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21,5.8-20)
저 여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사악과 함께 상속을 받을 수는 없어요. - 오늘 복음
(마태 8,28-34)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다.
창세 21,5.8-20
오늘 제1독서
저 여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사악과 함께 상속을 받을 수는 없어요.
5 아브라함에게서 아들 이사악이 태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백 살이었다.
8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게 되었다. 이사악이 젖을 떼던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9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가르가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10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세요. 저 여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사악과 함께 상속을 받을 수는 없어요.”
11 그 아들도 자기 아들이므로 아브라함에게는 이 일이 무척이나 언짢았다.
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와 네 여종 때문에 언짢아하지 마라. 사라가 너에게 말하는 대로 다 들어주어라.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13 그러나 그 여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14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가져다 하가르에게 주어 어깨에 메게 하고는, 그를 아기와 함께 내보냈다. 길을 나선 하가르는 브에르 세바 광야에서 헤매게 되었다.
15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지자 그 여자는 아기를 덤불 밑으로 내던져 버리고는,
16 활 한 바탕 거리만큼 걸어가서 아기를 마주하고 주저앉았다. ‘아기가 죽어 가는 꼴을 어찌 보랴!’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아기를 마주하고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17 하느님께서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그래서 하느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가르를 부르며 말하였다. “하가르야, 어찌 된 일이냐?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저기에 있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18 일어나 가서 아이를 들어 올려 네 손으로 꼭 붙들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9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 하가르의 눈을 열어 주시니, 그가 우물을 보게 되었다. 그는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우고 아이에게 물을 먹였다.
20 하느님께서는 그 아이와 함께 계셨다. 그는 자라서 광야에 살며 활잡이가 되었다.
마태 8,28-34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28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29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30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31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33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34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2일
김동일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57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성공과 실패를 보시기보다 오직 하느님 뜻만을 보시는 예수님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산 사람들의 땅에서 살지 않고 죽은 이들의 땅에서 살아갑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폭력적이라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고립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자와 다름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주십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러 오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마귀들의 저항이 아주 거셉니다. 마귀의 특징은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 의지가 확고하여 이를 거역할 수 없음을 눈치챈 마귀들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원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십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마귀들의 청을 들어주시는 것 같아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의 자기 파괴적인 속성을 아시기에 그들의 선택이 결국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도록 내버려두십니다. 곧 죽음과 악한 영의 자리로 여겨지는 무덤에서, 그들이 머무르기에 적당한 동물인 불결한 돼지 떼로, 그다음에는 마귀들의 힘이 있는 곳으로 여겨지는 바다로 가게 됩니다. 결국 돼지들이 물속에 빠져 죽으면서 마귀들도 함께 죽거나 그 파괴적인 힘을 잃게 됩니다.
유다 지방과 달리 이방인 지역에서는 돼지를 키웁니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에서도 이처럼 참된 구원자로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구원 활동이 우리 눈에는 실패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치유된 두 사람은 예수님께 어떠한 감사도 표현하지 않을뿐더러 온 고을 주민들은 예수님께 떠나가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공과 실패를 보시기보다 오직 하느님 뜻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와 구원의 활동을 계속해 가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이승 마귀와 저승사자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이르셨을 때 무덤에 있던 마귀 들린 사람 둘이 주님께 마주나옵니다.
왜 마주나왔을까요? 마중 나온 것일까요? 주님을 환영하고 영접하기 위해서? 그런데 마주나와서 해대는 말을 보면 마중 나온 것이 아닌 곧 환영하기 위함도 아니고 영접하기 위함도 아닌 항의 조입니다.
때도 되지 않았는데 왜 오셨냐고 따지고 있지 않습니까? 약속 또는 예정보다 일찍 데리러 온 저승사자 대하듯 하잖습니까? 그리고 구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괴롭히러 오신 분으로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들은 이승을 떠나기 싫은 자기들을 억지로 저승으로 끌고 가는 저승사자로 주님을 여기고 있습니다.
