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44,18-21.23ㄴ-29; 45,1-5)
하느님께서는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이집트로 보내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10,7-15)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창세 44,18-21.23ㄴ-29; 45,1-5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이집트로 보내셨습니다.
그 무렵
18 유다가 요셉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나리, 이 종이 감히 나리께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나리께서는 파라오와 같으신 분이시니, 이 종에게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19 나리께서 이 종들에게 ‘아버지나 아우가 있느냐?’ 물으시기에,
20 저희가 나리께 대답하였습니다. ‘저희에게 늙은 아버지가 있고, 그가 늘그막에 얻은 막내가 있습니다. 그 애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 아들로는 그 애밖에 남지 않아, 아버지가 그 애를 사랑합니다.’
21 그러자 나리께서는 ‘그 아이를 나에게 데리고 내려오너라. 내 눈으로 그를 보아야겠다.
23 너희 막내아우가 함께 내려오지 않으면, 너희는 다시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하고 이 종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4 그래서 저희가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에게 올라갔을 때, 나리의 말씀을 아버지에게 전하였습니다.
25 그 뒤에 저희 아버지가 ‘다시 가서 양식을 좀 사 오너라.’ 하였지만,
26 저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희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막내아우가 함께 가야 저희가 내려갈 수 있습니다. 막내아우가 저희와 함께 가지 않으면, 저희는 그 어른의 얼굴을 뵐 수 없습니다.’
27 그랬더니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가 저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아내가 나에게 아들 둘을 낳아 주었다는 것을 너희도 알지 않느냐?
28 그런데 한 아이는 나를 떠났다. 나는 그 애가 찢겨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였고, 사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아이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29 그런데 너희가 이 아이마저 나에게서 데려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게 되면, 너희는 이렇게 백발이 성성한 나를, 비통해하며 저승으로 내려가게 하고야 말 것이다.’”
45,1 요셉은 자기 곁에 서 있는 모든 이들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모두들 물러가게 하여라.” 하고 외쳤다. 그래서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힐 때, 그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2 요셉이 목 놓아 울자, 그 소리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들리고 파라오의 궁궐에도 들렸다.
3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직 살아 계십니까?” 그러나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너무나 놀라, 그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4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나에게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서는, 그들이 가까이 오자 다시 말하였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5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마태 10,7-15
오늘 복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10일
하태성 요셉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50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형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요셉
오늘 독서에서 형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요셉의 모습은 감동을 넘어 놀랍기까지 합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창세 45,5).
죄책감으로 괴로워할 형들의 마음을 살피는 요셉의 이 말은 용서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용서는 ‘지나간 일은 잊자.’,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으로 가해자의 잘못을 덮어 버리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거짓 화해가 아닙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팔아넘겼다고 두 번이나 말하면서 잘잘못을 분명히 따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진정한 용서와 받아들임이 이루어집니다. 이 용서의 힘은 신앙에서 나옵니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45,5).
형들만이 아니라 자신까지 포함한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 구원의 손길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이, 형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 깊이 들어오시는 그분의 손길과 뜻을 알아차림으로써 원망과 미움 대신 용서와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깨닫고 믿은 하느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놀라우신 하느님이셨습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50,20).
물론 요셉도 처음부터 이것을 깨닫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고통을 받으면서도 끊임없는 질문과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미움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사랑과 용서라는 해방 속에서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많은 고통을 겪지만 신앙 안에서 그 뜻을 깨닫는다면 요셉처럼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인간의 악행을 구원 기회로 바꾸시는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 일이든 공동체의 일이든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탓을 남에게 돌리는 것은 윤리적으로 비열한 짓일 뿐 아니라 자기 인생의 성공과 성장과 행복 면에서도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남의 탓도 있겠지만 나의 탓도 있는 것이기에 나의 탓을 탓해야 다시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잘못을 고치고 성장하고 성숙해지게 되고 행복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나친 자책(自責)은 나쁘지만, 자책 자체는 좋은 것이겠지요. 비슷한 맥락에서 자신에게 화내는 것이 남에게 화내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화란 어떤 화도 나쁜 것이지만 남에게 화내는 것보다는 내게 화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기를 괴롭히지도 말고 자기에게 화를 내지도 말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앞에서 얘기한 그런 인간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신앙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나 잘되었을 때나 하늘을 보는 것이 신앙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이 잘되었을 때는 자기 공이라고 하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남 탓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미성숙하고, 반대로 일이 잘되었을 때 다른 사람 덕분이라고 남을 추어주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자기 탓이라고 하는 것은 성숙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으로 그친다면 인간적으로 성숙한지 몰라도 신앙적으로는 부족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일이 잘되건 잘못되건 하늘을 볼 수 있어야 신앙적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잘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게 된 데는 아버지 야곱의 잘못도 큽니다.
