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당신 메시아에게는 구원의 요새이시다. 주님,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 재산에 강복하시며, 그들을 영원히 이끌어 주소서.
주님, 저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니 저희가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사랑하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6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12,1-9)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 오늘 복음
(마태 7,1-5)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창세 12,1-9
오늘 제1독서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그 무렵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
5 아브람은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자기가 모은 재물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6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
7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8 그는 그곳을 떠나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9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 차츰차츰 네겝 쪽으로 옮겨 갔다.
마태 7,1-5
오늘 복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23일
신동민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38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나의 들보는 무엇인가요?
남을 심판하는 일은 쉽지만 남에게 심판당하는 일은 매우 견디기 힘듭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결점을 고치는 것보다 남의 결점을 판단하는 일에 더 익숙한지도 모릅니다. 남에게 내리는 판단과 단죄를 그대로 내가 받는다면 어떠할까요?
오늘 복음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남을 판단하는 기준대로 우리도 심판받을 것입니다. 심판하지 말라는 말은 이성적인 판단이나 식별을 하지 말거나 악을 단죄하는 것을 피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행동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행동에도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만 죄를 죄인과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 되듯 결점이나 실수로 사람을 규정하거나, 그것들을 사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판단은 주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형제자매의 마음으로 꼭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면 먼저 기도해야 하고, 상대의 선을 추구하는 순수한 사랑과 내 눈의 들보를 먼저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자비의 모성을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자비 없이는 ‘상처 입은’ 이들, 곧 이해와 용서, 사랑이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브라질 주교단과의 만남에서 한 연설, 2013.7.27.).
우리는 대체로 자신은 지적받고 조언받기를 싫어하면서 다른 사람의 결점은 고쳐 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형제자매들을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라고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서로 도우면서 ‘사랑하라’고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의 핵심 속성이자 그 최고 형태는 바로 ‘인내’입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오늘 가족과 공동체 생활에 방해되는 나의 들보는 무엇인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의 길을 아브람처럼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네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행복이고 그래서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것에 아무도 예외가 없고 이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무도 많은 사람이 행복하지 않거나 불행한데 왜 그런 것입니까? 그들은 행복의 길을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인생길이 행복의 길이 아니었던 겁니다. 아니면 그는 아브람처럼 행복의 길을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면 주님께서 떠나라는 길은 아니 떠나고 자기 길을 갔을 겁니다. 아니면 떠나기는 했지만 가다가 힘이 든다고 멈춰 섰을 수도 있고요.
그러나 아브람은 그 길을 떠났고 끝까지 가서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침내 복을 받고, 그 자신이 복이 되고, 복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늘 ‘아브람의 복’이라고 명명하려 하는데 그래도 되겠지요? 아시다시피 아브람이 애초에 복이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 창세기는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라고 분명히 얘기하고 있지요. 그리하였기에 복이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떠나라고 하신 대로 그리했기에 복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순종이 있고 떠남이 있습니다. 명령에 순종함이 있고 명령대로 떠남이 있습니다. 떠나기가 싫어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과 다릅니다.
‘소확행(小確幸)’ 곧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한때 유행이었는데 지금의 소확행에 안주하여 참으로 많은 사람이 떠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누리지만, 떠나야지만 얻게 되는 미래의 온전하고 완전한 행복은 받지도 못하고 얻지도 못하고 그리하여 복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야 그리 되고 복이 되는 것인데 떠나라는 말씀대로 그리하지 않았기에 복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의 작은 행복은 지금 내가 확실히 쥐고 있기에 행복하지만 주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의 행복은 아무리 완전하고 온전한 행복일지라도 그 약속 믿을 수 없고 확실치 않기에 그리하지 않고 그래서 행복하지 않은 걸까요? 아마 대부분이 그럴 겁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믿을 것입니다.
순종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순종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때 순종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복을 주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때, 복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뜻을 믿을 때, 그 뜻에 순종하고 행복의 길을 떠나겠지요? 믿음과 순종과 떠남의 행복의 길을 아브람처럼 떠나 복이 되어봅시다. 우리도.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들보를 빼내기만 하면, 다 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고 하십니다. 그래야 ‘심판을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들보’를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그것은 우선, 자기 눈 안에 있는 ‘들보’를 알아채는 일입니다. ‘들보’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방식, 곧 보는 틀, 보는 관점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이 행해지는 데 기준이 되는 ‘준거 틀’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 편견, 세속정신 등의 고정관념이라면, 바로 그것이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들보를 빼내기만 하면, 다 일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하느님의 눈과 마음’이 들어서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눈과 마음”이야말로, 바로 그것을 빼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관점, 자신의 눈’을 빼낼 수 있는 길은 바로 ‘우리 안에 심어진 사랑의 빛을 밝히는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추는 빛으로 상대를 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호의와 자비’로 상대를 보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위하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예수님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일입니다.
