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토마스 사도의 축일을 영광스럽게 지내는 저희가 그의 전구로 굳은 믿음을 지니고 그가 주님으로 고백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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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페 2,19-22)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 오늘 복음
(요한 20,24-29)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에페 2,19-22
오늘 제1독서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요한 20,24-29
오늘 복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3일
이종욱 스테파노 신부
✚ 성 토마스 사도 소개 00:06
✚ 미사시작 01:42
✚ 강론시작 07:47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무엇이 이러한 고백을 하게 하였을까요?
제자들은 토마스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라고 증언합니다. 이 말은 제자들의 부활 체험을 요약적으로 표현하는데, 사실은 기쁨에 차서 길게 증언하였을 것이고, 여기서 쓰인 동사의 어감을 볼 때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여러 사람이 증언하였을 것입니다.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였고, 마음의 어둠에서도 공동체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합니다. 아마도 다른 제자들의 증언이 그의 부활 체험에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토마스를 도우시려고 공동체에 다시 모습을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에 평화를 선물하시고 바로 토마스에게 향하십니다.
그가 믿을 수 있도록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토마스가 바라는 대로 하시면서 그를 믿음으로 나아가게 해 주십니다. 내려가시는 사랑, 상대에게 맞추어 주시는 그 사랑을 체험한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28)이라고 고백합니다.
공관 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예수님을 명확하게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부분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믿기를 가장 어려워하였던 토마스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을 고백하는 첫 제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사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에는 목숨까지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당시 공동체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이 목숨마저 아끼지 않고 이러한 고백을 하게 하였을까요? 바로 사랑이신 예수님에 대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이들처럼 오직 예수님만을 선택하는 근본적인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께 답을 얻는 사람
이번에 토마스 사도의 삶을 묵상하다 보니 구약의 야곱과 겹쳤습니다. 둘 사이에 뭔가 비슷한 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입니다. 비슷하다면 어떤 면에서 비슷할까요?
주님과의 씨름과 끈질긴 씨름입니다. 야곱은 하느님과 밤새도록 씨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아주 야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복을 형에게서 가로챈 사람이니 말입니다. 그 일로 형 에사우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다가 고향으로 다시 형을 만나러 갈 때 그는 몹시 두렵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나기 전에 형의 화를 풀기 위해서 뇌물도 보내고 식구도 먼저 보냅니다. 이것으로 그쳤다면 야곱은 인간적인 차원에 머문 것이었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아버지가 될 수 없었을 테지만 그는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하여 하느님의 복도 받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받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토마스도 그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면에서 같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너희는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모르면서도 아는 양 가만히 있었지만 토마스는 자기는 모른다고 주님께 솔직히 얘기하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유명한 말씀을 끌어냅니다.
그는 모르면 모른다고, 믿을 수 없으면 믿을 수 없다고 솔직히 얘기할 뿐 아니라 알 수 있을 때까지 묻고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의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질문과 의문이 있을 때 자기 안에서 질문하고 의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인간에게 묻고 의문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질문을 드리고 의심을 표출하여 주님께 답을 얻는 점입니다.
우리도 토마스 사도처럼 궁극적으로 주님을 상대하고 주님께 답을 얻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완전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토마스 사도의 축일인 오늘, 주님께 답을 얻는 사람이 되고, 완전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도전을 토마스 사도에게 받는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분의 사랑을 보고 또 보아야 해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는 비록 자리에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말한 그를 환히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엠마오를 가던 제자들이 빵 쪼개는 만찬을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 본 것처럼, 토마스도 예수님의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것은 찢어지고 구멍 뚫린 당신 몸의 성찬이었습니다. 토마스는 그때서야 비로소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 마침내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런데 대체, 무엇이 토마스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게 한 것일까?
