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1일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19,15-29)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 오늘 복음
(마태 8,23-27)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창세 19,15-29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그 무렵
15 천사들이 롯을 재촉하며 말하였다. “자, 소돔에 벌이 내릴 때 함께 휩쓸리지 않으려거든, 그대의 아내와 여기에 있는 두 딸을 데리고 어서 가시오.”
16 그런데도 롯이 망설이자 그 사람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주님께서 롯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17 그들은 롯의 가족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 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
18 그러나 롯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리,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19 이 종이 나리 눈에 들어, 나리께서는 이제껏 저에게 하신 것처럼 큰 은혜를 베푸시어 저의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재앙에 휩싸여 죽을까 두려워, 저 산으로는 달아날 수가 없습니다.
20 보십시오, 저 성읍은 가까워 달아날 만하고 자그마한 곳입니다. 제발 그리로 달아나게 해 주십시오. 자그마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 목숨을 살릴 수 있겠습니다.”
21 그러자 그가 롯에게 말하였다. “좋소. 내가 이번에도 그대의 얼굴을 보아 그대가 말하는 저 성읍을 멸망시키지 않겠소.
22 서둘러 그곳으로 달아나시오. 그대가 그곳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내가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리하여 그 성읍을 초아르라 하였다.
23 롯이 초아르에 다다르자 해가 땅 위로 솟아올랐다.
24 그때 주님께서 당신이 계신 곳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25 그리하여 그 성읍들과 온 들판과 그 성읍의 모든 주민, 그리고 땅 위에 자란 것들을 모두 멸망시키셨다.
26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27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가 주님 앞에 서 있던 곳으로 가서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들판의 온 땅을 내려다보니, 마치 가마에서 나는 연기처럼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29 하느님께서 그 들판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롯이 살고 있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롯을 그 멸망의 한가운데에서 내보내 주셨다.
마태 8,23-27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무렵
23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24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27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1일
김덕재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15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어부 출신이 많았기에, 그들은 호수의 거친 풍랑과 그것을 헤쳐 나가는 체험을 수없이 많이 하였을 것입니다. 풍랑이 일었을 때 잘해 나갔고 자신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풍랑을 이길 수 없으며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죽음에 마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25).
그래서 예수님께 외쳤습니다. 목수이시기에 뱃일을 모르실 분이지만 그분의 능력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에,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고서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우리 인생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곧 위기와 죽음의 순간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를 둘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풍랑이라는 위기의 순간을, 신뢰를 가르치시는 소중한 순간으로 여기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8,26) 그분께서는 말로만 가르치시지 않고 행동으로도 가르치셨습니다. 풍랑 속에서 주무실 수 있었던 이유도 당신을 지켜 주시는 하느님을 온전히 믿으셨기 때문이며 배를 저어 가는 제자들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였겠지만, 나중에 이 사건을 떠올렸을 때 깨달았을 것입니다. 또한 부족한 믿음의 청원에도 응답해 주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북돋아 주신 예수님의 배려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의 지난 시간을 기억하면서, 또 부족한 믿음이지만 그럼에도 주님께 간구하는 우리의 청원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도 자라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꾸짖음 당하지 말고 꾸짖는
오늘 주님께서는 두 번 꾸짖으십니다. 하나는 큰 풍랑에 겁을 내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에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분은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이런 주님을 보고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꾸짖음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진정한 꾸짖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꾸짖을 줄도 모르고 잘 꾸짖을 줄은 더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꾸짖을 줄 모르고 싫어하면서도 꾸짖음을 당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꾸짖음을 당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합니까? 그런데 또 얼마나 자주 꾸짖음을 당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꾸짖음 당할 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들에게서 꾸짖음 당할 짓도 하지 말아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주님으로부터 꾸짖음 당할 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선제적으로 "자기 꾸짖음"을 해야 합니다. 남이 꾸짖기 전에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꾸짖으시기 전에. 겁내지 말아야 할 것을 겁내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꾸짖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겁내지 말아야 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까? 바퀴벌레나 지렁이를 두려워한다면 그런 나를 꾸짖어야 합니다. 말이 됩니까? 그까짓 바퀴벌레나 지렁이를 두려워하다니요. 어둠을 두려워한다면 그런 나를 꾸짖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큰 풍랑을 두려워했다고 제자들을 꾸짖으셨는데 그까짓 어둠을 가지고 두려워한다니 그것이 말이 됩니까? 사람들의 비판을 두려워한다면 그런 나를 꾸짖어야 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면 그런 나도 꾸짖어야 합니다.
칭찬과 성공만 있어야 한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살다보면 욕도 먹고 실패도 해야 하는데. 그런데 두려워하는 자신도 꾸짖어야 하지만, 믿음이 없는 자신을 더 꾸짖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면서 믿음이 없기에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믿음 중에서 자신감 없음 곧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도 꾸짖어야 할 것이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자신을 우리는 더더욱 꾸짖어야 합니다.
