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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6/14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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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리라.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6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14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2코린 5,14-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5,33-37)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2코린 5,14-21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태 5,33-37
오늘 복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14일
김현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59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말과 행동의 일치

오늘 복음은 맹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이나 자기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느님의 소유이고 그분의 권한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자기 머리카락의 색깔 정도는 자유롭게 바꿀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 몸과 영혼 전체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지하신 맹세는 자신에 대한 과도한 믿음, 하느님의 것에 대해서까지 힘을 행사하고 싶은 의지를 내포합니다. 술과 분위기에 취한 헤로데가 헤로디아의 딸에게 경솔한 맹세를 하고, 그 맹세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에 이르는데, 이는 허튼 맹세의 결말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맹세란 어떤 일을 꼭 실행하겠다는 결의를 드러내는 일로, 상대방이 자기 능력을 신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뢰는 맹세가 아니라 정직과 진정성에서 나옵니다.  

자기 능력이나 권한에 의지하는 맹세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의지하는 겸손이 오히려 신뢰를 주지요. 인간의 나약함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굳이 거창한 대상을 동원해 가며 맹세하지 말고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 하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마태 5,37) 하기는 지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면 삶이 무미건조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뜻합니다. 신앙인은 말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정직하고 일관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순수함과 진실함이, 말과 행동의 일치가 중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리스도의 사절이라고 하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화해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불문하시는 것인가? 그러니까 잘못했음에도 괜찮다고 하시는 것인가? 생각게 합니다.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용서 청하지 않아도 화해하신다는 뜻입니까? 이에 대해 저는 죄와 죄인의 관계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하느님이시어도 죄를 용서하진 않으실 것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시지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죄인을 용서하는 것은 종기를 떼어내기 위해 수술하듯 그에게서 죄를 떼어내는 수술을 하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죄 때문에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지레 포기하고 그래서 죄책감 때문에 하느님과 화해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는 우리인데 하느님께서 죄를 따지기까지 하시면 하느님과 화해를 완전히 포기하겠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죄인이어도 우리와 화해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이어도 여전히 사랑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어도 당신을 사랑하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하느님의 사랑인데 그중에서도 우리 죄인의 사랑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이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아직 완전히 용서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용서하고 싶고 그래서 얼마큼은 그를 용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사랑은 필요하지 않고 받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사랑만 있으면 그의 사랑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그의 사랑이 여전히 싫기에 굳이 받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사랑에 비교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받길 원하시고, 같은 뜻에서 우리가 당신과 화해하길 원하시는 것은 참으로 큰 사랑인데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큰 사랑을 보여주셨고 우리가 알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런데 그다음입니다. 우리게 화해의 말씀이 맡겨졌고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데 우리가 하느님과는 화해해도 이웃과는 정확히 얘기하면 원수하고는 화해하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절이요 그리스도 화해의 사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웃을 용서는 해도 그의 사랑은 받고 싶지 않은 것은, 완전한 용서도 아니고 온전히 화해한 것도 아닙니다. 용서하지 않고 있으면 내가 괴로우니 용서해 줘버리고 마는 것일 뿐입니다. 

용서해 줘버리고 맒으로써 그와의 질긴 인연을 끊어버리려는 것이지 그를 사랑하는 것도 그를 죄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이라고 하는 바오로 사도의 도전을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요? 하며 거절하시겠습니까? 예! 하며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한칼에 거절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노력 좀 해보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는 이에게는 맹세 자체가 필요 없다.

오늘은 ‘네 번째 새로운 의로움’으로, ‘맹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흔히 우리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진실성을 뒷받침하거나, 그 이행을 보증하기 위해서 ‘맹세’라는 것을 합니다.

