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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6/27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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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지네.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먹여 살리시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성심을 통하여 저희에게 베푸신 놀라운 사랑을 기리며 기뻐하오니 이 사랑의 샘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은총을 언제나 가득히 받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6월 27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6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27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제 34,11-16)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 제 2독서
    (로마 5,5ㄴ-1)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5,3-7)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에제 34,11-16
오늘 제1독서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12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13 그들을 민족들에게서 데려 내오고 여러 나라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의 산과 시냇가에서, 그리고 그 땅의 모든 거주지에서 그들을 먹이겠다. 

14 좋은 풀밭에서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은 그곳 좋은 목장에서 누워 쉬고, 이스라엘 산악 지방의 기름진 풀밭에서 뜯어 먹을 것이다. 

15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6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로마 5,5ㄴ-1
오늘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5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5,3-7
오늘 복음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3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27일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예수 성심 대축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54

✚ 강론시작 17:4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소서, 주 예수님, 저에게 오소서, 저를 찾으소서, 저를 발견하소서. 저를 품에 안아 데려가 주소서.

‘하느님 자비의 비유’라고 불리는 루카 복음서 15장의 되찾은 것들의 비유(15,1-32 참조)는 ‘하느님 기쁨의 비유’라고도 불릴 만합니다. 기쁨은 자비를 넘어섭니다. 누군가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자비의 대상이 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는 것이고 기쁨은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 돌아감으로써, 그분께 발견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분께 발견되도록 자신을 내맡겨야 합니다.

누구나 길을 잃을 수 있지요. 중요한 것은 다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나를 찾으시는 분 앞에 나와 서기만 하면 됩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기쁜가! 내 아들이, 내 딸이 돌아왔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분의 눈길 아래 머무르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듣는 이 복음은 예수님 마음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교회는 이 신심이 시작되던 시대의 심장이라는 상징을 넘어서서 그 실체인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통합적 신심을 기르도록 권고합니다.

사실 예수님 마음은 그분의 전 인격을 요약합니다. 그래서 예수 성심의 신비는 ‘예수님의 구원적 사랑 전체’의 신비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의 기도를 바치며 이 신비 안에 머무르도록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 저에게 오소서, 저를 찾으소서, 저를 발견하소서. 저를 품에 안아 데려가 주소서”(성 암브로시오, 『시편 118편 해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심에 물들고 닮아가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죄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성심이라는 말입니다. 더 풀어 얘기하면 이 성심의 사랑은 죄인의 죄에 의해 상처받았음에도 그 상처를 상처로 되돌리지 않고 용서로 되레 상처를 치유해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심은 상처 입는 것을 피하거나 마다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준 상처를 받아들이고 끌어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그의 악하고 독한 마음을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큰 사랑으로 마음이 넓어지면 악독한 마음에서 독을 뿜어낼 수밖에 없는 그의 고통과 불행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믿음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절대로 악독할 수 없고 상처를 줄 수 없다는 믿음 말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악독한 사람은 자신이 먼저 수없이 상처받아 불행한 사람이고, 그에게서는 악과 독 밖에는 나올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 독이란 오랜 불행으로 악이 생겨나고 숙성된 결과입니다.

그러니 그만큼 그의 악과 독을 녹여내기 위해서는 큰 사랑이 필요한데 우리 인간에게 그만한 사랑은 있을 수 없고 성심의 사랑만이 녹여낼 수 있지요.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성심의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고, 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도 성심에서 그 사랑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성심을 닮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성심에 우리 마음이 물들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성심과 같아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닮고, 어떻게 물들고, 어떻게 같아질까요? 거듭 마음먹고, 자꾸 결심하는 겁니다.