사실 마귀란 저승을 싫어하고 이승을 너무도 좋아하고 집착하는 존재라는 면에서 어쩌면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도 어쩌면 하느님 나라를 저승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계신 곳이 아니라 이승이 아닌 저승으로, 곧 이 세상이 아닌 저세상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라도 하느님 나라가 저승이라면 가기 싫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저승사자와 같이 산다면 더더욱.
그런데 찬찬히 뜯어보면 저승이든 하느님 나라든 우리가 가기 싫은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저승에 가기 싫은 것이 아니라 이승을 떠나기 싫은 것이고, 이승을 떠나기 싫은 것은 저승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곳인 데 비해 이승은 내가 너무 잘 알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행 가는 것이라면 몰라도 낯선 곳에 가는 것을 우리는 무척 싫어하잖아요? 사실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잠시 바람 쐬는 것이기 때문이고, 영원히 머물 내 집, 편안한 내 집, 곧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승이나 천국 Tour(여행)를 한다면 즉시 가겠다는 지원자가 많을 것이고, 그곳을 안내하는 사람을 가이드라고 하지 저승사자라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승을 너무도 애착하는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기 싫은 제일 큰 이유는 역시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우리가 아직 맛보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우리가 이미 맛보고 깨달았다면 하느님께로 데려가시려는 주님을 저승사자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데려가시려고 오신 것을 괴롭히기 위해 오셨다고 생각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아직 맛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사람, 그래서 하느님께로 가기 싫어하고 데려가시려는 주님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이승 마귀이고 그런 사람에게 주님은 저승사자이십니다. 그래서 나와 주님 관계가 아직은 이승 마귀와 저승사자의 관계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주님만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이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다라인들 지방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호수를 건너왔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마귀 들린 이들은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바다의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사실, 당시에 마귀들과 악령들이 추방되는 사건은 종말의 표징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마태 8,29)라는 마귀들의 외침은 종말의 때가 되기 전에는 당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느냐고 예수님께 항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시면서 종말의 때가 왔음을 드러내십니다. 동시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혹 우리도 하느님께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나를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우리 안에 누가 있어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사실, 우리 안이 빛이라면 빛을 반겨 맞아들일 것이고, 어둠이라면 어둠을 반겨 맞아들일 것입니다. 마귀 들린 이는 자신 안에 마귀를 받아들인 까닭일 것이요, 우상숭배에 빠진 이는 우상을 받아들인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생각이라는 우상’에 빠진 이는 자기 자신의 이기와 편리를 따르기 마련일 것입니다. 그래서 돼지를 치던 이들은 거룩한 권능을 보고 오히려 달아납니다. 그리고 그 고을 주민들은 예수님을 보고 자기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돼지 떼’가 판치게 방치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은총을 반겨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빛을 밝혀드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을 품고 말씀의 빛을 밝혀드는 일입니다. 빛이신 주님만이, 사랑이신 주님만이 우리 안에서 어둠을 몰아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더러워져 있어 주님을 맞아들이기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 겸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러워져 있기에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겸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 살지 아니하고,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8,34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진정, 제가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감사일기를 쓰는 이들이 심판을 이기게 되는 이유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얼마 전 제게 한 형제님이 찾아오셨습니다. 50년 동안 신앙을 멀리하고 지내셨는데,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그 긴 세월 만에 처음으로 고해소에 오신 분이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죄를 고백하신 그분은, 성사를 마친 뒤 제게 조심스럽게 물으셨습니다.
“신부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는 평생 이해가 안 됐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이 세상에는 이토록 끔찍한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 겁니까?”
이 질문 안에는 커다란 상처가 담겨 있었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악의 존재가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거나, 혹은 계시더라도 우리가 믿는 것처럼 선하고 자비로운 분은 아닐 것이라는 깊은 원망이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 질문은 바로 오늘 우리가 복음 안에서 마주하는 근본적인 신비, 곧 ‘하느님의 친절하심이 어떻게 인간의 본색을 드러내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 둘을 만나십니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을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치유하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마귀들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저희를 내쫓으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마태 8,3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라.” (마태 8,32) 하고 허락하십니다.
