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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6/19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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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하느님, 하느님께 바라는 모든 이에게 힘을 주시니 자비로이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희가 거룩한 은총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키며 마음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6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2코린 11,1-11)
    나는 하느님의 복음을 대가 없이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6,7-1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2코린 11,1-11
오늘 제1독서

나는 하느님의 복음을 대가 없이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1 아무쪼록 여러분은 내가 좀 어리석더라도 참아 주기를 바랍니다. 부디 참아 주십시오. 

2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3 그러나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4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 

5 나는 결코 그 특출하다는 사도들보다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6 내가 비록 말은 서툴러도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일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7 여러분을 높이려고 나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대가 없이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다고 해서,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는 말입니까? 

8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하려고 여러 교회에서 보수를 받는 바람에 그들을 약탈한 꼴이 되었습니다. 

9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었습니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제하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10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걸고 말하는데, 아카이아 지방에서는 나의 이러한 자랑을 아무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11 내가 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아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마태 6,7-15
오늘 복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19일
박희전 루케시오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46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기

기도는 하느님께 나의 필요를 알려 드리고 그에 응답해 주시도록 설득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그분 눈앞에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는 시편의 기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139[138],1-2.4).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미 다 아신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예컨대 엄마가 필요한 것을 알아서 챙겨 주기 때문에 아이가 아무 표현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신뢰하고 또 가깝게 여기는 이들에게 하는 일상적인 말들을 하느님께도 해 봅시다. “와, 참 좋아요!” “감사해요!” “멋지네요!” “사랑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할까요?” 기도가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라면 이렇게 일상적으로 진솔하게 나누는 대화도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출발점은 ‘우리 아버지’(마태 6,9 참조)입니다. 아버지와 대화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사람은 형제들의 필요에도 응답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체험한다면 그분의 다른 자녀인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주님의 기도 전반부는 아버지께서 어떻게 해 주시기를 청하기보다는 내가 그분의 도구가 되겠다는 다짐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기]”(6,9)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이고 일차적인 사명으로, 자기 존재 안에 아버지의 얼굴을 드러내면서 그 얼굴을 믿을 만한 방식으로 그려 내는 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도를 잘하려면

“너희는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어제 말씀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어제 단식과 자선과 기도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면서 사람 앞에서 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서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기도에 대해서만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기도에 있어서 빈말이란 어떤 것이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빈말을 할 수 있을까요? 

보통 빈말이라면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만나고 싶은 마음 하나도 없으면서 한번 만나자고 하는. 빈말이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면 하느님께 어떻게 빈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느님을 아주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진심인 사람은 이럴 수 없고, 당연히 마음에도 없는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말, 또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빈말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관계부터 재정립해야 합니다. 

아무 말이나 씨불여도 되는 그런 분이 아니라 진심으로 대하고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하는 분으로 재정립해야 합니다. 그런데 재정립해야 할 관계를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 관계는 당신과 하느님과의 관계 곧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데 영광스럽게도 우리도 그런 관계를 맺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다니! 구약에서는 하느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게 했는데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다니!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도 저는 어머니로 부를 수 있게 해주셨으면 얼마나 더 좋을까 욕심도 내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 이것이 욕심이긴 하지만 제 생각에 이런 욕심은 괜찮을 것이고, 주님도 우리가 감히 이렇게 부르는 것을 허락하실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하느님이 더 따듯하고 푸근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아버지 나라가 오시고,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왜냐면 기도 특히 관상 기도는 말보다 만남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말도 중요하고 말도 많이 나누겠지만 만나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아무 말 없어도 좋고 그것이 많은 경우 더 좋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말하기 위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남 그 자체가 목적이고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서로의 사랑에 잠기기 위해서 만나는 것일 겁니다. 그러므로 거듭 강조하지만 만나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기도가 명상이나 독백이 되지 않고, 그다음에 대화를 하든 청원을 하든 뭐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기도에 대한 정의를,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바꾸고, 오늘 강론은 이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줍니다. 곧 그래서 그의 기도를 보면,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으며,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이 기도문 안에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 기도는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또한 “이 기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드리는 ‘기도의 모범’을 제시해줍니다. 곧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는 어떤 형태로든 ‘주님의 기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65)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드립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해서 맨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빠, 아버지”입니다. 곧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아버지”를 부르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입니다.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중세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를 올바르게 바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6,8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골방의 문, 주님의 기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기도는 골방에서 남이 보지 않는 가운데서 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이 말씀을 이어보면 주님의 기도가 마치 골방이 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이 지상에서 하늘로 올려줍니다. 이 지상은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이 우리 힘을 빨아먹는 곳입니다. 이 욕구가 사라져야 하느님의 음성으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욕구가 사라지려면 세속-육신-마귀가 쓸모없어지는 환경에 나를 가둬야 합니다. 그곳이 골방입니다. 예수님으로 말하자면 광야이고 저로 말하면 성체조배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더는 추구할 수 없는 환경이 되면 생각이 멈춥니다. 생각의 모든 주제는 이 삼구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오만 가지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그 욕구를 추구할 수 있는 환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강론에서 김창옥 강사가 프랑스의 한 시골 수도원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 힘을 되찾았지만, 그 이후에는 다시 그 힘을 쓸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영화 ‘해리 포터’에서 주인공 해리 포터가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방어 마법 중 하나는 ‘패트로누스 마법’입니다. 이 마법을 사용하려면 “익스펙토 패트로눔!”이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법을 발동시키는 '내면의 예식'입니다.

