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찬미받으소서.
하느님 아버지, 진리의 말씀이신 성자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세상에 보내시어 하느님의 놀라우신 신비를 인간에게 밝혀 주셨으니 저희가 참신앙으로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을 알고 오직 한 분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을 흠숭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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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15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잠언 8,22-31)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지혜는 태어났다. - 제 2독서
(로마 5,1-5)
우리는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6,12-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잠언 8,22-31
오늘 제1독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지혜는 태어났다.
하느님의 지혜가 이렇게 말하였다.
22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23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24 심연이 생기기 전에, 물 많은 샘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25 산들이 자리 잡기 전에, 언덕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26 그분께서 땅과 들을, 누리의 첫 흙을 만드시기 전이다.
27 그분께서 하늘을 세우실 때, 심연 위에 테두리를 정하실 때 나 거기 있었다.
28 그분께서 위의 구름을 굳히시고 심연의 샘들을 솟구치게 하실 때,
29 물이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바다에 경계를 두실 때,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30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31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로마 5,1-5
오늘 제2독서
우리는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형제 여러분,
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요한 16,12-15
오늘 복음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15일
이상국 요셉 신부
✚ 삼위일체대축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0:57
✚ 강론시작 15:53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서로 자기에게서 나와 자신을 내주고 상대를 받아들이기
요한 복음서를 보면 성부와 성자께서는 서로 안에 계시면서 모든 것을 공유하시며 완전한 일치를 이루십니다(10,38; 14,10-11; 14,20; 17,21 참조). 상대 안에 있으려면 먼저 자기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저마다 자신에게서 나와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버지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줌으로써 일치를 이루십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두 가지 원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인 신성을 세 위격이 공유하신다(본성의 일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유한 위격이신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사랑하시어 당신을 내주시고 상대를 받아들이시면서 성령 안에서 하나 되시는 끊임없는 과정으로서의 일치(사랑의 일치)를 말합니다.
첫 번째 일치는 우리가 ‘믿는’ 신비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일치입니다. 고유한 ‘나’와 ‘너’가 자기에게서 나와서 자신을 내주고 상대를 받아들일 때 삼위일체가 드러납니다.
그러할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특히 무엇보다 삼위일체의 모상인 가정은 가장 고유한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하나 되는 성삼위의 존재 방식은 교회의 바탕이요 본보기이며 귀착점으로서 ‘삼위일체의 교회’,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교회 헌장, 4항)을 낳습니다.
교회 안의 모든 공동체는 삼위일체의 친교를 따라 살도록 초대받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큰 신비이기에 우리 삶과 무관한 그저 믿기만 하면 되는 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날마다 실천할 수 있고, 살아가야 하는 신비가 삼위일체의 친교입니다. ‘서로 자기에게서 나와 자신을 내주고 상대를 받아들이면서’ 삼위일체의 친교를 이루며 살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의 창조와 구원을 믿는 우리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그분께서 하늘을 세우실 때, 심연 위에 테두리를 정하실 때, 나 거기 있었다.”
지난주 성령 강림 대축일 지낸 우리는 이제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냅니다. 당연합니다. 성령 강림으로 삼위의 하느님께서 비로소 당신 전부를 모두 드러내셨고, 그래서 성령 강림 다음 주일에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냄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가> 해 <나> 해와 비교할 때 <다> 해의 삼위일체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로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다는 것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제가 좋아하는 연중 평일 감사송 3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 감사송에서 우리 전례는 이렇게 감사를 하느님께 올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인류를 창조하셨듯이 또한 인자로이 인류를 구원하셨나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창조를 제가 어려서부터 감사드리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과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모르고 느끼지 못했을 때는 감사는커녕 원망과 분노를 하느님께 쏟아부었지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저의 집이 가난한 것에서 시작된 원망이 그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이 악한 것과 인생이 고해라는 것까지 원망과 분노는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였고, 하느님이 존재하시는가?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선하신 것이 맞는가? 의심에 의심을 거듭했지요.
악하고 고통뿐인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에 대해 감사드릴 수 없었고, 그런 세상에서 살아야 할 제 인생에 대해 감사드릴 수 없었던 겁니다.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할 사람이 부모에게 자기의 태어남을 원망하고, 욥이 자기를 밴 어머니의 태와 태어난 날을 저주한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래서 삼위일체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은 저의 인생을 그 전과 후로 바꾸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 서간에서 얘기하듯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시기에 삼위일체이십니다. 사랑하시는 성부와 사랑받으시는 성자와, 성부와 성자 간의 사랑이신 성령의 삼위일체이십니다.