결국,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넘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그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그래서 <루가복음>에서는 병행구문에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결국, 심판을 넘어서는 ‘용서’와 ‘자비’야말로 바로 심판을 벗어나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
이는 타인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심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가 남에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결국, 심판은 ‘자기 얼굴에 침 뱉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러한 짓을 저지른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로마 2,3)
하오니, 주님!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7,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주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모든 이 안에서 내 죄를 발견하는 은총을 위해서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라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보통 ‘내 안의 잘못을 먼저 보라’는 가르침을 떠올립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훨씬 더 불편하고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판단하던 그 사람에게서, 바로 내 죄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 들보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자기 들보를 깨달은 사람은, 남을 향한 날 선 비판을 멈추고, 대신 눈물겨운 공감과 자비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자신의 들보를 가장 극적으로 마주하고, 그 결과 타인을 향한 시선이 완전히 바뀐 인물은 바로 다윗입니다. 그의 변화에는 두 번의 결정적인 단계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나탄 예언자를 통한 말씀의 충격’이었습니다.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 세바를 차지한 다윗은 완벽한 자기기만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나탄이 찾아와 불의한 부자 이야기를 들려주자, 다윗은 정의감에 불타오릅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짓을 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2사무 12,5).
바로 그 순간, 나탄은 그의 심장을 찌릅니다. “바로 임금님이 그 사람입니다!”(2사무 12,7). 다윗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네”(2사무 12,13)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1단계, 머리로 죄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변화, 그의 들보가 완전히 빠져나가는 두 번째 단계는 **‘압살롬을 통한 고통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맨발로 울면서 도망치는 신세가 됩니다(2사무 15,30). 그리고 마침내 그의 변화가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절정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의 후궁들을 백주 대낮에 범하며(2사무 16,22) 아버지를 모욕했던 패륜아였습니다. 그런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안도하거나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임금은 마음이 북받쳐… 울었다. …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2사무 19,1).
왜 이렇게 울었을까요? 그는 반역자 아들의 모습에서,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았던 과거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제어되지 않는 욕망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본 것입니다. 압살롬은 바로 자신의 들보가 만들어 낸 끔찍한 거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을 심판할 수 없었습니다. 남을 향한 심판과 분노가, 자기 죄와 아들의 죄를 함께 껴안는 통한의 눈물로 바뀐 순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들보가 완전히 빠져나간 사람의 시선입니다.
이처럼 자기 죄에 대한 눈물이, 타인을 향한 자비의 눈으로 바뀌는 기적은 우리 시대의 성인, 샤를 드 푸코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됩니다.
그의 첫 번째 단계 역시 ‘고해소에서 터져 나온 깨달음의 눈물’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부유한 귀족이었던 그는 젊은 시절, 신앙을 버리고 방탕한 삶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세속적 쾌락’과 ‘지성의 교만’이라는 들보가 단단히 박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위벨랭 신부님을 찾아가 논쟁을 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무릎을 꿇고 고해하십시오”라는 예상치 못한 명령이었습니다. 그 말씀 앞에서 그의 교만의 들보는 산산조각이 났고, 그는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께 돌아오는 첫 번째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짜 변화는 두 번째 단계, 곧 ‘사막에서 자신을 죽이는 긴 눈물의 시간’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는 자신의 들보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았기에,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 ‘유배길’을 떠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간 그는, 수십 년간 기도하며 과거의 자신을 죽여나갔습니다. 바로 이 시간을 통해, 그는 다윗이 압살롬에게서 자신을 보았듯, 세상 모든 사람에게서 자기 자신과 그리스도를 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일기에 이렇게 결심합니다.
“모든 사람 안에서 예수님을 보고, 모든 사람을 예수님처럼 대하기.”
