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하느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마음속에 성령의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자비로이 들으시어 저희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6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28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61,9-11)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라. - 오늘 복음
(루카 2,41-51)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이사 61,9-11
오늘 제1독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라.
내 백성의
9 후손은 민족들 사이에, 내 백성의 자손은 겨레들 가운데에 널리 알려져 그들을 보는 자들은 모두 그들이 주님께 복 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루카 2,41-51
오늘 복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28일
현영민 루도비코 신부
✚ 성모 성심 기념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7
✚ 강론시작 08:03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열두 살 소년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의 무리에서 빠져나와 따로 움직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자신들의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공포에 빠져 온 시가지를 헤매고 다니는 이 거룩한 부모의 비통과 자괴감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설 것입니다.
그런데 애타게 아들을 찾던 어머니에게 아들은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 살아온 소년이 진정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곧 하느님 아버지와의 내밀한 관계를 처음 드러낸 것입니다. 부모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간직합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마지막 두 문장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으로 돌아가 인간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2,51). 오늘 기념하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은 아들의 언행을 사랑과 존중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많은 일과 걱정에 휩싸여 예수님을 곧잘 잃어버리고는 합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사랑하는 소중한 아들이었기에 그분을 찾았다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박한 순간에 도움을 청하고자 예수님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며 평범한 우리 일상 안에서 소중한 예수님을 찾고 그분을 지키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제 마음은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어제 아들의 거룩한 마음에 이어 오늘은 어머니의 티 없이 깨끗한 마음을 기립니다. 아들의 거룩한 마음이 온 인류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기린다면 어머니의 티 없이 깨끗한 마음은 아들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오로지 아들을 향해 있다는 것이고, 어머니 마음 안에는 오로지 아들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마음이 오로지 아들을 향해 있다는 것은 마리아만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무릇 모든 어머니가 그럴 것이고, 연애할 때는 연인끼리도 그럴 것입니다. 뭘 해도 모든 촉각이 한 사람을 향하고, 모든 관심(關心)이 한 사람을 향합니다. 관심이란 말 자체가 마음을 뜻하는데 무엇 또는 누구에 관한 마음이고, 이 관심에서 관계가 시작되는 겁니다.
관심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사람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됩니다. 어쨌거나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오직 아들 예수님을 향해 있고, 모든 관심이 아들을 향해 있는데 이는 다른 어머니들의 마음들과 다를 바 없지만 그 마음 안에 아들만 있다는 것이 뜻하는 것은 다른 엄마들의 그것과 다를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마리아의 아들이 보통 엄마들의 아들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아들들이 자기의 성공을 꿈꾸는 데 비해 마리아의 아들은 인류의 구원을 꿈꾸는 것이 다르고, 그러기에 보통의 엄마들이 자식의 성공을 늘 빌지만 마리아는 아들의 구원사업이 잘되기만을 빌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가 처음부터 늘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도 처음에는 보통의 어머니들처럼 당신 아들의 안위만 걱정하는 어머니였던 것 같습니다.
아들을 잃고 걱정하는 어머니인데 이런 어머니에게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은 어머니 곁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이라며 어머니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아들입니다.
마리아의 마음 안에는 오직 아들만 있지만 아들의 마음 안에는 성부의 뜻과 인류 구원이 있기에 마리아는 이제 아들의 안위만 걱정하지 않고 아들의 마음을 마음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아들이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릴 때 거기서 내려오라고 하지 않고 그 옆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한 사람을 위해 주님께 매달리고 졸라댑니다.
젊은 사람이고 한 가족의 가장이 지금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고, 그 어머니는 오래 치매를 앓은 시어머니와 파킨슨병을 오래 앓은 남편 때문에 일생 고생을 너무 많이 했는데 아들이 지금 또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 당신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할 수 없고, 그를 꼭 낫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고 강요까지 하고, 그 어머니에게는 성모님의 마음을 주십사고 기도하는데 제 마음은 이번만은 주님께서 저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주님과 성모님의 마음에 한참 미치지 못할지라도 이 마음 주님께서 알아주시고 기도 들어주시기를 비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마저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신 어머니.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성심’을 기린 데 이어,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을 기립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은 두 가지 의미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56항)
교황 비오 9세께서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원죄 없으신 잉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
또한,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493항).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믿음’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믿음’에 있어서 한 점 의혹이 없는 갈림이 없는 마음, 온전한 마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지니셨습니다.
이를 <교회 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교회 헌장 56항 참조).
