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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7/14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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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7월 14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탈출 1,8-14.22)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다.

  • 오늘 복음
    (마태 10,34─11,1)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탈출 1,8-14.22
오늘 제1독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다.

그 무렵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9 그가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 

10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고,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원수들 편에 붙어 우리에게 맞서 싸우다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릴 것이다.” 

11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강제 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려고 그들 위에 부역 감독들을 세웠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되었다. 

12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13 그리하여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14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 

22 마침내 파라오가 온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0,34─11,1
오늘 복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14일
강태현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3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참된 평화는 악과 공존할 수 없다.

오늘 복음처럼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는 말씀을 접하면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자주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오히려 그분께서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으며 심지어 그 칼이 가족까지도 갈라놓는 도구가 되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이고 충만한 삶을 의미하며 진실을 감추고 겉으로만 분쟁이 없는 상태의 세상적 평화와는 다릅니다. 참된 평화는 악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예언자들이나 성인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사회악을 거침없이 드러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그분을 단죄하는 무리가 생기는가 하면 그분께서 참예언자이시기에 기뻐하는 무리도 생깁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둘로 갈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칼은 폭력의 상징이 아니라 분리의 상징으로서 무엇이 참되고 구원인지, 무엇이 거짓이고 파멸인지를 구별해 줍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어 생명을 주는 생각과 인간을 해치는 생각을 분별하게 합니다. 모호한 태도를 지니지 않게 하고 언제나 결단을 내리게 합니다. 듣는 이가 하느님을 선택하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것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라는 숨은 동기 때문에, 결단을 요구하는 하느님 말씀을 겉으로만 듣고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거짓 평화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공동체 안에서 거짓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 아니면 참평화를 위하여 분열과 반대도 기꺼이 떠맡는 그분의 제자로 살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 사랑이 사랑의 큰 바다에 이르도록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주님께서는 우리 부모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기를 진정 바라실까? 다시 말해서 부모를 당신보다 덜 사랑하기를 바라실까? 구약의 하느님처럼 질투하시는 주님이시라는 말일까? 이것이 오늘 주님 말씀을 묵상하다가 제기된 의문인데 오늘 주님 말씀은 진정 어떤 뜻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결코 질투하시는 분이 아닐 것입니다. 질투하시는 주님이실지라도 우리의 인간적인 질투와는 다른 뜻일 겁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질투는 욕심 곧 애욕이고 그것도 당신 혼자 차지하려는 독점적인 애욕이지요.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부모 사랑을 혼자 차지하려는 것과 같은. 그러나 당신을 자신보다 그리고 부모보다 더 사랑하라고 하심은 당신 욕심 아니고 우릴 위한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을 더 사랑하고, 만유 위에 당신을 사랑하라 하시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정 사랑한다면 부모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나 자신보다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물이 어디에 갇히지 않고 큰 바다에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물이 어디에 갇혀있으면 썩게 되고, 더 좁은 곳에 갇힐수록 더 빨리 썩게 되고 결국 죽은 물이 됩니다. 사랑이 내 사랑에 갇히면 사랑이 아닐뿐더러 금세 죽은 사랑이 되고, 가족 사랑에 머물면 자기 사랑에 갇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더 사랑하라는 것은 좁고 작은 사랑을 극복하고 넓고 큰 사랑에 물줄기를 대라는 것이며 그래서 나의 사랑이 모든 사랑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사랑은 모든 사랑이 흘러나오는 곳이며 모든 사랑이 흘러들어 모든 사랑을 이루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린 마르지 않는 사랑의 원천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고, 받은 그 사랑으로 갖가지 모든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위해 이웃을 사랑하고, 나를 위해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칼을 주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사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그를 수술할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병든 몸에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 해서 결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듯, 병자는 칼로 병을 도려내는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칼이야말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이요, ‘말씀’을 이루기 위한 쌍날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내 칼을 받아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선사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목에 칼을 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는 칼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이요,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평화로운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 곧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참 행복선언”을 선언하는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강론, 2013.11.15) 

하오니, 주님! 저희에게는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을 할 수 있는 예리한 칼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 심장에 당신의 칼을 꽂으시어 저희를 살리소서!

오늘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0,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주님!
아침처럼 어김없이 찾아온 당신을 
지나가는 행인처럼 
무심히 흘러 보내지 않게 하소서.

반겨 맞아들여 상처받을 줄을 알고, 
부둥켜안고 눈물 흘릴 줄을 알게 하소서.

넘어지고 쓰러지신 당신과 함께 
아파할 줄을 알고,
더 이상은 당신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찔리고 못 박히신 당신과 함께 
거부당할 줄을 알고,
조롱당해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억울해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고, 
수없이 거부당하면서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교회는 어떻게 쇄신되는가?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던지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평화의 임금께서 주시는 이 ‘칼’은 대체 무엇일까요? 이 칼은 바로 타협하지 않는 ‘진리’의 칼이며, 오늘 강론의 주제처럼, 역설적이게도 교회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쇄신의 도구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는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이 땅 위를 순례하는 동안, 시대의 먼지를 털어내고 끊임없이 주님의 뜻에 맞갖게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 쇄신은 어떻게 일어날까요? 오늘 복음은 그 답의 실마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교회의 쇄신은 ‘진리의 칼을 휘두르는 자’와 ‘그 칼을 받아 안는 지도자’의 거룩한 만남을 통해 일어납니다. 