그리고 오늘 잠언서가 얘기하듯 하느님은 고독하게 혼자 창조하지 않으시고, 부모가 사랑으로 자녀를 태어나게 하듯 삼위 간의 사랑으로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지혜서 11장이 얘기하듯,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싫어하실 리 없으시고 참으로 사랑하신다고 믿는 것이 저의 믿음이고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실 것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삼위일체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리라는 것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은 사랑으로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 중에는 간혹 쾌락으로 아이를 낳고는, 남자는 아예 몰라라 도망치고 여자는 혼자 키울 수 없다며 버려버리는 그런 비정하고 무책임한 부모가 있지만 하느님은 그러실 리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실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해 성자와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어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을 따라 당신께 오게 하셨으며, 성령을 보내시어 그리스도께 우리를 인도하게 하셨다고 오늘 복음이 얘기하는데 삼위일체의 이 구원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삼위일체의 신앙고백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 이는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신비입니다. 알아듣기에는 어려워도 참으로 벅찬 사랑의 신비입니다. 너무 깊어 헤아려지지 않아도, 오히려 다 헤아려지지 않기에 더 깊이 매료당합니다. 다 이해되지는 않아도, 그 사랑은 충분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 신비의 내용을 알아듣는 데는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 신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라는 그 내용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라는 이 사실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그 신학적 의미를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생겨나게 된 역사적 배경 안에서 알아들어 볼 수 있습니다. 곧 교회 안에서는 3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하느님이 실제 하느님과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성령과 하느님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주장에 맞서, 교회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신앙고백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알아듣는 하느님이 실제의 하느님이시고, 신앙인들 안에 숨결로 일하시는 성령도 실제 하느님의 숨결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대체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삼위로서 일체이신 분”이시라는 이 사실은 단지 하느님의 신비를 말해주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신비입니다. 곧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축복의 신비입니다. 또한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가운데 나타났는지’를 말해주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드러내시는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신비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아드님을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축복을 말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참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참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 생명의 진리가 나타나게 하시고, 당신의 숨결인 성령께서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음과 실천으로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살아계시고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지금 바로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복음적 의미로는 “사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있음”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삼위로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 이름마저도 ‘항상 함께 계시는 분, 임마누엘’이시듯이,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시기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참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우리와 함께 하는 그분의 사랑’이 ‘이미 우리 안에 살아계심’을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 벌어질 성령의 활동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요한 16,13)
이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계시하고 예수님의 구원행위를 계속함으로써,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6,14)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분께로 인도하시며, 그분을 영광되게 하심으로써 아버지를 영광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진리의 성령께 자신을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정교회의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님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물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고,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일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6,13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주님!
진리의 옷을 입고
당신 정원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하여, 당신의 정원에서
행함으로 꽃을 피우고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모상에 따라
새로워지게 하시고,
진리의 영의 숨결 되어 흐르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삼위일체에 참여하는 방법 : 진리의 전달자가 되는 것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이러한 축일을 교회가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고 이해하고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삼위일체 신비만 처음부터 벽에 부딪힙니다. 대부분 성 아우구스티노가 바다에서 조개로 바닷물을 웅덩이에 옮기는 아이 이야기를 비유로 들며, 삼위일체를 이해하려 하는 것은 아이가 조개로 바닷물을 퍼서 웅덩이에 퍼서 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로 끝내버립니다.
이렇게 나타난 현상이 무엇이냐면 삼위일체의 기초조차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느님은 몇 분이세요?"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한 분이요!"라고 대답합니다. 만약 103위 성인을 한 분이라고 하면 말이 될까요? "103분이시죠!"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103위는 103분이라고 말하며, 왜 3위는 한 분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는 우리 신앙고백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기본이 되어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삼위일체 신비에 대해 이렇게 무관심하게 되었을까요?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는 노력이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전에 ‘사랑의 이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결론은 ‘사랑은 용기다’였습니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10년 동안 돌고 돌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분명 누군가가 말해 놓은 사랑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정의는 ‘사랑은 받아서 전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르침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영께서 오시지 않으면 지금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을 당신이 받아 성령께 드리면 성령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것이 삼위일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만이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려면 삼위일체 신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받은 진리를 전해주어야 합니다.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세라는 아버지로부터 큰 사랑과 함께 "너는 공주란다"라는 소중한 정체성을 선물 받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모든 것을 빼앗긴 채 하녀가 되는 시련을 겪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세라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심어준 정체성과 이야기를 다른 아이들에게 전해주기 시작합니다. "아빠가 그랬어. 모든 소녀는 다 공주야." 이 말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진리이자, 세라를 통해 아이들에게 흘러 들어간 희망이었습니다. 이로써 '아버지-세라-아이들'은 이야기 안에서 희망으로 굳게 하나가 됩니다.