‘성모님께서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마음 안에는 ‘믿음’이 가득 차서 희망을 노래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신명나셨습니다. 언제나 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희망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하느님 뜻’ 안에 가두시고, 말씀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마저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가 2,51). 이토록, 믿음을 품으셨습니다. 말씀을 품고 간직하셨습니다. 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을 길러 올리셨습니다. 참으로, 믿음과 희망에 있어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품으셨던 그 주물의 틀’에 우리가 가두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오로지 말씀께 희망을 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간직하며, 신명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2,51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어머니!
당신은 마음에 말씀을 품으신
도서관이셨습니다.
말씀을 펼쳐 읽으시며
순명을 배우셨습니다.
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과 믿음을 길러 올리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품었던
그 주물의 틀에 저를 품으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의미 :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일상에서 찾는 것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며, 당신 아드님 예수님을 향한 그 순결하고 깊은 사랑의 마음을 묵상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 바로 성가정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소년 예수를 잃어버리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되찾는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은 오늘 강론의 핵심이자, 성모님 마음의 본질을 보여주는 창문과도 같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51)
성모님께서는 당신 삶에 일어난 모든 일, 특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일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거듭 묵상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그 일이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어떠한 이유와 목적, 곧 ‘섭리’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함, 곧 교만한 마음의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우연’으로 치부해버리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성모님의 이러한 태도와 정반대의 것을 평화의 길이라고 제시합니다.
특히 현대 심리학의 한 흐름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최근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은 김주한 교수는 그의 책 『내면 소통』에서, 인간은 ‘경험자아’와 그것을 되새기는 ‘기억자아’ 때문에 불안에 시달린다고 말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필연적인 이유를 찾으려는 순간, 우리 뇌의 편도체가 활성화되어 고통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냥 우연이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경험자아가 날뛰기 시작한다. 뭔가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는 순간, 즉 필연성을 부여하는 순간 경험자아는 그 원인을 찾으려 하고, 결국 ‘내가 뭘 잘못했나?’ 혹은 ‘누구 때문에’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온갖 부정적 감정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는 해결책으로 ‘그냥 일어난 일(Just happened)’이라고,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솝 우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어리석은 주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매일 하나씩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의 신비를 기다리고 감사하며 그 의미를 헤아리는 대신, 모든 것을 한 번에 얻으려는 조급함에 사로잡힙니다.
거위의 배 속에 거대한 황금 덩어리가 들어있을 것이라는 착각, 즉 거위의 생명과 그 과정의 의미를 무시하고 눈앞의 결과라는 ‘우연’에만 집착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거위의 배를 갈랐고, 결국 황금알을 영원히 잃어버렸습니다. 의미를 찾는 인내를 포기하고 눈앞의 우연에만 집착하는 삶의 끝이 얼마나 허무하고 파괴적인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예화입니다.
마찬가지 성경 사례로, 루카 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풍년을 맞이했을 때, "하느님께서 복을 주셨구나, 이웃과 어찌 나눌까?"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즐겨라"라고 말합니다.
그는 풍년을 하느님의 선물이 아닌, 자신의 노력과 운이 만들어낸 '우연한 대박'으로 여겼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볼 겸손함이 없었기에, 감사가 아닌 탐욕으로 반응했고 결국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겸손함이 없으면 은총을 '행운'으로 착각하고,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쌓아두려는 불순한 마음만 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직감했지만,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자신의 구원을 위한 '섭리의 순간'이 아닌, 잘못 걸려든 '재수 없는 사건(우연)'으로 취급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냉소적으로 물으며 진리를 외면하고 손을 씻는 행위는, 섭리를 우연으로 격하시켜 책임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마음의 전형입니다. 마음이 불순하면 진리 앞에서 책임을 지기보다, 그 상황을 '우연'으로 치부하여 도망갈 구멍을 찾습니다.
이런 사례를 대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겸손한 이는 자신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고 창조자가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어떤 일을 허락하시는지 기억하고 곰곰이 묵상하며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뜻 따라 선택을 이어갑니다.
‘모든 것은 우연이다’라는 명제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우주 자체의 신비 앞에서도 힘을 잃습니다. 현대 과학은 우리 우주가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얼마나 정교하게 ‘미세 조정(fine-tuned)’ 되어 있는지를 발견하고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중력의 힘, 원자를 묶어주는 힘, 우주 팽창의 속도 등 수많은 물리 상수들이 지금의 값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벗어났다면, 별과 행성은커녕 원자 하나도 제대로 형성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눈먼 ‘우연’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강력한 태풍이 고철 처리장을 휩쓸고 지나간 뒤에 완벽한 보잉 747 여객기가 저절로 조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우연으로 여기는 진화론적 관점의 가장 큰 피해는 바로 우연에서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미는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더는 삶의 고통을 감내할 힘이 없어집니다.
