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8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32,23-33)
네가 하느님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 오늘 복음
(마태 9,32-3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창세 32,23-33
오늘 제1독서
네가 하느님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그 무렵 야곱은 밤에 23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야뽁 건널목을 건넜다.
24 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이끌어 내를 건네 보낸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25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
26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 엉덩이뼈를 다치게 되었다.
27 그가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그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묻자, “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30 야곱이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하고 여쭈었지만, 그는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보느냐?” 하고는, 그곳에서 야곱에게 복을 내려 주었다.
31 야곱은 “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었는데도 내 목숨을 건졌구나.” 하면서, 그곳의 이름을 프니엘이라 하였다.
32 야곱이 프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의 위로 떠올랐다. 그는 엉덩이뼈 때문에 절뚝거렸다.
33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오늘날까지도 짐승의 엉덩이뼈에 있는 허벅지 힘줄을 먹지 않는다. 그분께서 야곱의 허벅지 힘줄이 있는 엉덩이뼈를 치셨기 때문이다.
마태 9,32-38
오늘 복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때에
32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8일
김동일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21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예수님과 우리는 무엇이 다를까요?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를 8장과 9장에 모아 두었는데, 그 끝자락에 자리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치유 활동을 요약하고 수확할 밭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10장의 파견 설교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사람들은 놀라워하고 경탄하기도 하고, 이제까지 백성들에게 존경받던 바리사이들은 질투로 중상과 비난과 적대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어떻게 행동하나요? 보통 나를 반기는 사람들과는 같이 있고 싶어 하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서 더 인기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피하고 싶고 똑같이 비난으로 대응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나요? 그분께서는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셨습니다. 곧 당신을 반기고 환호하는 곳이라 해도 계속 머무시지 않았고, 당신을 거부하는 곳에도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무엇이 다를까요?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9,37).
연민은 나를 떠나 상대를 향한 움직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매이시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신에게서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명, 곧 영혼들의 구원, 아버지의 일이라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늘 자신을 뛰어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의 사명이라는 목적의식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도 이기는 방법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야곱의 얘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야곱은 이제 오랜 타향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형 에사우와의 두려운 만남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만남을 앞두고 야곱은 하느님의 축복이 절실합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가족과 종들을 모두 보내고 하느님과 독대하고는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합니다.
그런데 어찌나 끈질기게 덤비는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뤄 이겼다는 말과 함께 그는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항복도 얻어내고 복도 얻어내고야 맙니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도 얻게 되는데 열두 지파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이 이름에서 비롯되고, 그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그의 어두운 면을 얘기하자면 그는 욕심이 많고 야비하며 약점도 무척 많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목적을 이뤄내는 사람인데,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싸움도 끈질기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는 형 에사우도 이기고 형에게서 도망쳐 찾아갔던 외숙 라반에게 내내 핍박을 당했지만 라반의 딸들을 아내로 얻고 그들에게서 난 아들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함께 돌아감으로써 마침내 사반도 이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하느님도 이겼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무슨 뜻이고 어떻게 이겼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원하던 것을 끝내 얻어냈다는 뜻이고,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으로 얻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형 에사우와 만나기에 앞서 하느님의 강복이 꼭 필요했습니다. 형의 적개심을 풀고 오히려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가 인간으로 해야 할 것은 다했고 그래서 이제 하느님의 강복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는 이렇게 청합니다.
“저에게 축복해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도 이래야 합니다. 원수와 맞서기 전에 이래야 합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이래야 하고, 원수였던 자와 화해하기 위해 이래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복을 주실 때까지 청해야 합니다. 제풀에 지치거나 기가 꺾이지 말고 들어주실 때까지 청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비유를 드신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 과부가 올바로 판결해달라고 재판관에게 청할 때 끈질기게 청하면 그가 비록 불의한 재판관일지라도 들어줄 것이고 귀찮아서라도 들어줄 것이라고 이 비유에서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은 불의하지 않고 정의로우시고, 귀찮아하지도 않고 기꺼이 들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철석같이 믿는 것, 그렇게 믿기에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도 이기는 방법인데 이것을 야곱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가만 두고는 차마 못 베기는 사랑
오늘 복음은 8~9장 나오는 10개의 기적 이야기 중 마지막 이야기로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이의 치유 이야기’와 ‘추수할 일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 못한 이를 치유하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음”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를 그냥 둘 수 없으시는 마음, 꺼져가는 불씨를 보고 마음이 상해 못 견디시는 마음입니다. 가만 두고는 차마 못 베기는 사랑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안달이 나신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만나는 길은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에게서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음”을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그를 못 본 척 하지 않고, 모른 척 하지 않고, 무관심하지 않는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함은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달리는 이들”, 그들은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고통과 슬픔, 질병과 가난, 근심과 절망으로 시달리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기가 꺾여있는 이들”, 그들은 인정해주지 않아서, 고용해주지 않아서, 거리에서 집에도 못 들어가는 기 꺾인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살아가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마태 9,38)
어쩌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꾼이 적어서가 아니라, 일꾼들이 ‘제 할 일을 안 하는 데’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느 날, 한 수도자가 벌거벗고 굶주린 채로 길거리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어서 하느님을 성토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왜 두고만 보십니까? 왜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겁니까?”
