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하느님, 하느님께 바라는 모든 이에게 힘을 주시니 자비로이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희가 거룩한 은총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키며 마음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6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2코린 6,1-10)
우리를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 오늘 복음
(마태 5,38-4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2코린 6,1-10
오늘 제1독서
우리를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형제 여러분,
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2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3 이 직분이 흠잡히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4 오히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곧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5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또 수고와 밤샘과 단식으로,
6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와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7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합니다.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우리는 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진실합니다.
9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10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마태 5,38-42
오늘 복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16일
양금주 토마스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27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그분께서 세상을 이기신 방법
“바보!” 오늘 복음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듣게 될 말입니다. 그는 누구나 이용하려 드는, 이른바 ‘밥’이나 ‘봉’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이 원리에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논리로는 바보로, 모자란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자신을 “바보야!”라고 부르셨지요.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그렇게 모두에게 밥이 되어 주시다가 악한 자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께서 세상을 이기신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무력함이 악을 이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마태 5,38)라는 ‘탈리오의 원칙’을 뛰어넘어 악의 고리를 끊으십니다. 동태 복수법을 동태 포기법으로 이기라는 말씀입니다. 악에 악으로 대응하면 결국 악만 남기 마련이니 상대의 악에, 몰염치한 요구에 선과 관대로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비폭력은, 비겁하고 무기력한 순응이 아니라 용감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한 군인에게 뺨을 맞으셨을 때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 하신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과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이 말씀은 당신께서 겪으신 부당함에 맞서 정당하게 항의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단순히 인내하고 양보하라는 것이 아니라, 용감하게 나서서 정의와 진리를 옹호하고 약자들을 위하여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라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물러섬이 비겁함이 아니라 사랑이 되고, 우리의 저항이 폭력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를 지키는 수단이 되도록 식별과 지혜의 은총을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은총으로 바꿔 받아들이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 제게는 너희가 내 제자라면 악인에게 맞서는 수준에 머물지 말라는 말씀으로, 그러니까 악인을 초월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애와 싸우지 말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애와 같이 되지 말라는 말씀이요 그래야 어른이라는 말씀이지요. 마찬가지로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제자라면 악인보다 어른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요, 악을 초월하고 압도하는 어른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악이 하나이고 내가 싫어하는 악이 다른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께서 맞서지 말라고 하시는 악인은 어떤 자입니까?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악인이고, 그 악인과 맞서지 말라는 말입니까?
그런 것이라면 악마와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말과 같을 것이고, 그런 것이라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 가셔서 악마와 싸워 이기신 주님의 모범을 따르지 않는 것일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라면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악인과는 피하지 말고 맞서 싸워야 하고 반드시 이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악은 내가 싫어하는 악이고, 맞서지 말라시는 악인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종종 악과 악인의 기준이 하느님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종종 그런 악인을 통해 우리를 이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탄을 이용하여 곧 고통을 이용하여 욥을 더 성숙한 신앙인 곧 악을 넘어선 어른으로 만드십니다.
오늘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어른들입니다. 하느님의 일꾼들로서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감당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곧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
그래서 고통을 주는 악인들과 싸우지 않고 그들이 주는 고통을,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바꿔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그래서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복수동태법’의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는 ‘악인에게 무관심 하라’, ‘악인을 피하라’, ‘악인에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곧 악에 대한 무저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요, 자기기만이요, 비겁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맞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맞서지 말라’라기보다 ‘맞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말라’,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악과 ‘맞대응’ 하다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버리기 일수 입니다. 그렇지만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악을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는 일’, 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맞서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진정으로 맞서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사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불로 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불이 아니라 물로 꺼야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사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는’(마태 5,39) 일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일이 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이기게 되는 길입니다. ‘사랑’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악이나 악인에게 맞서기보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이요,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비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5,39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주님!
맞서지 않게 하소서.
대적하거나
앙갚음하지 않게 하소서.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뺨을
돌려 대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처벌할 권한이 아니라
사랑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인 까닭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피해망상적 신앙인이 되지 않으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구약과 신약의 율법의 차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구약은 세상의 법입니다. 세상 법은 최대한 피해 입힌 대로 보상해주라는 정의를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상대의 잘못으로 눈이 한쪽 잘못되었는데, 두 쪽을 잘못되게 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이 한쪽 잘못돼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심판관이 당신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장하면서 건너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동물-인간-하느님의 법의 순서대로 성장합니다. 인간의 법이 구약의 율법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지키면서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직 동물의 수준이면서 하느님처럼 되려는 신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전거도 균형을 잡지 못하는데, 오토바이를 타겠다고 도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어떤 스님의 제자가 명상만을 합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발전이 없습니다. 스님은 돌을 숫돌에 갑니다. 땀을 흘리며 돌을 가는 스승에게 제자가 묻습니다.
“돌을 왜 숫돌에 가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돌을 간다고 거울이 되겠습니까?”
“이 녀석아, 네가 명상을 열심히 하는 것이 이와 같다.”
먼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부터 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정치인들이 그렇습니다.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 사람이 당신에게 돈이라도 꿔서 갚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냥 그 사람이 하는 짓이 모두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기도한다고 거울이 되겠습니까? 하느님처럼 정의로워지기 이전에 먼저 세상의 정의에 도달해야 합니다. 아직 인간적인 수준에도 오르지 못한 이들이 신앙생활 할 때 피해망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마음속의 원인 모를 미움과 분노를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에게 ‘너의 그 미움은 정당하지 않다’고 속삭이지만, 그 목소리를 인정하기는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그 미움의 대상을 ‘나를 파괴하려는 사악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세상이 나를 공격하기에 나의 미움은 정당한 방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허먼 멜빌의 위대한 소설, 『모비딕』의 에이해브 선장은 바로 이 비극적인 자기기만의 가장 강력한 상징입니다.
