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리라.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6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12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2코린 3,15─4,1.3-6)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5,20ㄴ-26)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2코린 3,15─4,1.3-6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15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16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4,1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3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 하여도 멸망할 자들에게만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4 그들의 경우, 이 세상의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5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마태 5,20ㄴ-26
오늘 복음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12일
김현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19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의로움이, 이미 굳어진 전통과 법규에 충실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뛰어넘도록 마음에 기초한 형제애의 섬세한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을 지켜서 다만 상대를 죽이지만 않으면 형제애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22) 하고 덧붙이신 말씀에서, 옛 계명을 부정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뜻을 전하시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뿌리로 돌아가시는데, 그 뿌리는 분노입니다. 분노는 나를 거스른다고 느끼는 상대에게 “성을 내는”(5,22) 감정입니다. 분노는 실제로 상대를 향한 공격의 마음입니다. “바보!”(5,22)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은 경멸을 드러냅니다.
분노와 경멸은 생명을 무너뜨리는 힘을 가집니다. 정신적 사회적 생명을, 하느님 자녀의 존엄성을 죽입니다. 따라서 ‘살인하지 마라.’라는 계명은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된다.’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화해와 친교를 이루며 살라는 초대입니다.
모든 인간은 처지가 다르더라도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형제”(7,22-24)라는 말을 네 번이나 쓰십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은 험담과 비난이 형제자매들의 생명을 위협하는지요! 율법의 완성은 형제자매를 하느님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자비의 얼굴’을 지니듯이 제자들의 의로움도 자비로 나타나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속속들이 사랑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 주님 말씀을 얼핏 들으면 거부감이 들기 딱 좋습니다. 누구를 능가하라고 하시는 말씀도 거부감이 들고, 의로움 면에서 능가하라고 하시니 더 거부감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경쟁적으로 누구를 꼭 이겨 먹으라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능가하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이 말씀 바로 전에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한 것의 연장선상입니다.
그들의 의로움 정도로는 의로움을 완성할 수 없으니 누구를 이겨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이고, 완성해야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경쟁적인 비교 우위가 목적이 아니라 완성과 하느님 나라의 입성이 목적인 것입니다. 이 점은 그럭저럭 이해하겠는데 왜 하필이면 의로움입니까? 왜 사랑이 아니라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은 자기들만 의롭다거나 자기들이 더 의롭다고 하는데 더 의롭다고 하는 그들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사실 이렇게 자기가 더 의롭다, 자기 말이 더 옳다고 생각하기에 남을 깔보고 서로 더 의롭다고 하다가 싸우고 미워하게 되잖아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 의로움 곧 능가하는 의로움은 실은 의로움이 아니라 사랑이고, 굳이 의로움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의 의로움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능가하는 의로움은 사랑이어야만 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의로움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의로움뿐이 아닙니다. 가난이고 순종이고 겸손이고 모든 덕의 완성이요 최고봉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가난을 잘 실천하는데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가난은 불완전한 것이거나 아예 가난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순종한다면서 사랑으로 순종하지 않고 억지로 순종한다면 그것은 불완전하고 순종이라기보다는 복종 또는 굴종입니다.
어쨌거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것으로 주님께서는 성내지 말고 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성내고 욕한다는 얘기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의롭더라도 성내고 욕하는 의로움인 겁니다. 저의 경우 운전을 거의 하지 않지만 운전할 때 운전을 잘못하는 사람을 보고 성내고 욕합니다. 정치인들의 불의를 보면서는 더 성내고 욕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것이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이며 그러고 나면 기분이 매우 더럽고 찝찝합니다. 저의 저 밑에 교만이 있는 것이고 속속들이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칠게 또는 미숙하게 운전하는 사람을 볼 때 ‘저 나쁜 놈!’ 하지 않고 ‘요 예쁜 놈!’ 할 때 제 사랑은 속속들이 사랑이고 의로움을 능가하는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얼른 화해하고 용서하기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의로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룸은 산상설교의 핵심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설교의 중심인 6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들의 의로움에 한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갈라 3,11)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로마 3,20)
그렇다면, 대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여섯 가지 대당 명제를 통해 제시하시는데, 오늘 <복음>은 그 ‘첫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옛 율법의 ‘살인’을 구체적 ‘행동의 결과로 드러난 살인’만이 아니라, ‘원리상 살인’으로 적용할 수 있는 내면적이고 근본적인 동기까지도 포함시키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것까지도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에 포함시키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
물론, 모든 ‘성’(화)냄이 살인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의 ‘화’냄도 있고, 교정을 위한 ‘성’냄도 있고, 단순한 습관이나 짜증의 ‘성’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의도되지 않더라도 “혀”로 인하여 죽는 이들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 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쓰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이 율법의 근본정신이 “화해와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제단의 예물이 아니라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 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자 되기를 바라십니다. 동시에, 형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태 5,23)이라는 말은 자신만이 아니라 형제를 위하여 화해와 사랑이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카인에게 ‘너의 예물이 무엇이냐?’ 묻지 않으시고,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성찬례를 거행하기 전에, 혹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하고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따짐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5,24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원망을 품은 이의
아픈 마음을 보게 하시고
제 불찰을 먼저 살피게 하소서.
시비를 따지기보다
이기려 하기보다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넓은 운동장에 어떤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복장이 눈에 확 띕니다. 그 운동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은 양말을 신고 있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운동장을 걷기도 하고 또 뛰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뛰고 있으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기도 하고 뒷걸음칠 때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때론 자기 셔츠 주머니에 손을 넣어 카드를 공중에 내밀기도 합니다.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까?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이 사람은 축구 심판이었습니다. 예전에 축구 경기 구경을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 축구 심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축구 선수들을 모두 제외하고 축구 심판만을 보니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는 것입니다.
좁은 시야로 보면, 세상은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넓은 시야로 보면, 그 이상함도 괜찮아집니다. 축구 시합에서 축구 심판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시야가 바로 주님의 시선이었습니다. 그 시선은 철저하게 사랑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사랑을 통해서만 주님의 일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인간관계 그리고 세상의 일 모두 주님 뜻과 그분의 시선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열린 시야, 넓은 시야를 통해서만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으며, 그 안에 커다란 기쁨과 희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조금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그 당시의 사람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늘 나라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셨다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으며,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닮을 수는 있어도 능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좁은 시야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사랑의 넓은 시야로 바꿔주십니다. 단순히 율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정신을 기억하면서 철저하게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되었고, 다툰 형제가 있으면 얼른 화해하고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분쟁이 있을 때 얼른 타협하라고 하십니다.
이 모두가 사랑의 넓은 시야를 가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좁은 시야를 가지고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랑의 넓은 시야가 분명 필요합니다.
오늘의 명언
삶의 목적은 목적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로빈 샤르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우리는 지금 누구와 화해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입니다. 예물보다 앞선 것은 인간 관계의 회복입니다.
형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은총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형제는 단지 혈육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함께하는 모든 이들을 뜻합니다.
형제와의 화해는 단순히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교만과 분노와 상처를 내려놓고 진정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깊은 기도이며 정직한 실천입니다.
공동체적 구원은 형제간의 화해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단절과 상처를 치유하는 참된 화해의 상징입니다. 화해의 근원이신 하느님과의 화해는 이웃과의 화해로 이어지고 나 자신과의 화해는 피조물과의 화해로 깊어집니다.
화해 없는 예물은 공허합니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바꾸는 화해의 신앙이길 기도드립니다.
화해는 상처보다 사랑이 먼저 선택되는 것입니다. 화해의 십자가에서 상처는 기도가 되고 그 기도는 하늘을 울립니다.
마태오복음 5장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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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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