사실 자신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되니 자신에 대한 믿음은 없을 수도 있지만 신앙인에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믿음의 근거가 되는 믿음이니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근거로 이제 두려움을 주는 것들을 꾸짖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아무것도 아니니 그 어떤 것도 '까짓것'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사랑이시고 또 우리를 사랑하시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악들은 악도 선이라고 믿으며 '까짓것' 할 수 있고 그래서 너까짓 것들 썩 물러가라 꾸짖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꾸짖음 당하지 말고 꾸짖는 사람 되기로 오늘 결심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앞 장면>에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도 그 배에 오르시어 동행하십니다.
사실, 배는 항구에 매여 있을 때 안전하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항구에 가만히 정박해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항해하라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항해하면 당연히 풍랑을 만나고 표류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공동체)라는 ‘배’, “가정”이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런데 ‘배’ 안에 그분이 함께 계시는데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세시풍랑에 배가 휘청거릴 때도 있고, 방향을 잃고 헤맬 때도 있고, 위험에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도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킬 수 있으시지만, 그 풍랑 속에서도 잠들어 계십니다. 바로 이때가 ‘우리가 눈을 떠야 할 때’입니다.
마치 물고기들이 맘껏 물속을 헤엄쳐 다니면서도 물 밖에 나와 숨을 깔딱거리면서야 비로소 자신이 헤엄칠 수 있었음은 물이 있는 까닭이었음을 알게 되듯이, 새들이 맘껏 하늘을 날다가도 새장에 갇혀서야 하늘이 있어서 날 수 있었음을 알게 되듯이, 그렇게 우리는 풍랑을 맞고 가라앉으면서야 비로소 내가 키잡이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물결이 들이치고 배가 흔들려도 분명,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그분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주무셔도 주님이시요 깨어 계셔도 주님이신 그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이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나야 할 이는 그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분이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이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키잡이십니다. 그러니, 이제 결코 겁낼 일은 없습니다.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순수한 ‘의탁’과 ‘신뢰’입니다. 곧 그 속에서 함께 하시는 그분께 의탁하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오늘도 그분께서는 배가 하늘항구에 닿기까지 우리를 이끄시고 동반하십니다. 단지 동반하실 뿐만 아니라 배를 운전하십니다. 그분은 주무셔도, 깨어 계셔도 우리의 키잡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죽으면서도 인류를 구원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8,27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
당신은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시지만,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고통과 수난을 몸소 겪으시지만,
온갖 질병을 고치시는 분
못에 박히고 창에 찔려 죽임당하지만,
부서진 뼈와 마음의 상처를
새롭게 하고 죽은 이마저 살리시는 분
잠들어 계서도 깨어 계서도
저의 키잡이이신 당신이
진정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신앙의 가장 완전한 계기판은 두려움의 감정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운전을 하거나 차를 타본 경험이 있습니다. 운전석 앞에는 속도계, 연료계, 엔진 온도계 등 수많은 계기판이 있습니다. 이 계기판을 보고 우리는 차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습니다. 만약 계기판이 없다면, 혹은 고장 났는데도 무시하고 달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계기판’ 하나를 알려주십니다. 바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입니다. 거친 풍랑에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자, 제자들은 공포에 질려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주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구해 주십시오!”(마태 8,25)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측정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아, 왜 두려워하느냐?”(마태 8,26)
계기판을 갖지 못해 자신의 상태를 모르고 살다가 파멸에 이른 사례는 역사 속에도 존재합니다. 17세기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2세는 막강한 해군력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전함 '바사(Vasa)호'의 건조를 명했습니다.
왕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설계보다 더 많은 대포를 싣기 위해 배에 2층짜리 포갑판을 만들도록 지시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위용을 자랑하는 배였지만, 조선 기술자들은 배의 무게중심이 너무 높아져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마침내 배를 띄우기 전, 안정성 테스트를 했습니다. 30명의 선원이 갑판 위를 뛰어다니는 간단한 시험이었는데, 배는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명백한 ‘계기판의 경고등’이 켜진 것입니다. 책임자는 시험을 중단시켰지만, 왕의 진노가 두려워 이 위험 신호를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1628년 8월 10일, 수많은 환호 속에 바사호는 위풍당당하게 첫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항구를 떠나 불과 1,300미터도 나아가지 못해 작은 돌풍을 만나 그대로 옆으로 넘어져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라는 ‘왕의 진노’가 두려워서, 혹은 내 안의 교만과 욕심 때문에 영혼의 계기판이 보내는 경고등, 즉 ‘두려움’의 신호를 애써 무시합니다. 작은 시련에도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는 ‘안정성 테스트’를 겪으면서도 괜찮은 척, 강한 척하며 항해를 계속합니다. 이 경고를 무시하면, 우리의 영혼은 바사호처럼 세상의 작은 돌풍에도 힘없이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두려움은 결국 나를 믿는 데서 발생합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나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는 능력 있는 분이심을 믿으면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게 잘 됩니다.
