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당신 메시아에게는 구원의 요새이시다. 주님,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 재산에 강복하시며, 그들을 영원히 이끌어 주소서.
주님, 저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니 저희가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사랑하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6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26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16,1-12.15-16)
하가르는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아브람은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다. - 오늘 복음
(마태 7,21-29)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창세 16,1-12.15-16
오늘 제1독서
하가르는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아브람은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다.
그 무렵
6 사라이가 하가르를 구박하니, 하가르는 사라이를 피하여 도망쳤다.
7 주님의 천사가 광야에 있는 샘터에서 하가르를 만났다. 그것은 수르로 가는 길가에 있는 샘이었다.
8 그 천사가 “사라이의 여종 하가르야,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저의 여주인 사라이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9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의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여라.”
10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의 후손을 셀 수 없을 만큼 번성하게 해 주겠다.”
11 주님의 천사가 또 그에게 말하였다. “보라, 너는 임신한 몸 이제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여라. 네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다.
12 그는 들나귀 같은 사람이 되리라. 그는 모든 이를 치려고 손을 들고 모든 이는 그를 치려고 손을 들리라. 그는 자기의 모든 형제들에게 맞서 혼자 살아가리라.”
15 하가르는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아브람은 하가르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다.
16 하가르가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 줄 때,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 살이었다.
마태 7,21-29
오늘 복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26일
박희전 루케시오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52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우리를 지탱하는 ‘반석’은 무엇인가요?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참된 우정은 내가 잘나갈 때보다 실패하거나 곤경에 놓였을 때 더욱 드러나는 경향이 있고, 참된 신앙은 평온함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반석은 말과 기도가 아니라 당신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 있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폭풍이 우리 삶을 덮칠 때까지는 누구도 자신을 참신앙인이라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시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고통과 시련을 피할 수 없지만 반석 위에 굳건히 머무는 한, 그의 집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신심에 도취하지 않도록,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을 방패 삼지 않도록 깨어 있도록 합시다.
우리는 때때로 진심과 행동이 없는 말들로 주님 앞에 나서지는 않는지요? 하느님과 우정의 친교를, 생명의 관계를 나타내는 길은 그분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에 대하여 아름답게 말하거나 성경을 잘 설명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산상 설교의 결론은 ‘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우리 공동체는 기도와 실천, 찬양과 행동의 균형을 잘 지키고 있나요? 우리 공동체를 지탱하는 ‘반석’은 무엇인가요? 삶에서 시련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기보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 안에 진실하게 받아들여 그 말씀을 뜨겁게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그리하여 삶의 폭풍 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감성과 욕망까지 주님의 종인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누구를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그의 종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주님이라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주님이 아니고, 마음으로 주님이지만 실천으로는 주님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주님이 입에 있는 종이 있고, 주님이 마음에 있거나 실천에 있는 종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남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라는 인간의 종으로서의 역사를 얘기하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자기주장이 강하고 제 뜻대로 하려는 경향이 강했을 때 수도원에 살면서도 저는 주님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말로만 곧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한다고 나무라시지만 저는 입으로도 주님을 부르지 못한 종이었습니다.
내가 왜 종이야? 내가 왜 주님의 종이야? 하곤 했는데 종이라는 것이 싫어서 주님의 종인 것도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삼십 중반이 지나서 주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마음으로 주님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이때 제일 많이 기도한 것이 삼종 기도의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입니다. 의지의 작용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종이라는 저의 정체성을 명심하고 각인하려는 노력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이후 저는 인사이동 때 어디 가고 싶다, 어디는 가기 싫다고 하지 않기로 했고, 그것은 지금까지 그렇게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일에서는 주님의 뜻대로 실천하려고 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에서는 의지가 작용하지 않고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내 좋을 대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좋을 대로 하기에 주님의 뜻을 생각지 않거나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내 좋을 대로 하곤 합니다. 내 좋고 싫은 것 곧 내 감성에 내 이성이 마비되거나 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요즘 무엇을 먹을 때 먹고 싶은 것을 먹습니다. 생각 없이 입맛대로 먹지 입맛을 주님께 맞추려 하지 않습니다.
