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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7/17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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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7월 17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탈출 3,13-20)
    나는 있는 나다.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 오늘 복음
    (마태 11,28-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탈출 3,13-20
오늘 제1독서

나는 있는 나다.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그 무렵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은 

13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5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16 가서 이스라엘 원로들을 모아 놓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너희를 찾아가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살펴보았다. 

17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에서 너희를 끌어내어,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 

18 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함께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여라. 

19 그러나 강한 손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한, 이집트 임금은 너희를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20 그러므로 나는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1,28-30
오늘 복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17일
박준현 루카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38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안식을 약속하시면서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라고 하십니다. 지금 지고 있는 짐도 힘든데 그분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니 선뜻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여러 마리의 소를 ‘함께’ 부려 밭을 경작하였기 때문에(1열왕 19,19 참조) 예수님께서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 말씀에는 우리가 멜 멍에를 당신께서도 함께 지시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멜 멍에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멍에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멍에는 개인이나 집단이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정서적 또는 심리적 부담이나 제약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으로도 쓰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하면서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감, 부담감, 일의 성사 여부에 대한 초조함을 지고 살아갑니다. 수많은 일이 내 뜻과 내 노력만으로 되지 않음에도 모든 것이 내게 달린 듯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지라고 하심으로써 일은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여 일의 진행, 성공과 실패, 이 모든 것은 당신의 몫이며, 우리는 그저 당신의 일을 당신과 함께해야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하셔야 할 몫은 그분께 맡겨 드리고, 그분 뜻대로 일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일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멍에를 멥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위해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오늘 주님께서 무거운 짐을 진 우리보고 당신에게 오라고 하시고, 짐을 지면서도 안식을 누리게 해주겠다고 하시는데 그 짐이 무엇인지, 곧 몸으로 지는 짐인지 마음의 짐인지 생각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멍에를 메고 짐을 지면 멍에는 편하다고 하시는데 그 멍에는 어떤 멍에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몸의 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몸으로 지는 짐도 가볍게 질 필요가 있고 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짐꾼에게 배우면 되지 굳이 주님께 가서 배울 필요까지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지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으신 것은 몸의 짐이 아니고 마음의 짐이기에 당신의 마음을 예로 들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우리는 자주 무엇이 또는 누가 부담스럽다느니 부담을 느낀다느니 합니다. 이것은 무엇이 또는 누가 싫은 것입니다. 좋은 것이 부담스러울 리 없지 않습니까? 특히 싫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너무도 싫은 것이며, 그런데도 만나야 한다고 하면 거부감과 부담감이 드는 것입니다.  

마음의 짐이 이런 것이기에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그것은 몸에 잘 맞는 멍에처럼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온유하면 왜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운지에 대해 먼저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 번역은 “마음이 온유하면”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제가 번역하면 “마음이 온순하면”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공자가 나이 60에 이순(耳順)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나이 50에 지천명(知天命) 곧 하늘의 뜻 또는 명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아직 그것을 거역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는데 60이 되면 이제 귀가 순해져서 거역하지 않게 되는 경지를 말함과 같습니다. 

역경에 처해도 순경에 처할 때와 마찬가지로 순한 것이 온순함일 것입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어도 ‘왜 내게 이것이?’라고 하지 않음이고, ‘예.’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마음이 겸손할 때도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습니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은 고생이나 무거운 짐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무거운 짐이 있을 때 종과 주인 가운데 누가 그것을 지겠습니까? 아니, 종과 주인 사이에서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종이 아닙니까? 종은 자기가 마땅히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무거운 짐을 져도 마음에 분노가 일지 않고 평안할 것입니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그에게 무거운 짐과 많은 짐이 지워지겠지만 그는 그 무거운 짐과 많은 짐을 져도 불평 없이 지고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위해서 겸손과 온유라는 마음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과 책임을, 이웃이 우리에게 얹어준 십자가를 매일 잘 지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 마음이 이미 안식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는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의 짐’과 ‘율법의 짐’을 지고서 잠자리에 누워서까지도 신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안식”으로의 초대는 이러한 인간의 비참을 보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다함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안식”으로 초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고자 오늘 우리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멍에’란 자신의 몸 위에 걸쳐지지만, 짐을 편하게 지거나 끌게 합니다. 그것은 짐을 함께 지거나 함께 끌며, 짐 아래에 눌리지만 짐을 가볍게 합니다. 자신의 몸 위에 놓이지만 온유하고, 짐 아래에 놓여 겸손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가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었듯이,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은 단지 ‘당신을 모방하라’ 혹은 ‘당신의 경험을 배우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신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진리를 배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길”을 제시하는 스승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바로 “길”이십니다.  

