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하느님, 하느님께 바라는 모든 이에게 힘을 주시니 자비로이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희가 거룩한 은총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키며 마음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6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20일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2코린 11,18.21ㄷ-30)
다른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나를 짓누릅니다. - 오늘 복음
(마태 6,19-23)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2코린 11,18.21ㄷ-30
오늘 제1독서
다른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나를 짓누릅니다.
18 많은 사람이 속된 기준으로 자랑하니 나도 자랑해 보렵니다.
21 누가 감히 자랑한다면, 어리석음에 빠진 자로서 말하는 것입니다만, 나도 자랑해 보렵니다.
22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24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25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26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27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28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
29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다른 사람 때문에 죄를 지으면 나도 분개하지 않겠습니까?
30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
마태 6,19-23
오늘 복음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20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20일
현영민 루도비코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50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이들에게 맞서 자신을 변호합니다. 그가 하는 자기 자랑은 허영이 아니라 듣는 이를 깨우치는 수단으로써 교육적 가치가 있습니다.
그는 적대자들이 내세운 자격을 뛰어넘는 자신의 인간적 자격을 내세우고 그리스도를 위한 사도직에서 자신이 겪은 모든 고난을 설명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겪은 긴 시련과 고통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위하여 감내한 것들로서 그의 적대자들은 이러한 헌신과 희생에서 결코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무수히 겪은 옥살이와 매질, 돌질과 죽을 위험 등을 자기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도직에 진정으로 임해 왔다는 증거로 제시하며 거짓 사도들과 자신을 구별합니다.
이러한 그의 자기변호는 결국 자신의 “약함”(2코린 11,30)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의 약함은 오히려 하느님 능력이 드러나는 자리가 됩니다.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길이 늘 순탄하지는 않음을 우리도 체험합니다. 큰 희생을 봉헌하면서 주님과 공동체에 헌신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가까운 이들에게서 오해와 방해를 받고 비방과 모함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참된 제자의 증거입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을 따라 우리 자신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해 봅시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해야 할 자랑과 하지 말아야 할 자랑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자랑에 관해서 얘기하니 저도 오늘은 자랑에 관해서 성찰하고 나누려고 합니다. 저란 사람은 자랑에 있어서 참으로 가증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자랑에 있어서 가증스러운가 하면 자랑하지 않는 사람인 척하며 은근히 자랑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이 면에서 매우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랑하면 왜 안 되는지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인데 그런데도 자랑하고 싶어서 은근히 자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랑이란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나 요즘 수고 많아! 하며 이런 것 알아달라는 것이고, 나 김치도 잘 담아! 하며 이런 것 알아달라는 식이며, 나는 할 말은 하는 사람이야! 하며 다른 사람 못하는 거 나는 하는 사람이라고 은근히 자랑하는 식입니다.
지금 이 나눔을 하면서도 저는 지금까지 위선적이었음을 공개적으로 깸으로써 말하자면 공개 참회하는 영적인 목적도 있지만 나는 나의 치부를 공개적으로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야!라고 은근히 자랑하는 속셈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가증스러운 저의 자랑은 아마 죽어야지만 그칠 것 같고, 그러니 이런 저를 인정하며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저를 합리화하고 위로하는데 이것은 진정 저의 고질병입니다.
과거의 저를 보고 지금의 저를 봐도 저는 주님의 사랑을 진정 넘치도록 받고 이웃들로부터도 과도한 칭찬과 인정을 받으며 사는데 뭐가 부족해서 자랑을 아직도 하고 그것을 인정받으려고 하는지 진정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자랑은 인간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존경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 인정받고 상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고 그러기에 프란치스코가 무척 경계하라고 권고한 육의 정신입니다.
“육의 정신은 영의 내적인 신앙심과 성덕을 추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심과 성덕을 원하고 열망합니다.”
이런 권고와 함께 오늘 바오로 사도의 권고와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도 권고합니다.