옛날 저는 프란치스코가 밥에 물을 타거나 재를 뿌려서 먹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까지는 못해도 맛있는 것을 골라 먹지 않으려고 했고 더 근본적으로 맛을 제 입에서 없애려고 곧 맛 있고 없고가 없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프란치스코처럼 주님께 입맛을 맞추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라 내가 프란치스코와 같은 인물이 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랬던 것이고, 프란치스코처럼 맛을 초월한 인간이 되고 싶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주님의 종이 되려면 나의 싫고 좋음이 없어야 하고, 그것도 주님 때문에 나의 싫고 좋음이 없어야 하며, 욕망까지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성과 욕망까지 주님의 종이어야 하고, 좋아하는 것과 욕망하는 것이 주님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인데 그러니 주님의 은총을 청하며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슬기로운 사람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항상 이야기의 결말처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늘나라의 참 행복’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된 이 설교는 이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늘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리지는 나라’이기에, 당연히 자기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요?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에게서 오신 외아들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아버지의 뜻과 그 실행방법을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시고, 직접 겟세마니에서는 “아버지, 이 잔이 비켜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외 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죄 없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는 일’이요,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요, ‘부당함을 당하고도 침묵으로 감싸주면서 억울해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신 까닭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선물’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정말 ‘슬기로운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마태 7,24)이라고 하십니다. 곧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가 진정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 안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7,21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 안고,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매일 강론을 쓰는 것이 힘들면서도 행복인 이유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는 것’에 머무는 신앙과 ‘살아내는 것’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갈림길에서, 우리 자신을 비추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합니다. “아예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과 “열심히 듣지만, 들은 대로 실행하지 않는 사람” 중, 과연 누가 더 나쁘며, 자신과 공동체에 더 큰 해악을 끼칠까요?
오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 말씀과 함께 우리 삶에 더욱 와닿는 실제적인 예화들을 통해 완성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유형은 ‘아예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선택은 분명 비극적이지만, 그 피해의 무게는 놀라울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됩니다. 이는 마치 의사에게 중병을 진단받고도, “나는 내 방식대로 살겠소. 그런 치료법은 듣고 싶지 않소.”라며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와 같습니다. 그의 완고함은 결국 자기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는 비극을 낳습니다.
그의 가족은 슬퍼하겠지만, 그의 선택이 병원의 다른 환자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는 않습니다. 그의 피해는 안타깝게도 그 자신과 자신에게 한정됩니다.
두 번째 유형은 ‘들으면서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위험합니다. 그는 공동체 안에 신뢰받는 ‘내부자’로서, 그의 작은 ‘불이행’ 하나가 공동체 전체를 파멸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외과 의사가 치명적인 감염을 막을 새로운 소독법을 교육받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는 그 중요성을 ‘듣고’ 알았지만, 자신의 경력을 과신하여 그 절차를 무시합니다.
그 결과, 수술을 받은 환자뿐 아니라 병원 전체에 감염이 퍼져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참사가 벌어집니다. 제가 알던 한 신부도 유능하다고 여겨지고 본인도 그렇게 믿었던 한 의사가 수술 후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을 하지 않아 돌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더욱 실제적인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베테랑 시내버스 기사가 있습니다. 그는 수십 년 무사고 경력을 자랑합니다. 그는 정비팀장에게 “최근 타이어 이탈 사고가 잦으니, 매일 아침 출발 전 반드시 렌치로 타이어 볼트를 직접 조이며 확인해야 합니다. 눈으로만 봐서는 절대 안 됩니다.”라는 새로운 안전 수칙을 ‘듣습니다’. 그는 물론 그 중요성을 ‘압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그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속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이 일을 20년이나 했는데, 척 보면 알아. 괜찮을 거야.’ 그는 가장 중요한 안전 점검을 건너뛴 채, 수많은 승객을 태우고 운행을 시작합니다. 결국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의 바퀴가 빠지면서 대형 참사가 발생하고, 수많은 승객과 다른 운전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칩니다. 대부분 대형 사고는 이렇게 터집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마태 7,21) 경고하시는 대상이 바로 이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미사에 참여하여 말씀을 듣고, 심지어 주님의 이름으로 큰일을 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매주 미사를 통해 ‘안전 수칙’을 듣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정의를 실천하여라”,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섬겨라.”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다’는 교만함으로, ‘다음에 하지’라는 게으름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점검을 건너뛰고, 양심의 소리라는 경고등을 무시하고, 기도의 의무라는 타이어 볼트를 조이지 않은 채 세상을 향해 출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실행하지 않음’은 단지 우리 개인의 영혼을 좀먹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를 믿고 ‘신앙’이라는 버스에 함께 올라탄 우리 가족, 우리 자녀, 우리 이웃들을 영적 위험에 빠뜨리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저 신자라는 사람들을 보아라. 말과 삶이 저렇게 다르지 않은가”라며 하느님의 이름 자체를 모독하게 만듭니다(로마 2,24 참조).