자, 이 지점을 깊이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의 이 자비로운 행위는 가다라 지방에 두 가지 현실을 동시에 가져왔습니다. 하나는 눈부신 ‘선(善)’입니다. 마귀 들렸던 이들이 온전해졌고, 이제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 없이 그 길을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끔찍한 ‘악(惡)’입니다. 마을의 소중한 재산인 돼지 이천 마리가 몰살당하는 경제적 파탄을 맞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이처럼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라는 ‘선’과, 돼지 떼라는 재물의 상실이라는 ‘악’을 동시에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피할 수 없는 선택지 앞에서 가다라 사람들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구원의 기쁨보다 당장의 물질적 손해에 더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목소리로 예수님께 “저희 지방을 떠나 주십시오.” (마태 8,34) 하고 애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선과 악을 함께 제시할 때, 우리가 무엇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지, 무엇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본질이 결정됩니다.
이 신비는 인류의 시작부터 함께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에덴동산에 뱀이 들어오도록 허락하셨을까요? 그 전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와에게 주어진 것은 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곁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었고, 에덴동산의 모든 행복이 있었으며, 사랑하는 아담이 함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충만한 ‘선’과 함께, 뱀으로 상징되는 ‘악’의 가능성을 함께 두셨습니다. 이는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선택의 자유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선을 누리며 그분께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뱀의 유혹에 넘어가 그 모든 것을 잃을 것인가. 그 선택의 기로에 인간을 세우신 것입니다.
구약의 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탄에게 “좋다, 그의 소유물은 모두 네 손에 넘겨주겠다.” (욥 1,12) 하시며 시험을 허락하셨을 때, 욥은 모든 것을 잃는 재앙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재앙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 안에는 그동안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던 모든 좋았던 날들에 대한 기억과 감사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시옵소서.” (욥 1,21) 하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하느님의 자비가 베푸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보며, 우리가 뱀의 본성, 곧 세상 것에 집착하는 옛 본성을 버리고 새로운 본성을 선택하도록 주어진 기회의 장입니다.
여기에 한 늙은 시계공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회중시계를 목숨처럼 아꼈습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가게에 들어와 그 시계를 훔쳐 달아나다 곧바로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경찰은 시계공에게 이 젊은이를 고소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시계공은 절망과 분노에 찬 젊은이의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오해가 있었습니다. 이 시계는 제가 이 젊은이에게 팔기로 한 것입니다."
시계공의 자비는 젊은이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주었습니다. 하나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라는 선물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양심을 뒤흔드는 ‘부끄러움’이라는 짐입니다. 이제 이 선물과 짐을 동시에 짊어진 젊은이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선택하게 될까요? 시계공의 친절은 젊은이의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시험이자, 그의 본질을 드러낼 기회가 되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가 은식기를 훔친 장발장에게 "내가 준 촛대는 왜 가져가지 않았소?"라며 더 큰 자비를 베푸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 자비는 장발장에게 정직한 인간으로 살 기회라는 ‘선’과, 그 은혜에 평생 빚진 자로 살아야 하는 ‘무게’를 함께 주었습니다. 그가 위대한 인간이 된 것은 그 무게를 외면하지 않고 평생 짊어지고 갔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가다라 사람들과 욥 사이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기쁨과 안전이라는 선물은 당연하게 여기고, 내게 닥친 손해와 아픔만 바라보며 교만으로 하느님을 떠나는 가다라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내 삶에 주어진 기쁨과 슬픔, 선물과 시련 모두를 끌어안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신뢰하며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려는 욥이 될 것인가?