1970년, 인류의 세 번째 달 착륙을 목표로 출발했던 아폴로 13호는 우주 비행 역사상 가장 극적인 실패이자 가장 위대한 성공으로 기록됩니다. 달로 향하던 고요한 우주의 심연에서 “휴스턴, 문제가 생겼다”는 다급하지만, 차분한 무전이 들려왔습니다.
산소 탱크가 폭발하면서 우주선은 생명 유지 장치가 망가진 차가운 깡통으로 변해버렸고, 세 명의 우주인은 지구에서 32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고립되었습니다. 달 착륙이라는 원대한 목표는 순식간에 ‘지구로의 생환’이라는 절박한 사투로 바뀌었습니다.
그 순간 우주인들이 깨달은 것은 명확했습니다. 그 광활하고 차가운 우주에서 기댈 곳은 오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저 멀리 보이는 푸른 점, 지구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지식과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지구의 관제센터를 신뢰하고, 그들의 지시에 온전히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지구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휴스턴의 관제센터에 모인 수백 명의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은 잠도 자지 않고 밥도 잊은 채, 오직 세 명의 우주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지성과 에너지를 쏟아부었습니다. 그들은 고장 난 우주선과 똑같은 모형을 만들어 해결책을 찾고,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밤을 새워 계산했습니다. 온 지구의 시선이 그 작은 우주선에 집중되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세상 속에 파견된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사명을 안고 이 세상에 왔지만, 예기치 않은 인생의 폭발 사고를 만나 길을 잃고 절망에 빠지곤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주에 홀로 남겨진 듯한 공포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다 당황하고 좌절합니다.
하지만 오늘 아폴로 13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의지할 곳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이 세상에 파견하신 분,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말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리스도께서는 휴스턴의 관제센터처럼 우리의 모든 여정을 지켜보시며,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무사히 귀환시키기 위해 당신의 모든 사랑과 은총을 쏟아붓고 계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 4,18)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의 사랑이 채워져야 할 공간이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믿음이 약하다는 부끄러운 증거가 아니라, 지금 바로 주님께 나아가야 할 때임을 알려주는 고마운 신호입니다. 두려움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나를 알고 주님을 알아, 자신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임을 인식하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어떤 사람이 동네 호수로 수영하러 나갔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수영했던 곳이라 아주 익숙한 곳이었지요. 그리고 이곳은 서서히 깊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얼마만큼은 걸어갈 동안 물이 얕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발 걷다가 갑자기 깊어지면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물 깊이는 이 사람의 키를 훌쩍 넘었는데, 더 당황스러운 일은 발이 물속의 진흙과 같은 수렁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허우적거리면서 물 밖으로 나오려고 했지만, 진흙 덩어리에서 도저히 발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이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요? 이 사람은 물 위로 올라오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진흙에 박혀 있는 발 주위를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발은 자유로워졌고 비로소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떻게든 위기 밖으로 빠져나오려고만 하지 않습니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그대로 놔둔 채 말입니다. 자연히 빠져나올 수 없고,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맙니다. 고통과 시련을 동반하는 위기가 찾아올 때, 오히려 그 위기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문제의 실마리는 자기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었습니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출발점에 서지 않으면 실격 처리가 되어 경기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고통을 동반하는 긴장과 두려움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여야 자기 경기에 제대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고통 속의 의미를 창출하는 작은 발걸음을 우리는 ‘변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는 기적 이야기를 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 탔는데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만 계십니다. 급한 제자들은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25)라면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제자들은 풍랑으로 배를 제어할 수 없었고 이를 죽음과 연결했던 것입니다. 이 고통과 시련을 끝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왜 겁을 내느냐?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문제 해결의 시작은 믿음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찾아온다고 죽음을 연결하며 끝이라 생각하면 안 되었습니다. 그 모든 고통과 시련을 거뜬하게 해결하실 수 있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먼저였던 것입니다. 그때 겁 내지 않고, 주님처럼 평안할 수 있게 됩니다.
인생의 풍랑과도 같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의 명언
성공한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라(알버트 아인슈타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새로운 달 새로운 은총으로 7월이 열립니다. 창조 질서 안에서 자연이 먼저 주님을 알아보고 복종합니다. 혼란과 두려움이라는 풍랑을 평화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믿음은 풍랑 속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이끄십니다. 믿음은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단련과 성장을 반복하는 여정입니다.
풍랑 가운데서도 함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진정한 평화는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내적 평화입니다. 시련 속에서 드러나는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풍랑은 은총의 시작점이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직면하며 하느님의 자비에 더욱 의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심을 진실로 믿습니다. 풍랑이 사라져야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평화이며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는 은총의 오늘 되십시오. 풍랑은 우리 힘이 아닌 하느님께 의지해야 함을 깨닫는 은총입니다.
마태오복음 8장 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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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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