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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6/17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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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하느님, 하느님께 바라는 모든 이에게 힘을 주시니 자비로이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희가 거룩한 은총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키며 마음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6월 17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6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2코린 8,1-9)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5,43-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2코린 8,1-9
오늘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1 형제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께서 마케도니아의 여러 교회에 베푸신 은총을 여러분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2 환난의 큰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기쁨이 충만하여,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풀었습니다. 

3 나는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4 그러면서 성도들을 위한 구제 활동에 참여하는 특전을 달라고 우리에게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5 그들은 우리가 그렇게까지 기대하지는 않았는데도, 먼저 주님께 자신을 바치고, 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도 자신을 바쳤습니다. 

6 그래서 우리는 티토에게, 여러분에게서 이미 시작한 이 은혜로운 일을 마저 끝내라고 권하였습니다. 

7 이제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8 나는 이 말을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의 열성에 견주어 여러분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 확인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5,43-48
오늘 복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17일
이한길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3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가난은 복음의 핵심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모금하면서 ‘가난의 신학’을 펼친 바오로 사도의 편지는 복음적 가난의 본질을 잘 드러내 줍니다. 오늘 독서의 9절에서 ‘가난하게 된다.’라는 그리스 말은 구걸하려고 손을 내밀어야 할 정도의 절대적 가난, 곧 극빈을 뜻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그런 상태로 ‘되셨음’을 강조합니다. 반대로 ‘부유하게 된다.’라는 그리스 말은 풍족함을 넘어서서 차고 넘친다는 뜻입니다.

결국 당신의 부유와 우리의 가난을 스스로 맞바꾸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리스도교적 가난의 본질입니다. 재화를 나누는 것은 형제자매들 가운데 궁핍한 이가 없게 하는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성금은 예루살렘 교회와 다른 지역 교회의 친교 표시요 도구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난은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려고 스스로 낮아지시고 가난해지신 그리스도의 신비”요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가난은 바로 복음 한가운데 있습니다. …… 여러분의 아주 큰 이 부유함이, 곧 열정, 애덕,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호주머니에 이르게 하세요. …… 신앙이 호주머니에 이르지 못하면 참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 그리스도교적 가난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의 것을 주는 것인데, …… 그 가난한 사람이 나를 부유하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가난한 사람이 나를 부유하게 할까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가난한 사람 안에 계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성녀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 2015.6.16.).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 받는 일에서도 뛰어난

재승덕(才勝德)이란 말이 있습니다. 재주가 덕을 이기는 것을 말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이런 말이 있는 것은 재주는 많은데 덕이 없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고, 재주만 가지고 책임을 맡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며, 그래서 본인도 공동체 구성원도 불행한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재승덕(財勝德)이라는 말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제가 만들어 낸 말로서 재물은 많은데 덕이 없다는 뜻입니다. 재물이 많지만 후덕(厚德)하지 못하고 박덕(薄德)합니다.

왜 이런 말을 제가 만들어 냈냐 하면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마케도니아 교회를 이렇게 칭찬하기 때문입니다.

“환난의 큰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기쁨이 충만하여,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케도니아 교회는 재승덕(財勝德)하지 않고 덕승재(德勝財)하여 가난한데도 후덕한 것이고 주님 말씀대로 하면 재물을 하늘에 쌓은 것이며, 이웃 사랑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한 것입니다.

제가 제일 불쌍하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악덕하고 악독한 사람이고, 그다음으로 불쌍하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박덕한 사람입니다. 악덕한 사람은 선이 하나도 없고 악으로 가득한 사람이며, 악독한 사람은 악이 오래 숙성되어 독하게 된 사람입니다.

어쨌거나 덕(德)이란 선과 악과 관련한 능력이며 우리는 악덕을 쌓기보다 선덕을 쌓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선덕을 많이 쌓아 후덕할 수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는 그들이 시련 가운데서도 기쁨이 충만하였기에 후덕할 수 있었다고 얘기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시련 가운데서도 기쁠 수 있었는지 다시 묻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의 충만이 후덕하게 한 것입니다.