“그대는 아직도 악습과 죄를 즐기면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는 무엇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매일 지는 일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은 오늘 바오로 사도를 통해 해야 할 자랑과 하지 말아야 할 자랑에 대해 성찰하게 된 유익한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주님의 눈은 나를 향하여 있는데 내 마음의 눈은 어디를 향하여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경건생활,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보물’과 ‘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보물’은 보석을 나타내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주님을 경외할 줄 아는 지혜’(이사 33,6)를 상징하기도 하며, 또한 ‘이스라엘’에 견주기도 합니다(탈출 19,5;신명 7,6). 또한, ‘보물’은 획득하여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으니 찾은 이에게 발견됩니다. 그런데 발견하기만 하고 차지하지 못한 이가 있고, 아예 찾아 나서지도 않은 이도 있고, 찾았으나 악용하는 이도 있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마라.”(마태 6,1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20)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보물을 쌓아둘 수도 있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둘 수도 있습니다. ‘땅에 쌓아둔 보물’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위해 쌓아올린 보물이지만, 좀 먹고 녹슬고 도둑 맞을 수 있는 보물입니다. ‘하늘에 쌓는 보물’은 하느님 앞에서 쌓아올린 보물이고, 영원히 남는 ‘의로움의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을 보면, 자신이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곧 값진 보물이라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눈이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의 눈이 나 자신을 보고 있는지, 하느님을 보고 있는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있는지,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있는지?
그런데, 주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당연히, 주님의 마음은 여기 우리 안에 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당신 마음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보물인지라 당신의 눈은 지금 우리에게 와 있을 것입니다. 당신 목숨을 내어주고 얻은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눈은 나를 향하여 있는데, 내 마음의 눈은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와 있는 주님의 눈동자를 관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몸의 등불”인 “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마태 6,22-23)
그렇습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해질 것입니다” 곧 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눈이면, 환하고 투명하게 볼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깨끗하면 볼 것”(마태 5,8)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맑아져야 할 일입니다. 여기에서, “눈이 성하지 못하면”(πονηροσ)은 직역하면 ‘악하면’으로, 곧 ‘악한 눈’을 뜻합니다. 그러니 보물의 처신이나 사용이 악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리 보물이라 할지라도 악하게 사용되면, 오히려 자신을 어둠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6,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주님!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있는 것을 쓸모없다고 보는
불평의 눈이 아니라
있는 것을 소중하다고 보는
축복의 눈이 되게 하소서.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이 아니라
모든 것 안에서 경탄과 탄성,
경배와 경외를 바라보게 하소서.
상처를 보되 그 속에서
구원을 볼 줄을 알고,
죄를 보되 자책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았음을 보는
맑은 눈이 되게 하소서.
진부함을 넘어 경이로움을 보고
행위를 넘어 존재를 보는
거부할 수도 거부될 수도 없는
그 무엇도 떼어놓을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의 눈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눈빛이 이런 사람은 조심해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보물을 세상에 쌓는 사람의 눈은 맑지 못하게 되고 탁한 어둠처럼 된다고 하십니다. 눈이 맑고 밝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언제 그런 순수한 눈을 볼 수 있을까요?
저는 눈도 성숙해간다고 생각합니다. 익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세상 것을 바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천상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결단이 어느 것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분명 조금씩 맑아질 수도 있고 탁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른들이야 잘 눈치채지 못할 수 있지만, 아이들이나 동물들은 그 눈빛을 쉽게 알아챕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에 대해 집중하기에 상대가 자신을 해칠 사람인지, 생명을 주는 사람인지 알아내야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떤 때는 아이들이 저를 한눈에 좋아해 주고 어떤 때는 무서워하기도 하는 것을 볼 때 제가 어떤 눈빛인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결단’입니다. 아마도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오스카 쉰들러가 바로 그 극적인 전환을 보여주는 최고의 예일 것입니다. 탐욕과 기회주의로 가득했던 그의 눈은, 유다인 마을을 짓밟는 학살의 현장에서 길을 잃은 ‘붉은 옷의 소녀’를 목격하는 순간,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수천의 흑백의 죽음 속에서, 그 작은 생명의 선명한 붉은색은 그의 양심을 꿰뚫는 은총의 빛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숫자’와 ‘비용’으로만 보이던 유다인들이, 그 순간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가진, 구해야만 하는 ‘생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연민의 시선 하나가 그의 인생 전체를 바꾸는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눈만 보고 그 사람 마음을 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눈이 세상 것 때문에 빛날 수도 있는데, 그때 빛나고 있는 것으로 그 마음도 환하게 빛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것 때문에 빛나는 그 눈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분명 예수님을 팔아넘길 때 은전 30냥을 보고는 눈이 빛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으로 골몰하여 눈이 흐려졌을 것입니다. 반면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항상 눈이 맑습니다. 무언가를 바랄 때 눈은 빛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은 어떻습니까?(사도 9,1-19)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눈을 멀게 하는 강렬한 빛을 만납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교만으로 가득 찬 육신의 눈을 잠시 멀게 하심으로써, 영혼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니아스가 그에게 안수했을 때, “무엇인가 비늘 같은 것이 그의 눈에서 떨어져” 나가며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눈빛은 증오와 살의가 아닌,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사도의 빛으로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 빛은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사랑이나 사람의 영혼을 위한 목적으로 산다면 그 사람의 눈은 항상 그 기회를 찾기 때문에 흐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눈을 밝게 하는 에너지가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것을 얻지 못한 불만으로 어둡게 됩니다.
