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6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18,16-33)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 오늘 복음
(마태 8,18-22)
나를 따라라.
창세 18,16-33
오늘 제1독서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사람들은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을
16 떠나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려고 함께 걸어갔다.
17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18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고,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20 이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
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4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5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26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7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28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29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0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3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마태 8,18-22
오늘 복음
나를 따라라.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19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21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어라.”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30일
최현식 라우렌시오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9:58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우리는 부르심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오늘 독서에는 아브라함과 하느님 사이의 협상이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을 구하려는 아브라함의 절박함은 탁월한 협상가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는 것은 하느님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공정”(창세 18,25)의 논리로 자비를 청하면서 하느님을 설득하려 애쓰는 아브라함의 간절함도, 그의 말에 설득되신 듯 짐짓 양보하시는 하느님의 마음도 감동적입니다.
하느님의 독백은 아브라함과 당신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아브라함에게 당신 마음을 털어놓으시며 그를 당신 계획을 논할 수 있는 상대로 여기십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하고 간절하며, 주님의 약속대로 다른 민족들을 위한 축복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진실한 기도가 정말로 다른 이들을 악에서 구할 수 있음을 보여 주면서 중요한 신학적 원칙 하나를 제시합니다. 곧 의로운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이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원칙은 단연 탁월한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돌아가실 때 결실을 거둡니다.
공동체를 죄와 악에서 구하려면 의인들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앞에 머물러 기도하면서 모든 인류를 위한 기도의 중재자들이 되라고, 또 그들의 구원을 위한 의인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먼저 저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그런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이 사명에 충실하겠다고 오늘 새롭게 다짐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최선을 다하기 앞서 최악을 각오해야
오늘 복음은 주님을 따르는 두 가지 경우에 대한 주님의 답입니다. 첫째는 주님을 따르겠다는 율법 학자의 요청에 대한 대답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런데 이 말씀은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거부하시는 말씀 곧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제 생각에 율법 학자가 따른다고 할 때 주님께서는 기쁘셨을 것입니다. 다른 율법 학자들은 사사건건 시비만 거는데 이렇게 따른다고 하니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한 성소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당신을 따르려면 정말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만 하십니다. 이것은 거절이 아니라 귀한 집 도련님이 이런 삶을 살 수 있겠느냐? 이렇게 염려하시며 따르겠다면 이것을 각오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아한 추종이란 없습니다. 낭만적인 추종도 없습니다. 그럴 생각이면 애인 추종이나 할 것이지 주님 추종은 아예 생각지도 말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 말고도 다른 곳에서 당신 추종에 대해 준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줘야 한다고.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당신을 따르려면 부모와 아내와 자식을 다 버리고 따라야 한다고.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던 제자가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청하자 아주 모진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래서 이 말씀들대로 주님을 따르면 거의 틀림 없이 중간에 회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뭣 하러 따르는가? 이러려고 따르는가? 그래서 따르길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도 계속 따르기로 한 사람은 현실을 직시하며 새 각오로 출발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최악을 각오하지 않고 당신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입니다. 제 생각에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악을 각오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최악을 각오함이 없이 최선을 다할 수 없고, 최악을 각오할 때 최선도 다할 수 있게 됨을, 최선을 다하기에 앞서 최악을 각오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많은 군중이 몰려들자,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태 8,18 참조).
곧 제자들을 군중으로부터 떼어놓으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아직 제자교육을 받지 못한지라 군중에게 휘둘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집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따라나서는 율법학자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러 가겠다고 나서는 제자입니다. 여기에서, 제자 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자세가 드러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따라나서는 율법학자 안에서 화려한 보금자리에 대한 갈망이 감추어져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이처럼, 당신을 따르는 삶이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삶임을 밝히십니다.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참된 제자 됨의 본질’이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사는 삶이요,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주기를 청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이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썩어 묻힐 유한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는 생명을 따르는 길임과 그 생명을 가지고 계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에누리 없이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진정, 나는 대체 어디에 머리 기댈 곳을 찾고 있는가? 아니. 대체 어디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가? 혹 자기 자신인가? 아니면 하느님인가?
또한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가? 혹 여전히 죽은 것들과 죽을 것들에 애착하고 매여 있지는 않는가?
오늘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8,22
너는 나를 따라라.
주님!
오랏줄로 꼭꼭
저를 당신께 묶으소서.
당신은 저의 보금자리오니
당신을 따라 내려가
아래에서 살게 하소서.
대우보다 천대 받을 줄을
존중보다 무시 받을 줄을
인정보다 멸시 받을 줄을
배려보다 모욕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형제들을 떠받드는
발판이 되고,
머리기댈 기둥이 되고
당신의 제자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을 사랑하는 법 = 예수님을 이용하는 법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단호한 요구를 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 8,22).
이 말씀들은 세상의 안정과 인간적인 도리마저 뒤로하고 오직 당신만을 따르라는 초대입니다. 이는 곧 제자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기쁨과 가치를 합친 것보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더 크게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닫고, 그 길을 선택하며, 마침내 그 길 위에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 익히는 삶의 여정입니다.
한 분야에 모든 것을 건 사람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수학 강사 정승제 씨는 수많은 학생들을 최고의 대학으로 이끄는 ‘일타 강사’입니다. 그의 삶은 오직 ‘수학’이라는 한 길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는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잠들기 전까지 거의 모든 시간을 강의를 준비하고 수학 문제를 연구하는 데 쓴다고 합니다.