기쁨이란 뭔가 내가 원하는 좋은 것을 얻었을 때 오는 만족감입니다. 너무도 좋아하고 오래 원하던 것을 얻으면 그만큼 기쁨이 크고 충만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면 베풀 수 있게 됩니다.

집안에 큰 경사가 나면 동네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지 않습니까? 어제 이사회가 끝나고 저녁 식사를 했는데 우리 이사 가운데 한 분의 형님이 이번에 대통령 수석이 되었다며 한턱내신 것과 같은 겁니다.

물론 그분은 세속적인 성공을 그리 큰 기쁨으로 생각지 않고 그래서 그것을 그리 알리고 싶지 않아 하셨지만 어쨌거나 뉴스로 알려졌으니 한턱내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 교회는 큰 시련 가운데 기쁨 충만하였으니 분명 세속적인 기쁨이 아니고 그 기쁨은 천상적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끝부분에 나오는 이런 말이 인상적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난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일에서도 뛰어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받는 데 뛰어난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데 뛰어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완전한 사랑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십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9-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5,44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주님!
단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그에게도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가 기도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

나를 힘들어 하고 있지만 
나의 사랑이 
절실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용서의 방법과 순서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신앙의 심장이지만,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도전입니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마주할 때 솟구치는 감정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불가능에 가까운 명령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오늘 강론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용서에도 방법과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곧 세상 정의만큼은 올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믿음이고 그 믿음은 작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1. 하느님의 자녀, 그 높은 자존감에서 오는 힘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힘은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은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분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원수 사랑의 첫 번째 열쇠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거룩한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미움의 진흙탕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영적 신분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 높은 곳에 서게 됩니다.

점잖은 어른이 자기를 향해 짖는 강아지와 싸우지 않듯,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미움에 미움으로 응답하는 유치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는 ‘나는 너보다 낫다’는 교만이 아니라, ‘나는 하느님의 존귀한 자녀이기에 더는 미움에 나를 내어주지 않겠다’는 거룩한 자유입니다.

성인 요한 괄베르토의 삶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형제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려 칼을 뽑았습니다. 그때가 바로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용서하신 성금요일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원수가 두 팔을 벌려 십자가 모양을 만들자, 요한은 ‘하느님의 자녀인 내가 어찌 주님의 날에 복수를 할 수 있는가’ 깨닫고 칼을 버렸습니다.

그는 원수를 용서함으로써 미움의 종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다운 자유를 선택했고, 훗날 위대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용서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2. 나의 의지적 응답, 작은 실천 "인사"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통해 열매 맺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따라야 하듯,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깨달았다면 이제 그에 맞게 행동하려는 ‘의지’를 보여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무슨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냐?”(마태 5,47) 하시며 ‘인사’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말씀하셨습니다.

원수 사랑의 여정은 이 작고 용기 있는 ‘인사’ 한마디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미운 사람을 외면하는 침묵은 미움이 자라는 토양입니다. 이때 건네는 인사는 어둠 속에 작은 촛불을 켜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인사는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미워하며 살지 않겠습니다’라는 나 자신을 향한 선언이자, ‘주님, 제 마음은 아직 멀었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이 작은 씨앗 하나를 심겠습니다’라는 하느님께 대한 응답입니다.

이에 대한 가장 극적인 실제 사례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크리스마스 정전’입니다. 참호 속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던 독일군과 영국군은 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이브 밤, 독일군 참호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캐럴이 흘러나왔습니다.