바로 이 시선이, 그가 훗날 자신을 죽이러 온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습니다. 1916년 12월 1일, 총을 든 무장 괴한들이 그의 거처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푸코 성인을 죽이려던 이들이었습니다. 과거의 오만한 귀족이었다면 그들을 ‘야만인’이라 경멸하고 심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십 년의 눈물로 들보를 빼낸 그의 눈에는 그들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는 그들의 폭력과 무지 속에서, 한때 신을 모르고 쾌락과 오만 속을 헤맸던 자기 자신의 과거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그들을 ‘적이 아니라, 아직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불쌍한 형제’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의 ‘보편적 형제’가 되고 싶습니다.”
그가 순교의 순간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옛 죄를 발견하고, 그들을 심판의 대상이 아닌 사랑해야 할 형제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들보가 완전히 빠진 사람의 마지막 시선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가장 판단하고 미워하는 그 사람에게서, 당신 자신의 약하고 추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배우자의 그 꼴 보기 싫은 모습에서 나의 이기심을, 나를 화나게 하는 동료의 교만함에서 나의 숨겨진 교만을, 자녀의 그릇된 욕망에서 나의 세속적인 가치관을 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직 우리 눈의 들보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주님께 청합시다.
“주님, 제 눈을 열어주시어, 제가 가장 단죄하던 바로 그 사람 안에서 제 자신의 죄를 보게 하소서.리하여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다윗의 눈물과 푸코 성인의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예전에 어느 신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너의 글에는 깊이가 없어.”
상처를 받았습니다. 나름으로 열심히 묵상해서 쓴 글인데, 더구나 신자들이 어렵지 않게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쉽게 쓴다고 쓴 것인데 이를 깊이 없다고 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역시 그 신부를 비판하고 싶었습니다. ‘너는 얼마나 깊이가 있는데?’라고 말이지요.
독일 작가 파트리트 쥐스칸트의 책 내용이 생각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화가는 자기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깊이 없다는 말에 큰 상처를 받고 매일 고민하게 됩니다. 그 깊이를 만들려고 정말로 노력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깊이가 없다며 비판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화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뒤에 이 화가가 지나친 강박을 가지고 있다면서 또 다른 비판을 했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를 전혀 모르면서 말이지요.
깊이가 무엇일까요? 수영장에 가면, 누구는 깊은 곳에서 또 누구는 낮은 곳에서 수영을 즐깁니다. 자기 수준에 맞는 깊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영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제일 깊은 곳에서 수영하면 어떨까요? 위험한 상황을 접하게 됩니다. 즉, 자기 수준에 맞는 곳에서 수영하는 것이 가장 옳은 선택이 됩니다.
“나의 깊이는 낮다.”라고 인정하면 편해집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나의 비판도 생기지 않습니다. 예전에 누가 상대방에 대해 비판하면 친구들과 서로 웃으며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네 똥 굵다.”
맞습니다. 비판받았다고 해서 억울할 필요가 없고, 또 비판받았다고 해서 비판으로 맞대응할 필요도 없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입니다. 나는 그냥 나답게 낮은 깊이로 살면 그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고 하십니다. 이 심판은 단순한 의견이나 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단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이렇게 심판한다면,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향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야.”(마태 7,5)
남을 쉽게 판단하거나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성찰하면서, 타인에게 사랑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편안한 삶을 살면서 지금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지금의 삶은 지난날 당신이 한 생각이 현실에 반영돼 나타난 결과물이다 (론다 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들보는 우리 자신이 보지 못한 교만과 위선입니다. 들보를 뺄 때 마음의 눈이 열립니다. 깨끗한 눈으로 바라보는 자기성찰이 중요합니다. 이렇듯 판단보다 성찰이 먼저입니다. 성찰 없는 심판은 위선입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비판보다는 회개와 변화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 또한 완전하지 않기에 타인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을 심판하기는 쉬워도 하느님의 자비를 닮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또한 용서가 필요한 죄인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이의 부족함을 지적하기보다는 먼저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내린 심판이 우리를 향해 되돌아올 것입니다. 심판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가 변화될 때 관계도 치유됩니다. 들보는 치유라는 뉘우침 없이는 빠지지 않습니다. 남의 잘못이 아닌 우리 자신을 먼저 직시하는 용기가 중요합니다. 내 안의 들보를 뺄 때 사랑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들보는 결코 겸손을 이길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6/22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6.22 |
---|---|
25/06/21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6.21 |
25/06/20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6.20 |
25/06/19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2) | 2025.06.19 |
25/06/18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6.18 |
25/06/17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6.17 |
25/06/16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6.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