에이해브는 고래잡이배 피쿼드호의 노련한 선장입니다. 그는 과거에 ‘모비딕’이라 불리는 거대한 흰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이 끔찍한 사고는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극은 다리를 잃은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하느님 안에서 삭이고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을 세상 모든 악에 대한 증오로 키워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증오를 ‘모비딕’이라는 존재에게 투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모비딕은 더 이상 이성을 가진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성을 상실한 짐승에 불과한 고래에게 인격적인 악의를 부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광기를 선원들 앞에서 이렇게 정당화합니다.
“보이는 모든 것은, 사람이여, 그저 판지로 만든 가면일 뿐이네. ... 인간이 치려거든, 그 가면을 뚫고 쳐야 한다! 어찌 죄수가 벽을 뚫지 않고서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나에게 흰 고래는 바로 그 벽일세.”
에이해브에게 흰 고래는 자신을 가두는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악의 ‘가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상처와 증오라는 감옥을 부수는 대신, 그 감옥의 벽을 외부의 존재인 ‘모비딕’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이 피해망상은 그 자신뿐 아니라, 그가 이끄는 공동체 전체를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첫째, 그는 선장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했습니다. 고래를 잡아 기름을 얻어 항해를 성공시켜야 할 그의 배는, 오직 선장 한 사람의 복수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그는 금화 한 닢을 돛대에 박아놓고 흰 고래를 처음 발견하는 자에게 주겠다고 외치며, 선원들의 이익과 자신의 광기를 교묘하게 결합시켰습니다. 공동체의 목표가 한 개인의 뒤틀린 망상에 잠식당한 것입니다.
둘째, 그는 동료들의 이성적인 목소리를 억압했습니다. 오직 일등항해사 스터벅만이 그의 광기를 지적하며 “이것은 신성모독입니다! 흰 고래에게 복수하다니요! 미친 짓입니다!”라고 외쳤지만, 에이해브는 듣지 않았습니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을 향한 건강한 조언마저 자신을 방해하는 공격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피쿼드호는 장대한 추격전 끝에 모비딕을 만나고, 삼일간의 사투 끝에 파괴됩니다. 에이해브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모비딕의 몸에 작살과 함께 엉켜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동료가 그의 광기와 함께 수장됩니다.
에이해브의 비극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 삶의 ‘흰 고래’를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상처와 열등감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 배우자나 동료, 혹은 특정 집단을 ‘나를 해치려는 악의 가면’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카인도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동생 아벨에게 피해를 본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예배하면서도 형제를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세상이나 사람을 미워하는데, 그 합당한 이유는 없어서 양심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상이나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 든다고 스스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나에게 해를 가한 만큼만 미워합시다. 이것이 용서를 위한 시작입니다. 거울이 되려면 먼저 돌에서 쇠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어느 여행 수필 작가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항상 화낼 준비가 된 사람들 같아요.”
화는 언제 생기게 될까요? 무시당할 때,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오해나 소통 문제로 갈등이 생겼을 때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입시, 취업, 승진, 결혼, 육아 등에서 경쟁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그 안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됩니다. 아마 이런 이유로 화낼 준비가 된 사람 같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자기 감정을 억누르는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화병’이 있습니다. 화병은 화를 많이 내는 병이 아니라, 적절히 표현되어야 할 울화와 억울함 등이 내재하여 있는 병입니다. 문제는 이 화병이 터지면 큰 일인 것입니다.
그냥 참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자기가 당한 것을 언젠가는 다시 되갚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마음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가 가득한 세상 안에서, 일상 속 깊숙이 스며있는 이 화를 주님 뜻에 맞게 마음을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힘든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구약성경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는’이라는 부분은 피해자와 동일한 정도의 피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복수법인 탈리오 법칙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이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넘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라는 것은 모욕에 대해서도 사랑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오른손으로 왼쪽 뺨을 치는 행위는 유다인 사회에서 수치심을 주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겉옷까지 내주어라.’라는 말은 법적으로 보장된 최소한 권리조차 사랑으로 기꺼이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라는 말에도 재미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법으로는 로마 병사가 유다인에게 강제로 천 걸음까지 짐을 들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천 걸음까지는 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강제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 자발적인 동행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 마음을 사랑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 기준을 따르는 것이 정의라고 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세상을 넘어선 사랑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 권리를 내려놓고 누군가를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 사랑을 베풀기 힘든 대상이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찾기보다 사랑할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할 때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이미 난 길을 따라가지 말고, 길이 없는 곳으로 가서 그곳에 흔적을 남겨라 (랄프 월도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악인에게 맞서지 않는 것이 악의 고리를 끊는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하느님의 방식을 복음에서 만납니다. 악에 반응하지 않을 때 그 악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힘으로 우리는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증오는 증오를 낳습니다. 이렇듯 비폭력은 나약함이 아니라 강한 믿음의 선택입니다.
믿음의 선택이란 자기를 내려놓는 적극적인 믿음의 삶입니다. 사랑과 지혜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입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방식을 따르며 한걸음씩 걸어가는 한 주간 되십시오. 증오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으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힘을 진실로 믿습니다.
마태오복음 5장 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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