이 노래는 총성이 아닌 평화의 ‘인사’였습니다. 잠시 후 영국군이 다른 캐럴로 화답했습니다. 노래라는 인사를 주고받던 그들은, 이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몇몇 용감한 병사들이 무기 없이 참호 밖으로 나와 서로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 작은 만남은 수백 명의 병사들이 서로 악수하고, 선물을 나누고, 심지어 함께 축구 경기를 하는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비록 짧은 정전이었지만, 이 사건은 적대감의 한가운데서도 작은 ‘인사’와 같은 인간적인 교감이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입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동생을 잃은 코리 텐 붐 여사는, 전쟁 후 독일의 한 교회에서 간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는 바로 수용소에서 가장 잔인했던 간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순간 증오가 치밀었지만, 그녀는 주님께 기도하며 힘을 구한 뒤 그 손을 맞잡았습니다. 원수를 향해 내민 그 힘들었던 '악수'가 그녀를 과거의 지옥에서 완전히 해방시킨 치유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영웅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라고 초대하십니다. 그 시작은 성령께서 주시는 거룩한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이니, 더는 미움에 나를 내어주지 않겠다.’ 이 마음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리고 그 결심을 아주 작은 행동으로 옮겨 보십시오. 어떤 믿음이든 행동으로 발휘되지 않으면 죽은 믿음입니다.

내가 사제이고 의사라는 믿음이 있는데 그 믿음이 어떻게 미사를 하고 환자를 돌보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그리고 내일,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사람에게 용기를 내어 먼저 인사해 보는 것입니다.

그 어색한 인사 한마디가 원수 사랑이라는 거대한 산을 오르는 첫걸음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사이에서 놀라운 일을 시작하게 하시는 작은 문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지금까지 반백 년도 훨씬 넘게 살았습니다.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 같은데, 제 나이를 돌아보니 이제 좀 연식이 되었구나 싶습니다. 신학생 때, 교수 신부님의 은경축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사제 생활을 25년이나 하셨다니 ‘정말로 오랜 시간을 사제로 사셨구나.’라고 생각했고, 이제 할아버지 신부님이라고 친구들과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의 신부님보다 나이가 더 많은 것입니다.

저 역시 객관적으로 볼 때 늙은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결코 피부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너무나 다행스럽다고 생각되는 부분인데, 저 혼자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 즉 저와 함께하는 사람들도 같이 나이를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새해가 되어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한 살 더 많은 형과 동갑이 되는 줄 알고 반말했다가 혼났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일까요? 저만 홀로 나이를 먹는다면 정말로 끔찍할 것입니다.

함께할 이웃이 있기에 나이를 먹어도 괜찮았습니다. 그들도 나이를 먹고, 이런 그들과 함께하면서 늙음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젊게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한대의 시간 안에 계신 주님과 함께하면 어떨까요? 더 젊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는 미워하여라.’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43)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레위 19,18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사실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구절은 율법에 없습니다. 이는 비공식 관행으로 이방인, 죄인, 로마인 등에 대한 적대감을 반영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짜 하느님의 뜻을 밝혀주십니다. 즉,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도 또 선인에게도 해와 비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 없이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의 대상을 계속해서 선별하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함께할 이웃이고, 나를 더 잘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이웃인데도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하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그 사랑을 따르고, 또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더 젊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나쁜 일을 생각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여러분이 온종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다 (조셉 머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느님 자녀의 참된 정체성은 참된 사랑에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동참하는 올바른 사랑만이 우리 모두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변화의 힘입니다. 

사랑은 일시적 감정이 아닌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향하는 의지의 선택입니다. 사랑은 나와 너를 치유하고 일깨우며 올바로 성장시키는 가장 좋은 은총의 생명력입니다.

참된 사랑은 참된 자유를 줍니다. 참된 자유는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사랑은 사람의 존재를 건드립니다. 상처와 원한이라는 보복의 본성을 무너뜨리며 우리가 가야 할 예수님의 길을 만나게 합니다.

참된 인간의 길은 참된 사랑의 길입니다. 영적 성장과 성숙은 사랑과 용서로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십자가를 동반합니다. 상처 위에 사랑과 자유를 얹을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원수 사랑의 절정입니다. 십자가는 원수였던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바꾸신 사건이었습니다. 원수 사랑과 십자가로 하느님을 닮은 우리들을 만나는 신앙의 여정 되십시오.

조건 없는 사랑을 배우는 하느님 사랑의 날입니다. 그 사랑으로 전혀 다른 우리가 되었습니다. 악을 이기는 사랑입니다.

 

 

 

마태오복음 5장 4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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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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