그리고 “길”이신 당신은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마음을 제자들 안에 건네주십니다. 이 마음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으로서 타인을 섬기며, 고난을 겪어서 타인의 아픔을 아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 하십니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이는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얻을 것이다”의 원어의 뜻은 “찾다”, “발견하다”는 뜻입니다. 곧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찾고 발견되는 것이며, 그분이 이를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만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 마음”에서 사랑을 퍼 올리는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그 사랑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 마음”이 이미 안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의 의미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만일 우리 평생에 하느님께 단 한 가지만 청할 수 있다면, 무엇을 청하시겠습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건강이나 재물, 또는 자녀의 성공이나 가정의 평화를 떠올리실 겁니다. 모두 소중하고 귀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만약 제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저 없이 “예수님의 마음, 곧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주십시오.” 하고 청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으로 사는 것도, 머리로 사는 것도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마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마음에서 나쁜 생각,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 15,19) 하시며 모든 것의 근원이 마음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 모든 관계의 질은 바로 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치 컴퓨터의 성능이 중앙 처리 장치(CPU)에 달려 있듯, 우리 인생의 방향과 평화는 마음이라는 ‘영혼의 운영체제’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늘 마음에 평화가 없던 한 부자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자신의 평화가 깨지는 이유가 시끄러운 주변 환경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새벽마다 우는 수탉 소리에 잠을 설친다며 수탉을 없앴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거슬려 높은 담을 쌓았습니다. 다음엔 삐걱거리는 집이 문제라며 집을 허물고 완벽한 방음 저택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소음과 사람을 피해 외딴섬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완벽하게 고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도 잠 못 이루고 괴로워했습니다. 이번에는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 소리와, 머릿속에서 윙윙대는 원망과 불안의 소리가 그를 미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 평화를 깨는 외부의 것들만 고치려 애쓰다, 정작 평화의 원천인 자기 마음을 돌보지 못해 단 한 순간의 평화도 누리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평화가 깨지는 이유를 끊임없이 외부에서 찾습니다. 내 배우자가, 자녀가, 직장 상사가 바뀌면 평화로울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 본래의 마음, 그 상처받고 뒤틀린 마음을 그대로 둔 채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사소한 일에 화가 치밀고,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교만해지거나 비참해집니다. 짜증과 불평이 관계를 망가뜨리고, 결국 우리 마음의 평화, 곧 안식을 산산조각 냅니다. 안식은 휴양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의 상태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 얼마나 달콤한 약속입니까? 그런데 그 안식을 주시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그분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하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의 조건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인간적 노력의 정점을 넘어서는 ‘거룩한 교환’의 신비가 숨어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의 “돌 심장을 없애고 살 심장”을 넣어주시겠다는(에제 36,26 참조) 약속의 성취입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결코 온유하고 겸손해질 수 없기에,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이식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그냥 주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나에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연습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심장 이식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건강한 생활 습관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듯, 그리스도의 마음을 선물로 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을 나의 것으로 익히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동차 운전을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운전면허를 땄다고 해서 바로 능숙한 운전자가 됩니까? 아닙니다. 좁은 골목길도 지나 보고, 빗길과 눈길도 달려보며 차와 한 몸이 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온유함의 성인으로 알려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도 본래 대단한 다혈질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일 의식적으로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고 온유함을 ‘연습’하여 마침내 ‘온유함’이 그의 제2의 본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바로 이 ‘배움’과 ‘연습’의 기회입니다. 누군가 나를 오해할 때,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몸이 고되고 피곤할 때, 바로 그 순간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연습할 최적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지금 어떻게 하셨을까?’ 질문하며 그분의 온유함을, 그분의 겸손함을 흉내 내보는 것입니다.