그러니까 눈은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욕망으로 빛이 납니다. 성경은 이러한 ‘시선의 변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세관장 자캐오를 떠올려 보십시오(루카 19,1-10). 그의 눈은 오직 돈을 향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도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내는 데에만 혈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계속 행복할 수가 없으니 이런저런 행복을 찾기 위해 어떤 때는 빛나고 대부분의 시간은 우울한 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가 누구신지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올려다보시며’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그를 죄인이 아닌 한 인격체로 바라봐 주시는 예수님의 따뜻하고 맑은 눈빛과 마주쳤을 때, 자캐오의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재산 목록에서 가난한 이웃들에게로 향했고,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라는 기쁨의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님의 ‘성한 눈’이 자캐오의 ‘나쁜 눈’을 치유한 것입니다. 자캐오는 이제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며 항상 그 맑은 눈을 가지게 됩니다.
결국 우리 눈은 하늘의 것을 추구하면 그 ‘의지’가 대부분 그 눈을 맑게 해 줍니다. 하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면 가끔은 빛났던 눈이 대부분은 다른 빛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질서’입니다. 질서 있는 삶이 필요합니다. 세상 것을 추구하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질서가 무너지면 눈도 무너집니다.
그러니 눈빛이 자주 바뀌는 사람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 사람은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결단과 의지’가 나의 눈도 만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도 나이가 들면서 엄마만 바라보겠다는 아이의 맑은 눈을 닮아가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사제 서품식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드디어 사제가 된다는 기쁨보다도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걱정이 점점 커졌습니다. 다른 신부에 비해 너무나 부족한 저의 모습 때문이었지요. 영성적으로 뛰어나지도 않고, 신학과 성경에 대한 지식도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렇다고 청산유수로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품식이 가까워지면서 두려움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지 10년이나 되었는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분노까지 올라왔습니다.
이런 고민을 모두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대품 피정에서 ‘나’로 살아야 한다는 묵상을 통해서였습니다. 다른 신부와의 차별성을 찾아서 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품을 받은 뒤에 저의 차별성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에 노력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지금의 ‘나’가 되었습니다.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돈도, 세상의 지위도, 또 세상 사람들의 인정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나를 만드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나답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남처럼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불가능한 삶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처럼이 아닌 ‘나’처럼 살라면서 우리를 모두 다르게 창조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물을 땅에 쌓지 마라”고 하십니다. 재물 축적에 대한 경고 말씀입니다.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서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시적이고 불확실한 세속 재물에 의존하지 말고 영원한 가치를 지닌 하늘의 보물, 즉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더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마태 6,21)라고 하시면서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기준은 하느님께 있어야 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남들처럼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기억하면서, 철저하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나는 나답게 사는 우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보물을 하늘에 쌓을 수 있습니다.
요즘 무엇을 보물로 여기면서 살고 계십니까? 혹시 하늘이 아닌 땅에 보물을 쌓는데 더 큰 관심을 가지면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기도, 자선, 봉사 등의 하늘의 보물을 쌓아가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으로 나답게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일에 있어 절제와 조화를 중요시 여기라. 삶에서 그대를 행복으로 이끄는 것과 그대를 파괴하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인디언 격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내 마음이 머무는 곳 그곳이 나의 보물입니다. 보물은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의 삶을 이끌고 지배합니다. 마음은 항상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향합니다.
마음의 방향성과 마음의 중심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마음의 방향성은 우리 삶의 가치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하느님께 두어야 합니다.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우리 삶에서 중요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마음의 행복입니다. 이렇듯 보물이 있는 곳에 삶의 선택이 있고 그 선택이 쌓여 우리의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까? 보물이 바뀌면 마음도 바뀝니다. 보물을 이제는 하느님께 옮겨야 합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보물을 이제는 만날 때입니다.
흔들리는 마음까지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보물이시니 우리 마음도 하느님 안에 머뭅니다.
소유와 집착이 아닌 기도와 용서라는 보물을 하늘에 쌓는 오늘 되십시오. 마음을 하늘에 두면 삶도 하늘을 닮습니다.
마태오복음 6장 21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6/22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6.22 |
---|---|
25/06/21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6.21 |
25/06/19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2) | 2025.06.19 |
25/06/18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6.18 |
25/06/17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6.17 |
25/06/16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6.16 |
25/06/15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6.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