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처를 피하지 않기로 거듭 마음먹는 겁니다. 그러면서 사랑이 단련되고 자라게 하고 마침내 방독하지 않고 해독하는 겁니다. 이는 조개가 진주를 생성하기 위해 상처를 주는 이물질을 품는 것과 같고, 상처받으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진주층(Nacre)을 분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또한 민수기에서 불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매달아 달고 매일 쳐다보면서 이겨낸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사랑은 상처받으면서 성심의 사랑으로 자라고, 독을 끊임없이 해독하면서 독을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과 사랑이 성심의 사랑에 물들고 닮게 되어 우리가 독에 대해서 독해지는 것이라고 할까요? 그러니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마음이 성심으로 물들고 닮도록 끊임없이 성심께 달려가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 마음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마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 마음’을 가르쳐주기 위해,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보면, “예수 마음”은 무엇보다도 우선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한 마리의 양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생명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곧 그가 길을 잃었건 떠났건, 병들었건 약하건, 나를 좋아하건 미워하건, ‘그의 전부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니, 그가 아프기에 더욱 우선적으로 그에게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본성은 ‘필요로 여기는 곳’으로 먼저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우리와 ‘분리되지 않는 마음’(르하밈)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에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끝까지 뒤쫓아 다닙니다. 이는 ‘구원의 주체’가 당신이심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먼저’ 찾아오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당신의 ‘신실하신 마음과 사랑’을 말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수 마음”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마음”입니다. 이는 뒤따라 나오는 ‘되찾은 은전의 비유’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되찾은 후에, ‘부인’은 잃은 은전을 되찾은 후에, ‘아버지’는 잃은 아들을 되찾은 후에,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9.32) 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 비유의 정점이 잃은 것을 되찾는 것을 넘어서 ‘이웃과 함께 나누는 기쁨’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쁨’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나누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마치 백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아팠기에,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이 마치 양 백 마리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기 때문입니다. 곧 한 마리를 잃은 것이 전부를 잃은 것과 같았고, 한 마리를 찾은 것이 전부를 찾은 것과 같은 까닭입니다. 그토록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긴 까닭입니다.  

바로 이 크신 사랑을 만나면 기쁘지 않고는 못 배겨나고, 나누지 않을 수가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과의 만남의 결과요, 사랑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쁨’은 사랑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곧 ‘사랑’은 기쁨을 품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을 결코 멈출 수 없듯이 기쁨 또한 결코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요한복음>사가는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기쁨”(요한 16,22)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듯이, 또한 그 누구도 우리를 기쁨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1테살 5,16) 

“예수 마음”은 바로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자신을 건네주는 사랑의 기쁨에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도 이 기쁨의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고 당신의 기쁨을 나누어 주십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5,6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주님!
오늘도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애타게 찾으시고 
끝내는 십자가에 매달린 
한 마리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십니다.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저의 오롯한 기쁨이오니
제가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거룩한 마음이란 남편의 마음을 자녀가 느끼게 하려는 아내의 마음이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의 마음, 성심(聖心)을 기념합니다. 우리는 예수 성심을 ‘자비로운 마음’,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사랑의 마음’ 등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예수 성심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바로 “예수 성심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이 공유하게 하려는 마음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 가정의 어머니의 마음과 같습니다. 지혜롭고 사랑이 깊은 어머니는 자녀들이 자신만 사랑하고 따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녀들이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마음을 알아주고, 아버지를 존경하며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머니의 가장 큰 기쁨은 온 가족이 아버지의 마음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그 증거입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습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의 기쁨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외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 15,6)

왜 굳이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기뻐하자”고 청할까요? 혼자 기뻐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예수 성심의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여기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느끼는 기쁨은, 근본적으로 양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하늘이 기뻐하기에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동화 ‘라푼젤(Tangled)’에서 라푼젤은 본래 샐러드용 채소의 이름입니다. 라푼젤의 어머니는 임신했을 때 마녀의 정원에 자라는 '라푼젤'이라는 채소가 너무나도 먹고 싶어 병이 날 지경에 이릅니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 목숨을 걸고 마녀의 정원에 들어가 이 채소를 훔쳐오고, 결국 태어날 아이를 마녀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채소를 얻게 됩니다. 마녀는 이렇게 얻은 아이에게 그 채소의 이름을 따 '라푼젤'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라푼젤을 향한 마녀의 사랑은 겉보기에 완벽합니다. 다정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며,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엄마가 제일 잘 알지. 바깥세상은 무섭고 위험하단다. 엄마 품이 가장 안전해.”

