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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6/22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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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였노라.

주님, 이 놀라운 성찬의 성사로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언제나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성체 성혈의 거룩한 신비를 공경하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6월 22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6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22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14,18-20)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다.

  • 제 2독서
    (1코린 11,23-26)
    여러분은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9,11ㄴ-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창세 14,18-20
오늘 제1독서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다.

그 무렵 

18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19 그는 아브람에게 축복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은 복을 받으리라. 

20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1코린 11,23-26
오늘 제2독서

여러분은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23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5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6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9,11ㄴ-17
오늘 복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11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13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22일
조정래 시몬 신부

 

✚ 성체 성혈 대축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09

✚ 강론시작 15:5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나눈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주는 것이다.

먹는 일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행위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시자마자 가축의 먹이통인 구유에 누이셨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계셨기에 인간의 그 원천적 필요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명은 인간에게 영원히 양식을 제공하는 일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뒤에도 계속해서 우리의 양식이 되시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굶주린 군중 오천 명, 또는 사천 명을 먹이시는 이야기가(루카 9,11ㄴ-17 참조) 나머지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데(마르 6,30-44; 8,1-10; 마태 14,13-21; 15,32-39; 요한 6,1-14 참조), 이 본문들 가운데 대부분이 음식을 ‘사는’ 행위를 언급합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시장 경제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기에 굳이 감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을 마을로 보내 음식을 사게 하자고 하며 시장 경제의 논리를 끌어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눔과 선물의 논리를 이야기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그때까지 제자들은 군중에게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기들에게 나눌 것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시장 경제의 논리가 나눔의 신비로 대체됩니다.

나눈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로써 당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선물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내주십니다.

지난해 세계 인구의 9.1%인 7억 3,340만 명가량이 굶주림으로 고통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나눔을 실천하며 살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 탄복하올 높음이며 경이로운 공손함이여!

성체와 성혈 대축일 전례를 거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신학이나 교리를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지난주 삼위일체 대축일을 기념하면서 삼위일체 신학과 교리를 논하지 않고 삼위일체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차원에서 기념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성체와 성혈은 성사라는 점을 톺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을 학기 저는 프란치스코 온라인 신학원에서 미사성제에 대해 강의할 계획이고 개신교의 예배와 우리의 미사가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볼 계획인데 차이점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는 역시 성체 성사의 여부일 것입니다.

개신교는 성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특히 성체 성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찬례를 행해도 그저 상징적 예식일 뿐 실제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과 달리 성체 성사를 인정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인정하고 믿긴 하지만 ‘얼마나’가 문제입니다. 얼마나 믿고 얼마나 성체 성사의 삶을 실제로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성체를 영하면서 진정 주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모십니까? 매일 성체를 영하면서 주님이 늘 함께하심을 얼마나 느끼며 삽니까? 성체와 성혈을 모시기를 얼마나 갈망합니까? 제 생각에 성체와 성혈의 신비는 육화와 수난 신비의 종합입니다.

먼저 성체의 신비는 육화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내려오심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로부터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매일 우리에게 오십니다.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신 그 낮추심의 사랑에 감탄하고 감탄합니다. 얼마나 그 낮추심의 사랑에 감격하면 부활의 기쁨보다 성탄의 기쁨을 더 크게 느끼며 축제를 지내자고 권고합니다. 미사 때 매일의 낮추시는 사랑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입니다. 동정녀의 태중과 사제의 손은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을 얼마나 느끼느냐입니다. 저도 옛날에는 이것을 머리로만 그러려니 했습니다. 사제가 되었을 때도 제 손이 그렇게 대단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위대한 신비를 점차 느끼면서 이 신비를 거행하기에 제 손이 얼마나 더러운지! 동시에 얼마나 위대한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이 권고를 조금은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오, 탄복하올 높음이며 경이로운 공손함이여!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이토록 겸손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시다니!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다음으로 성혈의 신비는 수난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피 흘림입니다. 그리고 피 흘림은 당신을 다 바쳐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런 사랑에 맞갖게 우리도 자신을 바치자고 프란치스코는 이어서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형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삶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성사의 신비를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신학대전 3권).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다. 즉 우리의 파스카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빵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안에 계신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성체성사를 “선교활동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5항)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 신비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주는 신비임과 동시에 그분의 성체성혈을 먹고 마시는 우리 자신에 관한 신비이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도 예수님의 정체를 묻는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라는 헤로데의 질문과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고백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 신원을 밝혀줍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신원과 성체성사와 관련하여, 제자인 우리가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군중을 돌려보내시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이에, 그들을 위하는 마음이 없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고 있는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자리 잡게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다.”(루카 9,16).

오늘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이 명령을 받은 “제자들의 사명”에 귀 기울여 봅니다.