조교들과의 회의, 촬영, 교재 연구로 하루가 꽉 차 있습니다. 심지어 쉬는 날에도 머릿속은 온통 학생들을 어떻게 더 쉽게 가르칠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고된 일상이지만, 그는 그 과정 자체에서 희열을 느끼며, 자신의 일에 모든 것을 투신하는 삶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만다라트’라는 목표 달성표를 작성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중앙에 ‘8개 구단 드래프트 1순위’라는 궁극적 목표를 적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8가지 세부 목표(몸만들기, 제구, 구위, 멘탈, 스피드, 인간성, 운, 변화구)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8가지 목표 각각을 이루기 위한 8개의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빼곡히 채워 넣었습니다.
‘쓰레기 줍기’(운), ‘인사하기’(인간성), ‘하루 10시간 자기’(몸만들기), ‘술과 담배 안 하기’ 등 그의 일상은 오직 ‘최고의 야구선수’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완벽하게 통제되었습니다. 그는 야구라는 한 길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고, 그 결과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들처럼,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른다는 것은 그 길 자체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그 목표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욥은 우리가 아는 대로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고, 훌륭한 자녀들과 건강까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하느님을 경외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자녀, 재산, 건강, 명예를 모두 잃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잿더미 위에 앉아 기왓장으로 몸을 긁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을 때, 그의 아내마저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세요.”(욥 2,9)라며 그를 원망했습니다.
그때 욥이 한 고백은 위대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거두어 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이 고백은 단순히 고통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욥이 평생에 걸쳐 ‘하느님 한 분만으로 행복해지는 법’을 연습해왔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그의 마음속에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이 유일한 희망이요 재산으로 남았던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소유물이 있을 때 빛나는 장식품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 속에서 홀로 빛나는 등불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욥이 하느님을 처음부터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욥은 하느님이 세상 모든 즐거움을 주더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 되도록 매일 연습하여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복자 피에르 조르조 프라사티(Pier Giorgio Frassati)의 삶이 그 가장 좋은 예입니다. 그는 20세기의 젊은 이탈리아 청년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등산을 광적으로 사랑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농담하기를 즐기는 평범한 청년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에는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하고 영성체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받은 용돈을 모아 토리노의 가장 가난한 빈민굴에 사는 이들을 위해 약과 음식을 사서 직접 날랐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왜 늘 돈이 없는지, 왜 그토록 낡은 옷을 입고 다니는지 몰랐습니다.
프라사티는 자신의 젊음과 건강, 재능을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남김없이 사용했습니다. 그는 산을 오를 때 “높은 곳을 향하여(Verso l'alto)!”라고 외쳤는데, 이는 단지 산 정상을 향한 외침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삶의 궁극적인 정상을 향한 그의 영혼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는 조금씩, 매일매일, 자신의 삶의 기쁨의 원천을 세상의 즐거움에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옮겨갔습니다. 이 꾸준한 ‘이용’과 ‘노력’의 결과, 그의 내면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고, 24살의 나이에 소아마비로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장례식에는 그가 몰래 도와주었던 수많은 가난한 이들이 찾아와 눈물을 흘렸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프라사티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을 ‘이용’해야 합니다.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 위로를 얻기 위해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이용’하십시오. 기쁜 일이 있을 때, 그 기쁨을 봉헌하기 위해 그분을 ‘이용’하십시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지혜를 구하기 위해 그분을 ‘이용’하십시오.
‘이용한다’는 말이 다소 불경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용’이란,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으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 삶의 모든 순간에, 나의 행복을 위해, 나의 평화를 위해, 나의 기쁨을 위해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그분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은 예수님을 이용해 예수님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를 따라라.
평균 온도 섭씨 영하 55도, 공기의 주성분은 이산화탄소입니다. 당연히 생명체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고 생명에 대한 안정을 보장할 수 없는 곳입니다. 바로 화성입니다. 화성에 정착해 살아갈 주민을 뽑는다는 ‘마스원 Mars one’ 프로젝트 모집 공고에 세계 각국의 지원자가 얼마나 몰렸을까요? 자그마치 20만 명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한번 떠나면 돌아올 수 없으며 그곳에 남은 생을 보내야 한다는 편도 티켓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2019년 경영 주체인 마스 원 밴처스가 파산하면서 종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지원자가 몰린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인류 최초로 화성에 간다는 꿈 때문에? 새로운 시각을 꿈꿔서? 모험과 도전을 좋아해서?
꿈과 모험이 그들이 위험한 결정을 내리게 했던 것입니다. 거의 모든 과학자가 불가능하다면서 반대했지만, 생명의 위협도 그들의 꿈에 대한 희망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세상 것에 대한 욕구를 모두 내려놓고, 사랑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앞선 프로젝트와 다른 것은 꿈을 향해 나아가면 지금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을 위해 당장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여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스승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마태 8,18)라고 말합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사람으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의 열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감정적인 헌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인 안정을 포기할 각오가 필요하시다고 하십니다.
또 어떤 이가 “먼저 가서 아버지를 묻히게 해 주십시오.”(마태 8,21)라고 말하지요. 이 요청은 율법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무이기에 매우 타당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효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마음의 열정’만으로는 부족하고, 생활 전체의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 부르심은 하느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즉각적인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을 하고 나서’ 따르겠다면서 우선순위를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닐까요? 당연히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도 멀어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내가 낸 발자국만으로 내 길을 만들 수 있다 (김민영, 황선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는 나를 따라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일치이며 삶의 전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망설임 없는 결단이 요구 됩니다.
한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이며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따름의 길입니다. 제자의 삶은 세상의 안락함보다 주님을 우선시하는 삶입니다. 믿음은 머뭇거림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 삶의 중심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기쁨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분만 보면 됩니다.
내려놓아야 할 우리의 계획과 기대와 소유와 집착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따름의 가장 깊은 동기입니다. 제자의 삶은 끊임없는 회개와 성장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나를 비우고 주님으로 채우는 길입니다. 작은 순간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랑의 오늘 되십시오.
마태오복음 8장 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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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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