그녀는 라푼젤의 진짜 부모에게 가는 길을 철저히 차단합니다. 이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녀를 진실로부터 격리하고 ‘아버지 없는 고아’로 만드는 가장 이기적이고 무서운 사랑입니다.

성경에도 이 ‘고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등장합니다.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바로 그입니다(루카 15,25-32 참조). 동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이지만, 큰아들은 분노하며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가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무섭게 경고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너희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인정받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전혀 다른 마음을 만나봅시다. 소설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에 나오는 네 자매의 어머니, ‘마미(Marmee)’입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마미는 자녀들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편지를 딸들에게 읽어주며 그의 사랑과 가르침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딸들이 선행을 베풀 때,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고 격려하며 모든 행동의 기준을 아버지의 마음에 둡니다. 그녀의 가장 큰 기쁨은 딸들이 아버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 ‘마미’의 마음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심의 모상입니다. 성경에서 이 마음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수많은 군중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지만, 결코 그 영광을 차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오직 예수님만을 가리켰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군중을 보며 시기하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망하여야 한다.”(요한 3,29-30)

그는 신랑이신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함께 느끼며, 그 기쁨에 동참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다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다리’의 완성이십니다. 그분은 공생활 내내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으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찾기 때문이다.”(요한 5,30)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이 모든 말씀은 우리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끌려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의 신앙생활은, 나의 봉사는 과연 ‘라푼젤’의 마녀를 닮았습니까, 아니면 ‘작은 아씨들’의 마미를 닮았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듯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라 나 자신을 더 의지하고 좋아하게 만들려는 이기적인 마음은 없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 곧 ‘마미’와 ‘세례자 요한’과 같은 마음을 주시고자 합니다. 내가 죽고 나보다 높은 이의 마음을 자녀들이 가지게 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 본당의 냉담 교우 한 사람이 다시 성사 생활을 시작할 때, 죄의 길에서 방황하던 한 영혼이 고해소 문을 두드릴 때, 바로 그때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순간이며,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하고 외쳐야 할 순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생각의 전환이 세상을 바꿉니다. 무엇보다 세상을 발전시키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생각의 전환입니다. 

1935년 이전까지 배영 100미터의 벽은 ‘1분’이었습니다. 누구도 이 벽을 깨지 못하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935년 8월, 마침내 그 기록이 깨졌습니다. 그것도 올림픽 같은 국제 대회가 아니라 미국의 어느 고등학교 수영대회에서였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아돌프 키퍼(Adolph Kiefer)는 ‘플립 턴(flip turn)’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적용해 종전 세계 기록보다 무려 10초 가까이 빠른 기록으로 터치패드를 짚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반환점에 도달하면 손으로 벽을 짚고 회전했는데, 그는 반환점에서 거의 1미터 전에 앞쪽으로 반 정도 돈 다음에 벽을 두 다리로 힘차게 밀어 다시 반대편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든 선수가 플립 턴을 선택했습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이전 육상의 높이 뛰기는 앞으로 넘는 ‘가위뛰기’ 일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인선수 딕 포스베리가 누워가 넘는 ‘배면뛰기’를 처음 시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건 이후, 모든 높이뛰기 선수는 배면뛰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의 전환이 없으면 발전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닫힌 마음을 가지고서는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냥 예전과 같은 삶, 전혀 발전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활동은 끊임없이 변화됩니다. 그 시대에 딱 맞게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변화에 맞춰서 우리도 변화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서 이 시대에 딱 맞게 사랑을 주시듯이, 우리 역시 사랑에 집중하면서 활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냥 예전의 모습만을 따라 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뜻에 발맞출 수 없고, 우리의 변화도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그 마음이 오늘 복음에 잘 나와 있습니다. 잃었던 한 마리 양 한 마리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실 100마리 중 1마리라는 숫자는 인간적으로는 포기할 수도 있는 비율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한 생명도 결코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의 뜻인 이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변화도 가능하게 됩니다. 이 세상 안에 사랑이 넘쳐나게 될 것이며, 살기 힘든 곳이 아닌 살고 싶은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보다 주님의 관점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선행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칸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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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루카복음 15장 6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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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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