하느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현듯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했다니, 너를 만들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어 우리 안에 이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굶주린 소녀,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는 이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우리가 일꾼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수확할 밭의 일꾼으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 가운데 바람막이로 보내셨습니다.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에 제 마음을 심으소서. 제 마음이 그들을 어루만지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9,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고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기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탄의 힘을 이기는 유일한 무기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군중은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일이 일찍이 나타난 적이 없다.”라며 경탄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저자는 마귀들의 우두머리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비난합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사탄은 능력을 가질 수 없다.”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까지 유혹할 수 있다면 그것은 능력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사탄의 힘을 빌려 예언이나 주술적 능력을 발휘하는 무당과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능력이 아닌가?’라고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파괴하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세상은 파괴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지고 늙고 병들고 죽게 만듭니다. 반대로 세우는 게 능력입니다. 새롭게 짓고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는 것이 능력입니다.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모기가 피를 빠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기는 했지만, 모기에게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의 비판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고장난 부분을 고쳐주거나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말 못하는 이를 말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질문이 우리에게 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처럼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1980년 5월, 서울의 택시기사 김만섭(영화 속 이름, 실존인물 김사복)은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가장이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밀린 월세를 내고 어린 딸을 잘 키우는 것이었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거창한 신념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광주행을 결심한 것도, 통금 전에 돌아오면 10만 원이라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보면 ‘공부나 할 것이지’ 혀를 차던,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이었습니다.
광주에 들어선 그의 눈에 비친 광경은 처음엔 그저 ‘혼란’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손님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약속한 돈을 받아 서울로 돌아가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 그의 마음에, 광주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도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와 그에게 주먹밥을 건네던 시민들, 부상당한 친구를 업고 절규하던 대학생, 그리고 무엇보다 동료 택시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부상자들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마음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아픔은 곧 그의 아픔이 되었고, 그들의 절규는 그의 절규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연민의 마음’이 싹튼 순간, 돈 10만 원이 세상의 전부였던 소시민 김만섭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이 진실을 반드시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한 인간이 서 있었습니다. 그 연민은 이전에는 결코 가져본 적 없는 ‘용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군인들의 총구가 자신을 겨누는 상황에서도 그는 기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위험한 길을 피해 돌아갈 ‘지혜’가 생겼고, 자신의 생계 수단인 택시가 부서지는 것을 감수할 ‘희생정신’이 생겨났습니다. 그의 택시는 더 이상 돈벌이 수단이 아닌, 진실을 싣고 역사를 가로지르는 ‘기적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김사복 씨의 이야기는 증명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인 ‘연민’이 우리 안에 자리 잡을 때, 우리 역시 상상도 못 했던 용기와 지혜를 선물로 받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는 소위 ‘돈쭐’과 연결됩니다. 돈으로 혼내준다는 뜻입니다. 이런 가게 대부분은 자비를 베푼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능력이 전달되고 그 능력으로 다른 이들을 더 돕습니다. 이런 일이 선순환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자신들을 두려움으로 죄짓고 파괴하려는 사탄의 유혹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탄을 이기는 힘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버려진 모습에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 연민의 마음,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사랑의 마음이 하느님 능력의 원천입니다. 능력은 마음 다음에 옵니다. 마음이 능력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룩한 마음, 이 연민은 어떻게 우리 안에서 자라날 수 있을까요? 꽃을 키워본 사람은 모든 꽃을 사랑합니다. 자녀를 키워본 어머니는 다른 자녀들에 대한 연민도 가지게 됩니다. 