아라비아의 신비가 사디가 전한 우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깊은 숲 속을 걷던 한 수행자가 네 다리가 전부 없는 여우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 여우가 어떻게 먹고 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우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서, 호랑이 한 마리가 포획물을 입에 물고 와 자기 배를 채우고 나더니, 나머지를 여우를 위해 남겨 놓았습니다. 다음 날도 신은 같은 방식으로 여우가 굶주리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수행자는 깨달았다는 듯이, 혼자 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나도 구석에 가만히 앉아 신의 사랑만 믿으면, 내게 필요한 것을 모두 주시겠지?”

그는 그대로 몇 날 며칠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 죽어갈 지경이 되었을 때, 그의 귀에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 그릇된 길로 들어선 자여, 진실을 향해 눈을 뜨라! 내가 너를 이 자리로 이끈 것은 할 일 없는 여우 흉내나 내라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를 본받으라는 것이었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호랑이에게 포획물을 얻을 힘을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이미 그러할 힘을 주셨습니다.

어느 날, 한 수도자는 벌거벗고 굶주린 채로 길거리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어서 하느님을 성토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왜 두고만 보십니까? 왜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겁니까?” 하느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현듯 대답하셨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했다니, 너를 만들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로부터 생명의 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리 없는 여우’를 보내주셨고, ‘굶주린 소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하시며, 또 “빵을 떼어 주시며, 나누어 주어라.”(루카 9,16)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은 인간관계를,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로 당신의 생명을 주시어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신원’입니다.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신원입니다.

이 사랑은 오늘 <제2독서>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주시면서 하신 말씀,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1코린 11,24)라는 말씀에서, “위하여”라는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또한 이 표현은 마태오(26,28), 마르코(14,24), 루카복음(22,20)의 ‘성찬례 제정’ 장면에서 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도 표현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후에, 빵을 들고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몸”이라고, 또 잔을 들고서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라고 축성할 것입니다.

그러니 성체성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현존의 신비’를 재생시키는 동시에,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당신의 최고의 사랑을 쏟으시는 순간에 봉헌하신 ‘생명의 신비’를 재현시킵니다.

그렇습니다. “형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삶”,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체성혈의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어 줌”, “떼어 나누어 줌”, 이는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자신을 “떼어 줌”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다른 무엇이 아닌, 우리 자신을 ‘떼어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아멘.

하오니 주님!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시고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제 자신을 떼어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9,13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주님!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시고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체의 힘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요즘 이해하지 못하게 된 가장 큰 신비가 삼위일체입니다. 그리고 그 힘을 잃어버린 가장 큰 은총이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사실 이 둘은 가장 큰 진리와 은총입니다. 진리와 은총이 주는 열매가 믿음입니다. 아기는 부모님의 진리, 곧 부부 관계의 모범, 그다음은 그 부모가 주는 은총인 양식과 보호를 통해 자신도 부모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동물의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진리와 은총이 힘을 잃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지난주에 말씀드렸으니 오늘은 성체성사가 왜 힘을 잃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체성사가 힘을 잃은 증거는 성체성사를 영하는 것과 영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신자들이 느끼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평화방송 TV를 보고 미사 하는 것과 성당 와서 성체를 영하는 것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지, 삶의 에너지가 다 떨어지게 되는지를 느낀다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성체를 영하러 성당 오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이유는 그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니 주일미사에도 그렇게나 많이 빠지고 냉담이 많은 것입니다.

은총이 힘을 잃는 가장 큰 이유는 말씀이 힘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말씀에 싸여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은총이 초콜릿이라면 이것이 녹아서 흐르지 않게 싼 포장지가 말씀입니다. 말씀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은총이 와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걸으시며 성경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가슴 뜨겁게 듣고 나서야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말씀이 먼저 오고 그다음에 은총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오셔서 나중에 성령님을 보내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에 너무 관심이 없습니다. 성물방만 봐도 그렇습니다. 성물, 곧 은총과 관련된 것들은 많은데 책들은 거의 없습니다. 책이 없으면 성물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은총은 말씀을 통해 온 사명에 힘을 주는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술을 한 번 마시면 멈출 줄 몰라서 많은 사고를 치고 싸움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문제를 일으키며 사셨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루르드를 갔습니다. 전날도 양주 한 병을 혼자 다 마셨지만, 성모님 성지에서 하루만이라도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정말 성모님의 도움으로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하루를 마시지 않았으니 다음 날도 안 마셔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몇 년째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저를 만나러 와서 제가 술을 마셔도 그분은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으십니다. 가장 행복해하는 것은 자매님입니다. 자매님은 술을 마시지만, 그걸 보면서도 형제님은 술을 마시지 않으십니다.