한편, 기억을 잃은 아버지가 바로 곁에 있었지만 세라를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세라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진리를 아이들에게 충실히 전하며 그 진리대로 살았기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빠는 세라가 경찰들에게 끌려갈 때 기억이 되돌아온 것입니다. 세라가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며 아이들과 하나가 되었을 때, 단절되었던 아버지와도 다시 온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부의 말씀을 성자를 통해 받아 성령 안에서 나누며 살아갈 때, 이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게 되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알아보게 하는 기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도로시 데이(Dorothy Day)는 무신론자였고 오늘을 즐기자는 자유분방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러다 딸 테레사(Tamar Teresa)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지식으로는 딸에게 알려줄 게 한계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남편이 극도로 반대하였음에도 그녀는 딸에게 더 높은 진리를 전수해주기 위해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남편은 그녀를 떠났지만, 그녀는 남편 대신 아이를 위해 종교를 선택하였습니다.
보통 자신들이 전해 주는 것을 통해 하나가 되는 예는 남편-아내-아이가 됩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 대신 하느님의 진리를 전해 주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엄마-아이가 됩니다. 내가 가르치고 싶은 진리를 가진 대상을 받아들이게 될 때 그렇게 삼위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신앙을 통해 자신이 받은 진리를 사회에 확장했습니다. 감옥에 여러 번 다녀오기도 했지만, 그 삶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시성 절차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사랑의 법칙이 아닌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 사랑의 원리가 삼위일체입니다. 이것을 계시해 주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를 배워나가지 않으면 더 큰 사랑으로의 확장은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지식을 전수하시며 모든 이를 삼위일체 신비에 끌어들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그를 모든 민족의 복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는 복으로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당신과 세상과의 중간에서 참사랑의 지식을 전해 주는 삼위일체의 중개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진리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 곧 본성상 하느님이 된다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전할 때 많은 박해도 받겠지만, 결국 삼위일체 사랑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떻습니까? 처음에 아버지로부터는 참사랑의 지식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나병환자를 정말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정하고 나서는 그 참사랑의 지식을 나병환자를 끌어안고 씻어주며 전해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삼위일체 신비에 들어가는 것이고, 삼위일체 신비에 들어가야 비로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사랑의 진리란 우리도 삼위일체 본성에 참여할 수 있는 신성을 지닌 존재가 된다는 진리에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미키 마우스’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애니메이터이며 영화 제작자이며, 세계적 미디어 기업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설립자인 월트 디즈니입니다. 1955년 디즈니랜드의 큰 성공 이후, 월트 디즈니는 또 하나의 테마파크를 짓습니다. 그것이 바로 월트 디즈니 월드입니다. 그러나 오픈 전에 폐암으로 세상을 뜨는 바람에 완공된 모습을 보지 못했지요. 오픈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가 이 멋진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자, 디즈니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그분이 이 자리에 계시지 않지만, 이미 디즈니랜드를 보았습니다. 그분이 먼저 보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인상 깊은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을 살며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즉, 그 나라를 보면서 그 나라 사람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줄기차게 죄를 범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미워하고 판단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불평불만 하며 온갖 부정적인 마음으로 사랑을 외면한다면 이 역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삶을 우리도 지금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가톨릭 교리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다는 하느님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룬다.”라는 뜻의 삼위일체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 담긴 사랑을 보면서, 우리 역시 어떻게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할지를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사랑의 원천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달려 순종하시어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사랑의 삶을 살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하나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라는 하느님 나라도 볼 수 있습니다.
그 나라는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의 사랑보다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집중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우리는 자주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이 기도를 바치면서 죄를 짓게 될까요? 아닙니다. 곧바로 죄에서 벗어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에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약속을 쉽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실행은 가장 충실하다 (장 자크 루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빛과 지혜와 사랑으로 삼위일체 신비를 만납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자신을 우리들에게 개방하십니다. 완전한 사랑 안에서 하나의 일치를 이루는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삼위는 서로를 완전히 내어주고 받아들이는 관계 안에서 존재하십니다. 성자는 성부의 뜻에 따라 자기를 비우고 사람이 되십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인 성령을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창조와 구원과 활동으로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십니다. 이렇듯 삼위일체는 구원의 이야기이자 하느님 자신의 자기 계시의 이야기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관계의 하느님이시고 고통에 동참하시는 하느님이시고 공동체의 중심이시고 해방자가 되십니다. 사랑과 관계 안에서 존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들 또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삼위일체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을 닮아 사랑하고 함께하고 나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의 신비는 나눌수록 깊어지고 열릴수록 하나가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를 위한 관계 안에서 더욱 아름답습니다. 나눌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감쌉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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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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