토마스는 동료들 중 자신만 주님을 뵙지 못한 것이 마치 자신만이 부활하신 주님을 뵐 자격이 없는 자로 여겨져 더 슬픔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더욱 더 확인하고 싶었고,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보게 된 것은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뵌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앞에서 모든 의혹과 자책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주님의 끝나지 않은 사랑, 지속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상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표시임과 동시에,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남김없이 쏟아 부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눈에 보이는 상처를 통에,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사랑의 성찬이 베풀어진 것처럼, 토마스에게도 사랑의 성혈이 베풀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마음이 열리고, 믿음의 눈이 열려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당신의 사랑을 베푸시는 성찬을 통해, “우리의 주님, 우리의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 그분의 사랑을 통해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사실, 보이는 것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히브리서>에서 말씀해주듯이,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그러니 토마스가 본 것(보고 인식한 것)은 상처였지만, 믿은 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보지 않고는 믿지 못했지만, 보고서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또 보고 보지만,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마치,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던 히브리인들이 보지 못해서 못 믿었던 것이 아니라, 보고도 목이 뻣뻣해져 하느님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매일 영성체를 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고뇌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 가까이 계신지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찢어진 가슴을 열고,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증거 해야 할 것도 역시 ‘주님의 사랑’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20,27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믿음은 희망으로 버틸 때 비로소 열매 맺는다.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토마스 사도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토마스 사도를 '의심 많은 토마스'라고 부릅니다. 다른 사도들이 모두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하고 증언했을 때, 그는 차갑게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하지만 오늘 우리는 토마스 사도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의 이 말이 과연 불신앙의 언어였을까요? 어쩌면 이것은 믿음을 포기한 자의 냉소가 아니라, 너무나도 간절히 믿고 싶었기에 터져 나온 한 인간의 정직한 절규가 아니었을까요?
그는 다른 이들의 체험이 아닌, '나의 주님'을 직접 만나고 싶은 거룩한 갈망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의심 속에서 공동체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조건을 외치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자리에서 끈질기게 '버텼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처럼, 믿음이란 어쩌면 믿고 싶은 것을 위해 끈질기게 원하며 버티는 이의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이란, 내가 진정으로 믿고 싶은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나의 온 생애를 통해 그것이 옳았음을 끈질기게 증명해내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이 주제를 잘 보여주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하늘을 향한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20세기가 막 시작될 무렵, 세상의 모든 똑똑한 사람들은 "인간이 기계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작은 자전거포 주인이었던 라이트 형제는 다른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은 반드시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허무맹랑한 신념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막연한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 신념을 '증명'하기 위한 끈질긴 버팀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년간 바람 부는 허허벌판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새들이 나는 모습을 관찰하고, 수백 번의 실패를 거듭하며 글라이더를 만들고, 직접 목숨을 걸고 실험에 나섰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비웃었지만, 그들은 바람과 모래, 끝없는 실패와 싸우며 버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비행에 필요한 세 가지 요소, 즉 양력, 추진력,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제어'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갔습니다.
마침내 1903년 12월 17일, 인류 최초의 동력 비행은 고작 12초 동안 36미터를 나는 데 그쳤습니다. 아주 보잘것없는 비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12초는 라이트 형제가 평생을 바쳐 믿고 싶었던 것이 진실이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 12초의 증거를 얻기 위해 수천 번의 실패를 버텨냈던 것입니다. 그들의 끈질긴 믿음은 마침내 인류 전체의 현실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절망의 한가운데서 붙들었던 의미에 대한 믿음입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로고테라피 이론을 정립하고 그 원고를 목숨처럼 아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그토록 소중했던 원고마저도 말입니다.
모든 것이 재가 되어버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는 무너지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기로 결심합니다.
"만약 내 이론이 진정으로 옳다면, 이 지옥의 한가운데서도 의미를 찾는 사람은 살아남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것을 증명하겠다."
그는 수용소를 자신의 신념을 증명할 거대한 연구실로 삼았습니다. 그는 동료 수감자들이 살아남는 이유가 육체의 강인함이 아니라, '살아서 만나야 할 가족', '완성해야 할 과업' 같은 아주 작은 '살아갈 이유'에 있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이 생생한 증거들을 몰래 기록하며 버텼습니다.
전쟁 후, 그는 자신의 온 삶으로 증명해낸 그 기록들을 모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끝까지 버텨낼 때, 그 삶 자체가 가장 위대한 증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라이트 형제와 빅터 프랭클의 이 두 이야기는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우리 신앙의 여정을 놀랍도록 닮아있습니다. 라이트 형제가 불가능해 보이는 '새로운 현실'을 믿었듯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믿습니다. 빅터 프랭클이 절망 속에서 '의미'를 믿었듯이, 우리는 고통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토마스 사도가 바로 그 믿음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 일주일을 보내야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기쁨에 동참할 수 없었던 그 일주일이 그에게는 얼마나 길고 어두운 시간이었겠습니까? 그의 외침은 바로 라이트 형제가 하늘을 보며 "날 수 있다!"고 외친 갈망이었고,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에서 "의미가 있다!"고 외친 절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 정직하고 끈질긴 갈망에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을 잠그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다른 이가 아닌 바로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주님께서는 그의 조건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가 원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당신을 만나주셨습니다. 이 인격적인 만남 앞에서, 토마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을 바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이러한 '끈질긴 믿음'의 사례는 성경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식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는 예수님의 매정한 말씀에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하고 버텼을 때, 예수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 15,28) 하고 감탄하셨습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며 "축복해 주지 않으시면 보내 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라고 버텨 마침내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심이 들 때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토마스처럼 공동체 안에 머물며, 나만의 조건이라도 외치며 버티는 것입니다.