쇄신의 청사진: 베드로와 바오로 

그 원형은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났습니다. 교회의 첫 번째 교황인 베드로는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식사를 나누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계 신자들이 나타나자 그들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바오로 사도가 일어섰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가 아닌 칼’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적인 관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진리의 칼을 휘둘렀고, 베드로는 그 칼날 앞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는 주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특정 집단의 눈치를 보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진리만을 선택해야 했던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자신의 권위만을 내세웠다면 바오로를 억눌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아픈 질책을 받아들였습니다. 진리의 칼을 든 바오로와 그 칼을 기꺼이 받아 안은 베드로. 이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교회는 온 세상을 향한 보편 교회로 쇄신될 수 있었습니다. 

역사의 갈림길: 인정 혹은 억압 

교회 역사는 이 청사진을 따랐을 때와 외면했을 때의 결과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교회는 새로운 진리의 목소리를 냈던 갈릴레오를 억누름으로써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가난이라는 칼을 들고 나타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임으로써” 교회 전체가 예언자의 상, 곧 쇄신이라는 선물을 받게 했습니다.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하려던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역시 처음에는 동료들에게 박해받았지만, 결국 교회가 그들의 거룩함을 인정했을 때 교회 전체를 위한 영적 보물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역사는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킵니다. 진리의 칼을 든 예언자는 늘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예언자의 외침이 교회를 살리는 쇄신으로 이어지느냐는 그 칼을 마주한 지도자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핵심 예화: 염색공의 딸과 교황 

교회 쇄신의 역사에서 이 진리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14세기,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던 ‘아비뇽 유배’ 시절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모두가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누구도 안락한 아비뇽의 삶을 버릴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때 진리의 칼을 들고 나타난 이는 이탈리아 시에나의 글도 모르는 염색공의 딸, 카타리나였습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불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교황님, 제발 남자답게 행동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비겁함을 버리고 당신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그녀의 외침은 “안락한 아비뇽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오늘 복음의 칼날 그 자체였습니다. 

많은 추기경이 카타리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이 칼자루를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11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온 카타리나의 거친 말 속에서 성령의 불을 보았습니다. 그는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카타리나라는 예언자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를 보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로마로 돌아가는 무거운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태 10,38) 주님을 따르는 길을 택했습니다. 한 젊은 여성의 진리의 칼을 알아보고 받아들인 지도자의 용기 있는 결단이 교회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입니다. 

결론: 진정한 지도자의 자질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  

이 말씀이야말로 교회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한 ‘죽은 평화’를 유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바로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분별을 통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알아보고,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예언자가 받을 상, 그것은 바로 ‘교회의 쇄신’입니다. 지도자가 예언자를 받아들일 때, 교회 공동체 전체가 쇄신이라는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완성된 건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라나는 생명체입니다. 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바오로와 같은 예언자적 용기와, 베드로와 같은 겸손한 수용, 카타리나와 같은 담대한 열정과, 그레고리오 11세와 같은 분별력 있는 결단이 모두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진리의 칼을 외면하지 않고, 때로는 휘두르고 때로는 기꺼이 받아 안는 용기를 가질 때, 우리 교회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항상 개혁되는’ 살아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Operari Sequitru Esse)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사물은 존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태워야 할 것이 있는데 여기에 물을 붓는다면 어떨까요? 이때에는 당연히 불이 있어야 합니다. 또 불을 꺼야 할 때 휘발유를 붓는다면 어떨까요? 역시 아니지요. 이때는 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행위는 존재를 따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존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맞을까요? 하느님의 뜻이 담긴 사랑의 행동만이 우리 존재에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행동이 아닌, ‘선의 결핍’인 ‘죄’라는 행동을 합니다. 당연히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리 존재에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행위가 존재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을 때, 분열과 붕괴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태워야 할 것에 물을 부어서 타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불을 꺼야 할 때 휘발유를 부어서 불을 더 키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행위는 하느님의 창조물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뜻이 가득한 사랑에 집중하며 사는 우리의 행위만이 우리 영혼을 분열시키지 않고, 또 붕괴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에 맞춰 사는 것이 정답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면서, 세상 안에서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면서 죄로 기울어집니다. 영혼은 커다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 뜻에 따르는 우리의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칼은 폭력을 의미하는 칼이 아닙니다.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칼이고, 죄로 기울어지는 갈등을 초래하는 것을 과감하게 잘라버리는 진리의 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우선하는 세상의 법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가족 간에도 분열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첫 번째 선택은 주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라고 하십니다. 로마 시대에 십자가는 극형의 상징이었지요. 결국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고통, 박해, 자기 부정을 감수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진짜 자기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참된 생명, 곧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는 과연 어떠한가요? 주님이라는 거룩한 존재,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존재에 맞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우리의 과감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해야 할 것은 우리 행위가 따르는 존재인 주님이십니다.

 

오늘의 명언

만일 정치인들이 하느님을 흠숭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면, 이 세상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진리로 깨어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폭력의 도구가 아니라 거짓과 타협을 끊어내는 진리의 칼입니다. 진리의 칼은 관계를 파괴하는 칼이 아니라 하느님을 가장 먼저 사랑하게 만드는 사랑의 칼입니다. 

복음을 따르는 삶은 언제나 결단을 요구하는 변화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세상의 평온이나 관계의 안전함보다 하느님에 대한 우선적 충실성이 필요합니다. 

거짓 평화를 깨는 참된 평화이며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참된 정화이며 타협 없는 선택의 참된 용기이며 참과 거짓을 가르는 올바른 지혜입니다. 그만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회복이 중요합니다. 

참된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진리와 정의 위에 세워진 십자가의 평화를 주십니다. 참된 평화는 상처를 덮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고 치유하는 사랑의 힘입니다. 

이 사랑의 칼은 참된 사랑과 진리를 위해 우리를 새롭게 빚어내시는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칼은 무엇을 따를 것인지 누구를 중심에 둘 것인지 끊임없이 묻는 사랑의 단호한 결단입니다.

 

 

 

마태오복음 10장 34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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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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