’로 느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어둠의 차가운 안정감보다, 자신을 무너뜨리러 오신 빛의 따뜻함을 더 갈망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이 갈망이 있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를 자신의 것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를 이 선택 앞에 세웁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는 이유는 우리 논리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어둠을 선택했는데, 자꾸 빛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선택을 강요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그 미세한 행복을 누리며 빛을 선택하지 않으면 생명은 없다고. 이것에 우리가 선포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다가오심입니다. 신명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신명 30,19)

슬프게도,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이 생명을 선택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돈과 성공이라는 우상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불안해하고, 자존심의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우리를 교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참된 행복은 소유의 겨울이 아니라 자유의 봄에 있습니다. 세.육.마.를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요 종살이임을 알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행복을 선택하도록 가르치는 환경에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훨씬 많아질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맛만 느끼게 하는 존재들이고 그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스라엘의 길잃은 양들에게 가라.

매일의 삶이 똑같아서 지루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 역시 신학생 때 그런 마음을 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규칙적인 생활, 틀에 맞춰진 생활을 하다 보니, 새로운 것 없이 매일 똑같은 삶이 반복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과연 신학교 생활을 잘할 수 있었을까요? 특별한 삶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지루하고 재미없는 삶의 연속이라는 생각만 가득했고, 잘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월 피정 중에, 똑같은 반복으로 매일을 똑같은 반복으로 여겨서 힘들게 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일이 다르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을 똑같이 한번 살아보자.”라고 다짐했습니다. 똑같이 매일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루만에 하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매일은 결코 똑같을 수 없다.”
 
오늘 하루는 오늘만의 유일함으로 온전하고 완벽합니다. 즉, 우리는 매일 특별하고 완벽한 하루를 주님께 선물 받았고, 그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면 소중한 하루를 대충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당연히 여기서 지루함이 느껴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 특별함과 소중함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단순히 당신을 따르는 추종자로 보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보다 당신의 사명을 함께 나눌 동반자로 제자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에서 나오는 고유 권한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권한을 나눠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이유는 특별하고 소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권위를 나눠주면서 더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열두 사도만 해당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사도단은 12명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열둘은 어부, 세리, 열혈당원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새 이스라엘,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 역시 주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아들이면 분명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어서, 매일 특별하고 완벽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보다 세상의 틀 안에서, 세상의 것만을 쫓으면서 계속 특별한 것만을 찾는 것이 아닐까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이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명언

성장은 뜻밖의 어둠 속에서도 도약할 때 이루어진다 (헨리 밀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예수님의 제자는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제자들입니다. 그들의 인간적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께 받은 능력으로 그들은 사명을 수행합니다.

사도들은 공동체 안에서 부르심을 완성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가장 약한 이들을 먼저 향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무질서가 아닌 사랑의 우선적인 질서 속에서 실현됩니다.

길 잃은 양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다시 회복되어야 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가까이 있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또한 길을 잃었던 한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길 잃은 양은 방황하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지않고 사랑으로 기억하십니다.

먼저 찾아오시어 기쁨으로 다시 안아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단 한 마리의 양에게만 국한된 사랑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보편적 자비의 마음입니다.

잃은 이를 향한 우리의 사랑 안에 이미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길 잃은 이의 마음 곁입니다. 그 마음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하루 되십시오.

 

 

 

마태오복음 10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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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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