사도 야고보의 말씀처럼, “실천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일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야고 2,17 참조). 모래, 곧 실천 없는 마음으로 집을 짓는 신앙생활 하면 안 됩니다. 십일조와 용서 같은 아는 것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사제가 되라는 뜻을 거부한 사람이 더 위험할까요, 사제로 살면서 사제답게 살지 않는 사람이 더 위험할까요? 답은 명확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는 뜻이고, 더 높은 수준의 영성으로 간다는 말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책임감을 요구합니다. 들으면서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아예 듣지 않으려는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 듣지 않는 사람은 실행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읽으며 실천할 것을 찾는 게 아니라, 실천할 것을 찾기 위해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저는 하.사.시.와 성경 묵상을 통해 매일 순종할 말씀을 찾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부족합니다. 자신의 길을 아주 명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특별히 매일 강론을 쓰면서 신자들만이 아닌 제가 실천해야 할 것을 찾습니다. 이것이 저의 기쁨이기에, 저는 힘들지만 죽기까지 강론을 쓸 것 같습니다. 말씀을 읽으며 순종할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것을 찾기 위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유다인을 자그마치 43만 7천 명을 학살한 아돌프 아이히만을 잘 알 것입니다. 나치 독일 패망 이후 도망자로 살다가 1961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기소되었습니다. 그가 직접 계획하고 명령해서 수많은 사람의 학살이 이루어졌지만, 그는 끝까지 “어떠한 인간도 죽인 적이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정신이 이상한 것일까요? 어떻게 그런 끔찍한 학살을 계획하고 명령했으면서도 전혀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진단했습니다. 그 결과 그를 정상으로 판정했고, 그중 한 명은 “내 상태보다도 정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정상이면서도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합니다. 악이 평범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스스로 악을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학살이 아니라 최종 해결책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법률을 준수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자기 행위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았고, 또 상대의 입장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평범한 우리도 가능합니다. 자기 행위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고, 상대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 경우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더 나은 방법이야.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남들도 다 그렇게 하잖아.’ 이런 식으라면 자기도 모르게 끔찍한 악으로 향하게 됩니다.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이웃 사랑을 강조하신 주님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이렇게 머물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주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으로 말씀을 듣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진정한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즉,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고 말씀하시지요. 외적인 신앙 고백이나 감정적인 열정만으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만이 구원의 기준이 된다고 하십니다.
참된 신앙이라는 무엇일까요? 주님 말씀대로, ‘입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삶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행위의 옳고 그름을 스스로 깨닫고,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면서 사랑의 실천에 적극적인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만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오늘의 명언
역경은 당신에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할 용기를 준다(앤디 그로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말씀이라는 삶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없다면 신앙은 방향을 잃고 쉽게 흔들립니다. 말씀은 신앙을 행동으로 이끄는 힘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가장 좋은 토대입니다.
믿음은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 드러날 때 진짜입니다. 주님을 기초로 한 삶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반석은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분의 말씀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말씀 없는 삶이기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신앙과 삶의 기초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붙들어주는 영적 기초입니다. 말씀을 살아내는 삶이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 말씀 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삶이 됩니다. 말씀을 삶으로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슬기로운 오늘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말씀 한 줄이 오늘 나를 움직입니다.
마태오복음 7장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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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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