곧 야곱의 편애가 형제들의 시기를 사게 한 것인데 형제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아버지 탓으로 돌리거나 변명하지 않고 자기들의 잘못이라고 하기에 성숙하고 진실한 회개의 모습이니 칭찬할 만한데, 요셉은 더 높은 신앙적 의미를 부여하며 자기에게 화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잘못해도 일이 잘되게 하실 수 있고 잘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든 잘되게 하려는 좋은 뜻을 가지고 계시고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인간의 잘잘못을 활용하십니다.
요셉이 팔려 간 것은 인간들이 한 짓이요 잘못된 것이지만 인간의 잘못을 구원 기회로 바꾸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모도 자식이 어떠하든 잘되기를 바라고, 우리도 자식이 어떠하든 잘되도록 돕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런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하느님의 이런 사랑을 늘 보는 것은 우리가 자주 놓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행을 구원 기회로 바꾸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줄 아는 관상의 눈을 요셉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인색하지 마라.
오늘도 우리는 ‘한마디’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항상 우리의 마음을 꿰찌르며,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인색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줄 때는 손해 본다는 마음이 없어야 하고, 그저 못 주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퍼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용서를 그렇게 베풀어주어야 하고, 사랑을 그렇게 하여야 하고, 가진 물질을 그렇게 내어주어야 하고, 하늘나라를 그렇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마음을 그렇게 내주어야 하고, 시간을 그렇게 내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가 그것들을 거저 받았음을 정확히 알아야만 합니다. 줄 수 있는 것, 그것은 자신이 만들거나 획득한 것이 아니라, 거저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신앙은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응답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은총이요,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받아들여진 것, 그것을 선포하고 증거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9-10)
그렇습니다. 당신께서 당신의 일꾼을 챙겨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입을 것, 먹을 것, 몸에 필요한 것, 그 어떤 안전장치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 하십니다.
그러기에, 이제 자기의 신발이 아니라 ‘당신의 신발’을 신고 걸어야 하고, 자기의 옷이 아니라 ‘당신의 옷’을 입고 다녀야 하고,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짊어지고, 자기의 힘이 아니라 ‘당신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자신을 받아주거나 받아주지 않거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기를 바라십니다.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며, 먼저 입으로 축복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고, 축복을 빌어주어야겠습니다. 마음으로 계산하지 말고, 군말 없이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형제에게 평화의 인사를 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평화를 건네주는 평화의 사도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0,8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
당신은 거저 주시는데도
제가 받지 못함은
제 그릇이 가득 차 있어
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입니다.
나누지 못해
비워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더러는 비워져도
엎어져 있어
담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니, 잘못 기울어져 있어
다른 데서 오는 것을
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비우고,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당신 사랑을 따라
거저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참된 나눔의 출발점 : 잃을 것이 없는 존재라는 확신
찬미 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를 고쳐 주고 죽은 이를 일으켜 주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를 쫓아내어라.”
그리고 이 모든 놀라운 권능을 주시면서, 가장 중요한 행동 원리를 덧붙이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이자,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 사도의 삶의 정수가 담긴 말씀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이 말씀은 단순히 ‘공짜로 받았으니 너도 공짜로 줘라.’라는 식의 거래 원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눔과 사랑의 가장 깊은 근원에 관한 통찰입니다. 참된 나눔, 진정한 자기 봉헌은 오직 ‘내가 먼저 충만히 받았다.’라는 깊은 감사와 마음의 평화에서만 흘러나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행동은 냉철한 이성에서 나오기보다, 따뜻한 감정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이미 모든 것을 받아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충만함과 기쁨, 그 평화로운 감정이 우리를 진정으로 ‘주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러한 마음의 평화와 감사 없이 무언가를 ‘주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하고 거짓된 것이 될 수 있는지, 영화 ‘위플래쉬’는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를 꿈꾸는 학생 ‘앤드류’이고, 그를 가르치는 사람은 악명 높은 교수 ‘플레처’입니다.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최고의 기회를 ‘주고’ 그를 전설적인 연주자로 ‘만들어주겠다.’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스승이 제자에게 베푸는 가장 큰 선물이자 나눔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플레처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제자에 대한 사랑과 존중 대신, 제2의 전설을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자신의 뒤틀린 집착과 광기만이 가득합니다. 그는 앤드류에게 칭찬 대신 모욕을, 격려 대신 폭언을, 가르침 대신 쇠 의자를 집어 던지는 폭력을 ‘줍니다’. 그의 모든 ‘주는’ 행위는 앤드류의 영혼과 재능을 자신의 만족을 위해 착취하는 이기적인 폭력일 뿐입니다. 그가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처이고, 가르침이 아니라 거짓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울 왕이 다윗에게 왕의 사위가 되는 명예와 군대의 지휘권을 ‘주는’ 척했지만, 그 마음에는 시기와 불안이 가득하여 실제로는 다윗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던 것과 같습니다. 마음의 평화 없이 주는 것은 이처럼 주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빼앗는 행위일 뿐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먼저 ‘거저 받았다.’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영화 ‘어바웃 타임’이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주인공 ‘팀’은 자기 가문의 남자들에게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 그는 이 엄청난 능력을 첫사랑을 얻고, 실수한 순간을 되돌리는 등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만드는 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능력의 진짜 사용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과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하루를 두 번 살아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온갖 긴장과 걱정 속에서 평범하게 하루를 살고, 두 번째는 똑같은 하루를 다시 살면서 첫 번째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세상의 아름다움, 주변 사람들의 미소, 일상의 작은 기쁨들을 온전히 느껴보는 것입니다.