이 지점에서, 20세기 최악의 역사적 비극의 한복판을 통과한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박사의 외침이 우리 영혼에 경종을 울립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그는,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라고 선언합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증언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프랭클은 말합니다. 모든 것을 빼앗겨도 인간에게서 마지막까지 빼앗을 수 없는 자유가 있으니, 그것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사건 자체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지만, 그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일어나는 일이 우연이 아닌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더 높은 수준의 존재에게 허락된 교육과정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하고 깨끗한 마음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의 성모님이야말로 빅터 프랭클과 우리 순교자들이 보여준 ‘의미를 찾는 신앙’의 원조이자 정점이십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사흘 동안 성모님의 마음이 어떠셨겠습니까? 애가 타고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질문이 수없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사건을 불행한 ‘우연’으로 치부하고 잊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을 찾은 후에도,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는 아들의 알 수 없는 말씀을 포함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내 지성으로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내던져버리는 것이 교만이라면, 비록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 안에는 분명 하느님의 뜻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 믿고 그것을 간직하며 묵상하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자연이 저절로 생겨난 우연의 산물이 아니듯, 우리의 인생과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또한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는 것이 바로 성모님의 마음을 닮는 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의 이 사건은 장차 일어날 더 큰 사건의 예고편과도 같았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사흘’ 동안 잃어버리셨다가 다시 찾으셨습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이때의 고통과 아들의 알 수 없는 말씀을 ‘재수 없는 우연’으로 여기고 묵상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훗날 당신의 아들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고 ‘사흘’ 동안 무덤에 머물러야 했을 때, 그 칠흑 같은 어둠과 절망을 어떻게 견뎌내셨겠습니까?
아마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이미 연습하셨습니다. 소년 예수를 잃었던 그 사흘의 고통을 묵상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속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찾는 용기를 기르셨습니다. 그렇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고통의 순간에도,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고백했던 첫 마음을 지키며, 아들의 부활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삶에서 아들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고통과 상실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때 세상의 목소리처럼 ‘이건 그냥 우연이야’라며 의미를 포기하지 맙시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 그 모든 고통과 기쁨,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묵상하는 용기를 청합시다. 그 안에서 우리를 더 큰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통해,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느님의 깊은 뜻을 발견하고 응답하는 용기를 얻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미셸 드 몽테뉴는 말했습니다.
“내 삶은 끔찍한 불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은 불행이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많은 이가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합니다. 동전을 10번 던지는 실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앞면이 나오면 10,000원씩 받습니다. 그렇다면 10번 모두 던졌을 때 본인은 얼마나 벌까를 물었습니다. 확률이 50%이니 모두 50,000원을 이야기했을 것 같지만, 실제 기대치는 39,000원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종종 성공 가능성을 확률의 법칙보다 더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지요.
“제가 텔레비전을 보면 응원하는 팀이 꼭 져요.”
일어나지 않은 불행을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어나지 않는 행복을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우리 역시 그런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녀의 마음은 항상 하느님께 향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죽음의 위협이 다가올 수 있는 상황인데,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면서 받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파스카 축제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에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찾고 찾아 결국 예루살렘까지 왔을 때,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때 성모님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예수님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 역시 하느님께 향해 계시는 성모님이십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마음을 본받아 하느님께 향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믿음만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앞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지만 되돌아볼 때만 이해할 수 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앞에서 자기를 비우고 따르는 사랑임을 보여주십니다.
성모님의 마음속 침묵은 하느님의 말씀을 품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십니다. 소중한 말씀을 지켜내고 간직할 줄 아는 마음이 바로 성모 성심입니다. 이렇듯 성모 성심은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마음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향한 완전한 사랑과 일치로 드러납니다. 성모님의 깨끗하신 마음은 우리 죄인을 위하여 끊임없이 전구하십니다. 성모 성심은 말씀을 낳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도록 몸과 마음을 모두 내어 드립니다.
성모님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중심은 말씀이었습니다. 사랑을 말하지 않고 사랑을 삶으로 사셨습니다. 성모 성심은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이끄시는 길잡이가 되십니다.
구원을 향한 우리 여정의 동반자이시며 중재자가 되십니다. 성모 성심은 하느님의 뜻을 간직한 사랑입니다. 성모 성심이여 저희 마음을 주님께 이끌어 주소서.
루카복음 2장 5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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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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