성체성사는 마치 이 형제가 루르드에서 받은 은총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은총이 만약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결심이 없었다면 효과가 있었을까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그들에게 광야에서 빵을 주신 기적인데, 만약 그들이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 외진 곳까지 오지 않았다면 그 기적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항상 은총은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은총은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성취될 수 있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와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이것이 성체와 성혈의 상징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향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 은총이 주어졌을까요? 만약 그들이 모세를 따르지 않고 이집트에 머물렀다면 만나를 통해 얻는 힘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아만이 치유의 은총을 받은 것도 엘리사의 말을 들으려고 했기 때문이고, 성모님도 성령으로 잉태하시게 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주님의 종이라고 하시며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체가 나에게 힘을 주게 하도록 말씀과 친해지십시오. 개신교가 ‘말씀만으로’라는 기치를 들고 생겨났기에, 가톨릭은 우리는 ‘성사만으로’라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전례인 강론이 조금만 길어도 신자들이 힘들어합니다. 강론을 듣지 않아도 성체만 영하면 미사를 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강론은 성체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강론이 죽는다면 성체도 죽습니다.

성체를 영할 준비는 평소에 말씀을 읽으면서 사명을 찾고 매일 무언가 받은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최고급 식재료(성체, 은총)가 있다고 해도, 레시피(말씀)와 요리를 만들겠다는 의지(사명)가 없다면 그저 냉장고 속 재료에 불과합니다. 레시피는 각 재료를 어떻게 사용하고 조합해야 훌륭한 요리가 되는지 알려줍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은 '성체'라는 은총을 우리 삶에 어떻게 통합하여 맛있는 신앙의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려주는 레시피와 같습니다.

혹은 의사와 처방전의 비유도 좋겠습니다. 몸이 아픈 환자에게 의사는 병을 진단하고 약과 함께 생활 습관 개선을 지시하는 처방전(말씀)을 줍니다. 약(은총)이 효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의사의 지시를 믿고, 제때 약을 먹으며 생활 습관을 바꾸려는 노력(사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처방전을 무시하면 아무리 좋은 약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체성사도 우리 영혼의 의사이신 주님의 처방전을 따를 때 최고의 효능을 발휘합니다.

영화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주인공 네오에게 "나는 자네에게 문을 보여줄 뿐이네. 그 문을 통과하는 것은 자네 자신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는 매트릭스의 진실(말씀)을 알려주고, 네오가 인류를 구할 '그(The One)'라는 '사명'을 제시합니다. 네오가 그 말을 믿고, 두려움을 넘어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행동했을 때, 비로소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체는 말씀을 통해 나아가는 이들에게 힘을 주는 ‘여행자를 위한 양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매일 말씀으로 오늘의 사명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우리는 남 흉을 많이 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어떤 단체의 리더인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리더이면서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비판하는 분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본당 신부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모든 사람을 100% 만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미국의 한 노동 단체가 스트레스 해소의 장소로 ‘리더 흉보기 대회’를 열었습니다. 그 흉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남을 흉보고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일에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남 흉보는 데 익숙합니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 시각은 어떨까요? 이 역시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에 대한 좋은 점 한 가지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부정적 시각의 대부분을 지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한 가지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특히 리더의 모습은 어떨까요? 내가 나무를 보고 있는 중에도 리더는 숲을 봅니다. 당연히 나를 다른 것을 바라보니 오해를 받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리더의 존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운동경기에 감독과 코치의 역할은 아주 미미한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앞에 나서는 것은 선수이고, 이 선수들만 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감독과 코치는 숲을 보면서, 그 선수의 능력을 더 높여줍니다. 이렇게 리더는 한 방이 있습니다. 

우리의 리더는 누구일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커다란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보지 못하고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인간들의 이런 괘씸함에 당신의 사랑을 접으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다가오십니다. 즉, 성체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계속해서 전해 주십니다. 이 사랑을 보지 못하기에, 주님을 향해 불공평하신 분, 무관심한 분, 자기들의 기도를 외면하는 분이라고 계속해서 불평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계속되는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 것을 다짐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크기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뒤에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필요한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기준을 내세우면 주님께 대한 부정적 시각을 계속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만을 바라보면,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완벽을 두려워하지 마라. 어차피 완벽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살바로드로 달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만나는 은총의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입니다. 성체 성혈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이 성체 성혈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나눔에서 피어나는 충만함의 기적입니다. 나눌 때 채워지고 머무를 때 더욱 깊어집니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먹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성체 성혈은 십자가의 사랑이며 자기 전부를 내어주는 예수님의 봉헌입니다. 감사와 나눔 일치와 희생이 우리를 바꿉니다. 변화의 시작은 하느님께 우리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변화는 옛 자아의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거룩한 변화는 우리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변화의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세상의 양식은 썩지만 성체 성혈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의 양식입니다. 이렇듯 성체 성혈은 삶의 방향이며 가장 친밀한 일치입니다. 함께 나누는 성체 성혈이며 함께 살아가는 성체 성혈의 실천입니다.

성체 성혈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에게 오신 예수님의 생명이며 사랑입니다. 성체 성혈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오늘 되십시오. 진정한 사랑이란 성체 성혈같이 남김없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코린토1서 11장 24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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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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