연민은 바로 내가 작은 목자가 되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새로 탄생시키는 일을 할 때 길러집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먼저 농사의 일을 해 보아야 곡식의 소중함을 압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거둬들이지 않아 말라가고 썩어가는 곡식으로 보일 때 연민의 마음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모세가 처음 이집트에서 동족의 고통에 반응했을 때, 그의 손에는 기적의 지팡이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집트 왕자로서의 혈기와 분노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는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보고 의분에 차 주먹을 날렸지만, 그 결과는 동족의 외면과 미디안 광야로의 도피였습니다. 그 후 40년, 광야에서의 세월은 모세에게 ‘연민의 마음’을 훈련시키는 하느님의 시간이었습니다. 양들이 쉴 만한 풀밭과 마실 물을 찾아 광야를 헤맸고, 맹수들로부터 양들을 지키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렇게 그의 마음이 준비되었을 때, 마침내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당신 스스로를 “내 백성의 고통을 똑똑히 보았고,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출애굽 3,7)라고 소개하시며, 당신의 ‘목자 된 마음’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과 같은 마음을 품게 된 모세에게, 비로소 세상을 구원할 ‘힘’, 곧 기적의 지팡이를 맡기셨습니다.
사탄이 능력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단 한 사람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해본 적이 없기에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없고, 마음이 능력을 담는 그릇이기에 능력이 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능력이 없다고 먼저 말하지 말고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는 종종 ‘힘이 없어서, 가진 게 없어서, 능력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과 두 예화는 우리에게 순서가 틀렸다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능력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우리 성당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종종 아이들이 편지를 건네줍니다. 맞춤법도 엉망이고 글씨도 삐뚤삐뚤입니다. 내용도 별것 없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보면 저절로 아빠 미소가 생깁니다. 또 제게 다가와서 크고 작은 일을 일러바치듯 이야기하는 아이도 많습니다. 그만큼 저를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구나!’ 싶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이들이 더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어른들이 종종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이 미사 때 너무 떠들지 않냐고, 너무 버릇없지 않냐고 묻습니다.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아이답게 열심히 미사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되고, 아이들 수준에 맞게 예의 바르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실수해야 아이다운 것 같고, 그 실수를 보면 괜히 미소가 나오게 됩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 그것도 순수하고 맑은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음이 커다란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나를 낮춰야만 사랑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고 옛날 약장수들이 말하곤 했던 “애들은 가라.”라면서 거리를 뒀다면 절대로 사랑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랑을 전해야 나 역시 사랑받을 확률이 올라갑니다. 특히 이 사랑은 전염성이 강하기에 자기가 받은 사랑을 남에게 전달했을 때 그 파급효과는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활동을 복음에서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복음에서 말 못 한다는 것은 의학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업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악의 세력을 쫓아내는 크신 권능을 지니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참조). 이 표현을 희랍어 원문에서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플랑크니조마이)’를 쓰는데, 이는 내장이 끊어질 듯한 극진한 자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으로 악의 세력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신 것입니다.
악의 세력을 쫓아내는 경우를 본 적 없는 군중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태 9,34)라고 말하면서 비난합니다. 누구는 깜짝 놀라지만, 똑같은 결과를 보고서 비난합니다. 군중은 구원 활동을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 것이고, 바리사이는 질투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바리사이는 그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계속 주어지는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혹시 불평불만으로 그 사랑을 왜곡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사랑 없는 삶은 결국 행복하지 못한 삶을 만들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존 러스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이 바로 긴박하고 절박한 수확의 대상입니다. 수확의 주인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일꾼입니다. 기도는 일꾼이 되겠다는 우리 결단의 시작입니다.
일꾼은 스스로 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한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은 자기 욕심이 아니라 은총에 감사하는 이들입니다. 일꾼은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사람입니다.
일꾼은 결과보다 성실함과 충실함으로 하느님의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참된 일꾼입니다.
일꾼의 성장은 은총이고 수확은 그 믿음의 열매입니다. 수확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교만입니다. 수확은 끝이 아니라 사랑의 새 시작입니다.
수확은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함께하는 축제입니다. 그래서 수확의 기쁨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은총입니다.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이 수확하는 일꾼의 사랑이며 감사입니다..
마태오복음 9장 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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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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