팀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통해 놀라운 진실을 깨닫습니다. 바로 자신의 하루하루가 이미 선물이었고, 자신은 이미 모든 것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깨달음 이후, 그는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릴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실수해도 괜찮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이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전능한 능력이 있지만, 그저 현재를 충실히 받아들이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거저 받았기에’ 잃을 것이 없다는 믿음 안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조급함 대신 여유를, 불안 대신 평화를, 인색함 대신 사랑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기쁘게 내어주는 사람이 되려면 주님께서 얼마나 큰 사랑으로 나를 채워주시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거저 받았는지를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기쁘게 주려면 다 가졌다는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그렇다면 다 가져서 잃을 것이 없다는 확신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갖는 것의 정점은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해 주는 모든 것들, 아까운 마음이 들까요? 어머니에겐 자녀가 전부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보다 더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으며,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을 때에야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대가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1코린 4,7) 성체성사를 통해 이 믿음을 가지면 비로소 이젠 내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지난 5월에 11번째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본당 학생 중에 한 명이 제게 이렇게 묻더군요.
“신부님! 어떻게 그 많은 책을 낼 수 있어요?”
그 바탕은 2001년부터 시작한 ‘새벽 묵상 글’입니다. 그 글들을 모아서 책을 한 권씩 내다보니 벌써 11번째의 책을 출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처음 이 묵상 글을 쓸 때는 부담이 컸었습니다. 매일 다른 내용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처음 인터넷 공간에 묵상 글을 올리면서 글쎄 약속하고 말았습니다. 매일 빠짐없이 매일 묵상 글을 이 공간에 올리겠다고 말입니다. 이 약속을 어길 수 없어서 힘들어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즐기면서 묵상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 쓰는 재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글을 써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없지는 않지만, 쓰고 나서는 또 하나의 글을 완성했다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들어도 저 자신을 위해 필요함을 시간이 지날수록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약속은 지키기 힘듭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켰을 때의 이득은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느님과의 약속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하느님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는 분명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켰을 때 우리의 이득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큽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일까요? 그보다 예수님의 현존을 통해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하시지요. 선포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함께 따라야 함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면서 전교 여행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이 명령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성공적인 전교 여행이었음을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실천하면서 얻는 기쁨이 컸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늘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루카 10,20 참조).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특히 주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물론 그 순간에는 지키기 힘들고, 과연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키면 지킬수록 기쁨은 더 커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흠숭하는 사람에게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마음의 밑바닥에서 당신의 부름을 기다리는 스스로를 사랑하려고 노력하세요. 그와 함께 살아보세요 (릴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바람마저 무더운 이 여름날 가볍게 비우는 법을 복음에서 배웁니다. 하느님 외에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할 것이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집착 없이 떠날 수 있는 담대함과 자유로움이 중요합니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충실함입니다. 하느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만이 우리 삶의 전부이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우리의 삶을 이끕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이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무소유는 단절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나누는 사랑의 충만한 방식입니다. 무소유는 이와 같이 자발적인 가난입니다.
집착과 소유는 우리 마음을 얽매이게 합니다. 무소유는 내려놓고 비우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자유이며 참된 실천입니다. 무소유는 하느님 사랑의 시작입니다. 오늘 덜 가지려는 실천이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길입니다.
마태오복음 10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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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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