우리는 에사오가 성급한 ‘맹세’로 야곱에게 장자의 상속권을 팔아넘긴 이야기(창세 25,33), 헤로데의 경솔한 ‘맹세’로 한갓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이 목숨을 잃은 이야기(마르 6,17-19), 베드로가 추궁을 벗어나기 위해 맹세까지 하면서 스승을 모른다고 배신한 이야기(마르 14,71) 등을 압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맹세하시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계약체결 때(신명 4,31;7,8), 약속 이행의 보장을 말씀하실 때(창세 22,16;26,3), 심판 예고 때(민수 14,21;아모 4,2;6,8),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실 때(에제 20,3;33,11)에 그러하십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대개는 “나는 살아있는 자로다”라는 표현이 뒤따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유일한 보장은 하느님 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신명 6,13;10,20). 그리고 <레위기>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레위 19,12). 

한편, 사람들끼리는 ‘맹세’하여 계약을 체결하고 약속이나 결심이 취소될 수 없다는 것을 보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법정의 심문에서나 예언자들의 예언에서 그 말의 진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하느님을 보증자로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법정에서 증언할 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이는 거짓 맹세인 경우에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차차 시간이 가면서, 하찮은 일까지도 하느님을 끌어들여 자신의 목적을 위한 ‘이기적인 거짓 맹세’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피조물을 두고 맹세함으로써 우상숭배의 결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뿐만 아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맹세’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자신을 보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그 주인이 아니기에, 하느님이나 하느님 것을 두고 맹세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자일 뿐, 스스로가 부르심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사람들일 뿐, 하느님의 뜻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응답하여 따르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해야 할 뿐입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정직함’(솔직함, 진실)이 요청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의 성실한 실행에 그 진실성의 여부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님께 응답하고, 응답한 바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프랑스 푸아티에르의 성 힐라리우스는 말합니다.

“믿는 이에게는 ‘맹세’ 자체가 필요 없는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5,37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주님!
오늘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주인 행세하기를 멈추고 
당신 뜻에 
응답하는 자 되게 하소서. 

응답이 행동으로 
진실 되게 하소서. 

제 말과 행동이 
참되게 하시고 
“예” 할 것을 
“아니요”라고 하지 않고 
“아니요” 할 것을 
“예”라고 하지 않게 하소서. 

제 자신이 진리인 양 
내세우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욕조에 넘어져 죽을 확률은 80만 1,923분의 1이라 합니다. 그리고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은 428만 9,651분의 1이라 합니다. 둘 다 아주 희박한 확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욕조에서 넘어져 죽기보다 10배 희박하고,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보다 2배 더 힘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로또 당첨이라고 합니다.

로또 당첨 확률이 814만 5,060분의 1이라고 하는데, 거의 제로에 가까운 확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또 당첨 명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기에는 현수막이 늘 붙어 있지요. ‘48번째 1등 당첨’, ‘로또 명당 1등 17번’ 등의 현수막을 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로또 명당 복권 판매점을 찾아서 전국을 쫓아다닌다고 합니다. 이런 열정으로 과연 제로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당첨되었을까요?

이런 열정은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열정으로 다른 일을 하면 더 높은 가치를 실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자기 열정을 쓸데없는 곳에 쏟아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의 열정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재미있는 실험이 생각납니다.

2개의 주머니가 있습니다. 하나에는 현금 5억 원이 담겨 있고, 다른 하나는 매년 5천만 원을 벌 수 있는 역량 주머니라고 합니다. 과연 사람들은 어떤 주머니를 선택할까요? 대부분 5억 원을 선택했습니다. 한 번에 쉽게 그리고 편하게 세상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 쓸데없는 곳에 우리의 소중한 열정을 쏟게 합니다.

편하고 쉽게 자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거짓 맹세를 하기도 합니다. 또 지금의 위기를 쉽게 모면하기 위해 헛된 맹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숨깁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도 그런 위선을 숨길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을 두고도, 또 자기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기 열정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순간의 만족을 위한 열정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위한 열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되게 살아야 합니다. 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소문은 현명한 자에 이르러 멈춘다 (순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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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마태오복음 5장 34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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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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