해리가 두려움으로 그 사람의 영혼을 잡아먹는 디멘터의 공격을 받아 절망에 빠질 때마다 행복한 기억을 떠올릴 수 없게 되면 그는 패트로누스를 불러내지 못하고 힘을 잃습니다.

힘을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절망을 이겨내고 가장 강력하고 행복했던 순간으로 자신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이는 특정한 감정적, 정신적 상태를 재현하는 것이 힘을 되찾는 결정적인 예식이 되는 훌륭한 예입니다.

저에게는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의 행복한 기억으로 돌아가게 하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할 때마다 그때의 감정으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아버지가 되시고 그 아버지께 저는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며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그때의 힘을 되돌려 달라며 양식을 청하고 그 양식이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데 사용되도록 청합니다. 무엇보다 유혹을 이기고 악에서 구해주십사 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만 가지 모르는 말로 기도하기보다는 이성으로 하는 다섯 마디로 하겠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주님의 기도를 통해 그때의 행복한 기억으로 되돌아가려 합니다. 이 과정은 꽤 오래 걸립니다. 이는 마치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성령의 불을 받기 위해 많은 작업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 그는 단순히 “하느님, 불을 내려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너진 주님의 제단을 다시 쌓고, 이스라엘 지파의 수에 맞춰 돌 열두 개를 가져오고, 제단 둘레에 도랑을 파고, 장작 위에 제물을 올린 뒤 물을 세 번이나 붓게 하는 등 매우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예식'을 거행합니다.

"엘리야는 백성에게서 받은 돌 열두 개로 주님의 이름에 따라 제단을 쌓았다." (1열왕 18,32)

이 모든 과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잊고 있던 하느님과의 계약을 상기시키고, 그분의 권능이 드러날 수 있는 '무대'를 정성껏 마련하는 행위였습니다. 이 예식을 통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웠고,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만이 참하느님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는 신앙의 회복을 위해 구체적인 예식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청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나를 하느님을 만났던 골방으로 이끌고, 사실 주님의 기도가 골방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 없이 바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일곱 가지의 청원이 나의 청원이 되도록 작업하는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고 좀 끊고 오래 머물러 계십시오. 정말 하느님이 나의 아버지라 느껴지고 마음이 평화로워지면 다음으로 넘어가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기도를 통해 다시 관상의 단계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만 번 빨리 한 주님의 기도보다 다섯 번 느리게 마음을 주며 한 주님의 기도가 저도 더 가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삶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또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릴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일에 대한 후회로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앞이 막막한 상황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그냥 포기하라고 하실까요? “왜 사니?”라면서 우리를 혼내실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속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보면 아마 이렇게 위로해 주실 것 같습니다. 

“너는 나를 배워가는 중이다.” 

이 위로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막막함, 죄책감, 후회를 벗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형편없는 성적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께서는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 드리고 부모님 도장을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형편없는 성적이어서 걱정이 한가득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 성적표를 보여 드렸을 때, 별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도장을 찍어 주시면서, “다음에는 잘할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어머니께서는 제게 배워가는 중임을 아셨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맞습니다. 우리는 모두 배워가는 중입니다. 악습을 포기하지 못한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배워가는 중이라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힘을 내어야 합니다. 그 희망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뜻에 맞게 조금씩 변화될 것입니다. 

기도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사실 지금의 사람들도 이 기도를 힘들어하지만, 당시의 유다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도는 특별한 사람, 즉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감히 기도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특히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시지요. 여기에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멀리에서 우리를 감시하시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잘못을 하나하나 챙기면서 벌 줄 준비를 하시는 하느님도 아닙니다. 오랜 시간을 기도하는 정성을 보여야 그 정성에 맞게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아버지와 같이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하는 분입니다. 

참된 기도는 ‘하느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를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배워가는 중임을 기억하면서,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하느님 뜻에 일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의 상처를 지혜로 바꾸어라 (오프라 윈프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기도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초대받습니다.

기도는 먼저 말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 기도의 중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기도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기도하신 방식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주님의 마음과 방식에 동참하라는 초대이자 자녀로서의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느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우리 일상과 인간관계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기도입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하며 1인칭 복수를 사용하는 공동체적 기도입니다. 이렇듯 개인 구원만이 아닌 공동체와 세상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삶의 방향이며 삶의 봉헌이며 삶의 결단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 안에 사는 삶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배우고 뜻을 세우는 삶을 위한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살아가는 우리의 오늘입니다.

 

 

 

마태오복음 6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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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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