"주님, 제 삶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주님, 당신께서 제 곁에 계시다는 것을 제발 느끼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부르짖으며 버틸 때, 문을 잠그고 들어오셨던 주님께서는 바로 나에게 찾아오시어, 내가 가장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의 못 자국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믿음은 완성된 선물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끈질긴 희망과 버팀으로 열매 맺어야 할 우리 삶의 과업입니다. 저는 『하.사.시.』 와 ‘7기도’와 같은 것들이 진리임을 믿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증거들로 열매 맺고 지금은 더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각자가 믿고 싶은 것이 열매 맺기를 희망하며,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그날까지, 믿음의 경주를 멈추지 않도록 합시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저도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섰습니다. 문득 거울을 보니, 저 역시 늙은 티가 꽤 많이 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솔직히 젊었을 때는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사는 게 쉬워질 줄 알았습니다. 안정된 궤도에 오른 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살 만큼 살았으니, 인생도 익숙해지고, 경험이 쌓인 만큼 현명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생은 어렵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 새로운 일이 많았고, 여유도 별로 없습니다. 헛산 것일까요?
저의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나이 들면 익숙해지고 현명해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하느님의 나이에 비교하면 저의 나이는 하나의 점에 불과할 것입니다. 나이 어린 어린이나 나이 많은 노인이나 하느님 입장에서는 별 차이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생각하니, 나이 들어도 사는 게 어렵다고 슬퍼하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익어갈 뿐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런 마음으로 지금을 기쁘게 살아야 했습니다. 늙음 자체를 아예 잊어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더 현명해지고 그래서 더 인생이 쉬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을 묵상합니다. 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누구보다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고, 주님의 뜻을 잘 따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을을 두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라고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이야기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시간이 오래될수록 익숙해지고 현명해질 것이라 예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요?
그들 중 한 명은 예수님을 은전 30닢에 팔아넘겼고, 예수님의 으뜸 제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붙잡히자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는 다락방에 숨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제일 가까이에서 또 제일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토마스 사도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토마스 사도에 관한 일을 전해줍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그리고 부활까지 말씀하신 예수님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래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아무리 제자라 해도 부족한 한 사람임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꾸중보다 그를 신앙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말씀하시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지 못하는 시대의 신자들에게도 직접 위로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하고 가장 강력하고 싶은 신앙 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 고백은 우리 삶에서 살아 있는 고백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의 어려움은 선택에 있다 (G.무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적인 고백입니다. 신앙은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신 절대자가 아니라 나의 삶과 직접 관계된 인격적인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진리의 수용이자 인격과 인격의 만남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서야 부활을 믿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참된 주님이시며 참된 하느님이심을 깨닫는 가장 강력한 신앙 선언이 됩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언제나 이렇듯 가장 아름다운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의심에서 고백으로 두려움에서 사랑의 신뢰로 열리는 내어맡김의 기쁨이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이 고백은 단지 개인의 체험을 넘어서 교회 전체와 일치하는 교회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 됩니다.
신앙 고백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내 삶 전체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응답하는 봉헌입니다. 진리를 향한 갈망에서 나온 정직한 물음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게하는 디딤돌이 됩니다.
질문하고 고민하며 사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의심을 넘은 신앙이 성 토마스 사도처럼 순교로 완성됩니다. 신앙의 충실함은 의심의 여정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의심에서 믿음으로 고백에서 충실함으로 나아가는 참된 신앙의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끝까지 주님을 찾는 사람만이 참된 믿음에 이르는 신앙의 여정입니다. 의심과 믿음 사이에 십자가의 상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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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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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28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2) | 2025.06.28 |
25/06/27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6.27 |
25/06/26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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