어느 시골 마을에 물지게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두 개의 항아리에 물을 길어 날랐는데, 그중 하나는 금이 간 항아리였습니다. 금이 간 항아리는 늘 주인에게 미안해했습니다. “주인님, 제 탓에 물이 새어 늘 절반의 수고밖에 갚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자 주인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길가를 보아라. 네가 물을 흘리는 그 길가에만 예쁜 꽃들이 피어나지 않더냐? 나는 너의 그 흠을 알았기에 그곳에 꽃씨를 심었고, 너는 매일 그 꽃들에게 물을 주었던 것이다.”
자비로운 분이 하시는 일은 꼭 나쁜 것만 남기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것도 반드시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찾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 노력해야 심판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일기를 매일 써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악과 고통이라고 여기는 ‘금 간 틈’이, 어쩌면 하느님께서 이 땅에 생명의 꽃이라는 ‘선’을 피우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자비의 통로일지 모릅니다. 우리 삶에 주어진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택의 기회요 선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기꺼이 주님을 선택하는 한 주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다.
강론이나 강의 때, 제 어렸을 적의 일을 이야기합니다. 이 모습에 사람들은 어떻게 어렸을 때의 일을 그렇게 많이 기억하느냐고 묻습니다. 머리가 좋아서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데도 잘 기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회에서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매우 똑똑하고 능력도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의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공부하느라 바빠서 다른 기억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신없이 앞으로만 뛰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부모님께서 공부를 그리 강조하지 않으셨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신학교에 들어가 묵상과 성찰을 통해 어렸을 적의 기억을 찾을 수가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매일을 소중하게 바라보는 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너무 바쁘게 사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묵상 그리고 성찰을 통해 순간의 삶을 다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일상이 되지 않기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은 실제로 빨리 변합니다. 제1차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이 나왔고 이로써 도심화와 기계화가 이루어져 배송, 운송, 유통이 획기적으로 빨라졌습니다. 제2차 산업혁명은 전기의 발명으로 모든 것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제3차 산업혁명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되면서 가상의 세계가 등장합니다. 지금을 사는 제4차 산업혁명은 인공 지능 혁명으로 등장합니다.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이 안에 사는 사람도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냥 살고 있을 뿐입니다. 당연히 사람답지 못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십니다. 이 지역은 갈릴래아 호수 동쪽의 이방 지역이며, 율법에서 부정한 곳으로 여겨지는 곳이었습니다. 부정한 동물로 취급받던 ‘돼지 사육’이 이를 상징합니다. 더군다나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옵니다. 무덤은 죽음과 부정함의 공간이며, 그곳에 산다는 것은 사회적, 영적 고립을 상징합니다. 악의 힘에 지배받는 상태에서는 사람답지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저희를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마태 8,11)라고 말하는데, 이는 예수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또 예수님에게 절대적인 힘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귀들이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간 뒤, 온 돼지 떼가 호수에 빠져 죽고 맙니다. 마귀 들린 사람 둘의 근본적인 해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힘을 통해서만 사람답지 못한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나오는 그 고을 주민들의 모습처럼 경제적 손실(돼지 떼 손해)에 더 민감합니다. 자기들에게 떠나달라고 하면서 참삶의 길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창조물로써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이 되고 싶었던 어떤 존재가 되기에는 지금도 절대 늦지 않았다 (조지 엘리엇).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악령들조차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합니다. 악은 거룩함을 두려워합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우리의 어둠을 드러내고 쫓아냅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숨을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개입을 거부하지 않는 것이 참된 정화입니다. 거룩함은 내가 아닌 하느님 중심으로 사는 삶입니다.
거룩함은 완벽함이 아니라 계속 정화되어 가는 여정입니다. 이렇듯 악령추방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능력이 이 땅에 임했다는 표지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힘은 우리 힘이 아닌 예수님의 힘에서 나오는 하느님 나라의 현존입니다. 악령들도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그분을 사랑하거나 믿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자체가 죄와 죽음 악의 세력을 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분을 진짜 사랑해야 제자가 됩니다. 삶을 바꾸는 것은 사랑의 봉헌입니다.
어둠은 빛 앞에서 숨을 수 없고 악은 예수님의 현존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말과 시선과 마음을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마태오복음 8장 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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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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