최근 유튜브에서 ‘랄랄’이라는 크리에이터가 연기하는 ‘이명화’ 캐릭터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제 갓 30이 넘은 젊은 엄마인 그가 50대 중년 여성 캐릭터를 그토록 실감 나게 소화하는 비결은, 어려서부터 남을 흉내 내며 관찰하고 연습하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단순히 50대 아주머니를 연기하는 것을 넘어, 오랜 관찰과 연습을 통해 그 말투와 표정, 삶의 태도까지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과 같습니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식받았다고 믿고,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마음이 나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도록 의식적으로 연습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들지라도,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그분의 마음이 정말 나의 마음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겉모습만 흉내 내는 ‘연기’가 아니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20)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존재 자체가 변화하는 ‘체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우리의 마음은 누구의 마음을 비추고 있습니까? 혹시 여전히 상처받은 ‘나’라는 캐릭터의 슬픈 독백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온유와 겸손으로 바뀌지 않으면 어떤 좋은 환경에 가더라도 참된 안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 그리고 이번 한 주간, 하느님께 단 한 가지만을 청해봅시다.  

“주님, 저의 굳은 마음을 뽑아내시고,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제게 넣어 주십시오.” 

그리고 세상 속에서 그 마음으로 살아보는 연습을 시작합시다. 운전대를 잡듯, 배우가 역할에 몰입하듯,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장착하고 살아갑시다. 그럴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안식이, 하늘의 평화가 우리 삶 한가운데에 강물처럼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어느 신부님께서 장례미사 강론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한 번도 성당에 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에이~~ 설마요.”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사랑만을 생각하기에, 주님의 사랑을 즉,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시는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은 이를 믿는다고 하면서 입으로만 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느끼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 사람들처럼 살려고 하겠습니까? 
 
똑같이 미워하고, 똑같이 판단하고, 똑같이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기만 한다면,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나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좋은 모범으로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통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에이~~ 설마요.”라는 마음을 지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진짜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삶 안에서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고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은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시련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느끼는 죄책감, 사회적 억압, 그리고 영혼의 고독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부르시는 대상이 한정되지 않습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보편적인 초대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초대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당신의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라고 하시지요. 우리 역시 이 세상 안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당신의 짐은 가볍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것에 멍에나 짐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적절하고 알맞다는 의미로, 그 이유는 사랑이신 주님께서 함께 메어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내 멍에와 짐을 없애달라고 하는 사람은 사랑을 계속 의심할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에이~~ 설마요.”라면서 불가능한 것처럼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사랑을 굳게 믿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멍에나 짐의 무게에 상관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한 안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웃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빠짐없이 하느님 안에서의 안식을 누리면서 행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주님 안에서 쉬십시오. 주님은 당신의 짐을 덜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기꺼이 주님의 멍에를 멘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우리의 하루가 무너지지 않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건 없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지치고 상처받은 모든 이들을 향해 무한한 자비의 손길을 베푸십니다.

이 따뜻하신 초대는 치유와 회복을 위한 부름입니다. 세상은 경쟁과 불안, 피로로 가득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쉼과 안식을 얻습니다. 이 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존재의 회복이고 하느님 안에서 거하는 참된 평화입니다.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이며 온유는 사랑으로 관계를 맺는 주님의 방식입니다. 우리의 고통 속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은 주님과 함께 나누는 사랑의 짐이 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들은 단순한 휴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쉼을 다시 얻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그래서 쉼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오는 선물입니다.

짐이 없는 삶이 아니라 쉼을 통해 성장하는 삶입니다. 짐과 쉼 사이에는 성장의 여정이 있습니다. 참된 쉼은 단순합니다. 오늘을 주님께 맡기고 열어드리고 머무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참된 쉼이 있는 머무름의 소중한 오늘 되십시오. 비 피해가 없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마태오복음 11장 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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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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