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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7/19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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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7월 19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19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탈출 12,37-42)
    그날 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 오늘 복음
    (마태 12,14-21)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탈출 12,37-42
오늘 제1독서

그날 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그 무렵 

37 이스라엘 자손들은 라메세스를 떠나 수콧으로 향하였다. 아이들을 빼고, 걸어서 행진하는 장정만도 육십만가량이나 되었다. 

38 그 밖에도 많은 이국인들이 그들과 함께 올라가고, 양과 소 등 수많은 가축 떼도 올라갔다. 

39 그들은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반죽으로 누룩 없는 과자를 구웠다. 반죽이 부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쫓겨 나오느라 머뭇거릴 수가 없어서, 여행 양식도 장만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40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사백삼십 년이다. 

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바로 그날, 주님의 모든 부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왔다. 

42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 밤을 새우게 되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2,14-21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19일
류호영 안토니오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나의 시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이사야서 42장 1-4절에 나타난 ‘주님의 종’에 관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사목 대상은 갈대처럼 약하면서 그중에서도 으깨지고 부서지고 짓눌린 이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소외된 이방인들(‘민족’이라는 낱말은 ‘이방인’으로 번역할 수도 있음)입니다.

그분께서는 짓눌린 이들, 소외된 이들을 받아들이셨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벌을 받은 자로 여겨졌던 병자들도 받아들이셨습니다.

“부러진 갈대”, “연기 나는 심지”(마태 12,20)에서 우리는 부러졌다는 사실과 불이 거의 꺼졌다는 사실에 집중하지만, 그분께서는 아직 잘려 나가지는 않았다는 것, 아직 불기가 조금은 남아서 연기라도 난다는 사실에 마음을 두십니다.

그분께서는 아주 작은 것을 소홀히 하시지 않고 그것이 자라서 커다란 무엇이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내하며 기다리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먼저 믿고 희망을 두셨기에 그 갈대와 심지, 곧 이방인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부족함과 죄보다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음을,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보십니다. 나를 믿으시고 나에게 희망을 걸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 내 이웃을 향하는 나의 시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결점에 있습니까, 아니면 가능성에 있습니까? 나를 믿어 주시고 희망을 두시는 그분의 시선을 바라보고 느낄 때, 자신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시선도 그분의 것처럼 바뀔 것입니다. 우리도 희망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12,21).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힘없어도 힘 있는

어제와 오늘 창세기는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게 되는 얘깁니다. 지난 화요일 저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모세와 파라오를 각기 당신 도구로 쓰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욥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천상 회의를 여시고는 욥을 단련시키는 악역으로 사탄이라는 패를 쓰셨지요.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사만 하느님의 도구라는 편견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에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이집트, 곧 이 세상을 떠나도록 하는 데는 파라오 곧 사탄보다 더 역할을 잘하는 것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그 좋은 것을 다 놔두고 억울해서 어떻게 떠나고 어떻게 천당을 갈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떠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느님이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은 사람만 스스로 떠날 텐데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는 것조차 스스로 맛보고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맛이 얼마나 쓴지 하느님께서 맛보게 하셔야만 새로운 맛을 찾고 하느님 나라의 맛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서 이것을 우리는 잘 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세상을 애착하는 사람을 세상에서 쓴맛 보게 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떠밀고 내모는 사람 곧 파라오와 사탄이 필요합니다.

어쨌거나 파라오의 악역 덕분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제부터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그들을 건너가게 하는 것은 모세의 몫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건너갈 동안 끝이 보이지 않는 시련 때문에 절망하고 건너가기(파스카)를 포기하려는 백성들을 수없이 달래며 희망을 제시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영도하던 모세처럼 꺾이고 상처받은 우리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이것은 너무도 쉽게 포기하는 우리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이며, 우리 인간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절망 치유의 힘입니다.

우리는 부러진 갈대를 꼴 보기 싫어합니다. 싱싱한 젊은이를 보고 싶지 쭈글쭈글한 늙은이를 보고 싶지 않고 싱싱한 것을 보고 싶지 상처받고 골골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치유할 수 없고 구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치유하고 내가 구해 낼 수 있다면 덤벼들어 구할 텐데 그럴 수 없으니 그냥 외면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전능하시기에 자비로우시고, 당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싫어하실 리 없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은 모든 것이 당신 것이기에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없는 분으로 계시고 힘없는 분으로 돌아가셨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의 이 사랑에 우리보다 먼저 희망을 두시고 의탁하신 분이셨으며, 그렇기에 힘이 없는 우리에게 희망 되시고 우리도 희망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처럼 힘없어도 힘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시고 모두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에 힘입으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 곁의 꺾인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들에게 희망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병자를 낫게 하신 일에 대한 바리사이들과 군중들의 반응에 대하여 취하신 두 가지 처신을 들려줍니다. 한편으로는 당신을 죽이려고 모의를 꾸미는 바리사이들을 피하고, 또 한편으로는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고쳐 주시면서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과 측은히 여기며 ‘자비롭고 신실하신 모습’입니다. 

이 사실에서, 마태오복음사가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곧 예언자 이사야는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위의 두 가지를 메시아의 특징으로 말해줍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마태 12,19-20) 

이 말씀을 들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의 ‘돌보심과 신실하심’과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저희 자신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사실, 저희는 죄 있는 형제들에게 손을 뻗어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하기를 자주 합니다. 형제들의 짐을 져주기보다 오히려 더 큰 짐을 얹어 짓누르기도 합니다.  

또한 약한 형제를 못 본 척 홀로 두고서, 제 길을 가기에 바쁩니다. 형제를 존중하기보다 하찮게 여기며, 마치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업신여기기도 합니다. 그렇게 저희는 기 꺾인 이들을 짓밟고, 부러진 갈대는 꺾어버리고, 연기 나는 심지는 꺼버리기를 거리낌 없이 하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저희를 구해 주십니다. 당신께서는 저희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넘어지고 부러져 있을 때도, 저희를 꺾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저희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희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저희가 당신을 배신하고 거부할 때마저도 결코 저희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저희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시고, 신실하심으로 저희를 이끄십니다.  

주님께서는 저희 영혼이 병들어 말라 갈 때, 오히려 저희를 택하여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십니다. 당신의 영을 부으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으십니다.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결코 저희에게서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아니, 저희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십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돌보아주십니다. 참으로 선하시고 자비하신 모습으로 신실하십니다. 그토록 신실하신 사랑, 그 지치지 않는 사랑과 연민으로 저희를 이끄십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2,20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주님!
당신은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배신하고 또 배신하며 거부할 때에도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으시고,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도망질쳐도 언제나 동행하시고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제 갈 길을 가느라 
약한 이를 홀로 두지 않게 하소서.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고, 
짐 진 이를 위로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어느 형제님에게 고민 하나가 생겼습니다. 이분은 집안 살림을 하고, 아내가 직장생활을 합니다. 솔직히 이 부부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 가정과 조금 다르겠지만, 자기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 옳다고 서로 합의했고 그래서 남편이 전업주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남들의 시선이 곱지 못한 것입니다. 전업주부라고 자기를 소개하면, 곧바로 “왜?”라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뒤이어 오는 말은 “아내가 힘들겠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의 시선에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이 부부는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없는 것일까요? 부부 금술도 너무 좋았고 자기 자리에 대한 만족도도 컸습니다. 그러나 남의 시선에 의해 문제 있는 가정, 문제 있는 남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진짜 문제일까요? 
 
이와 비슷한 경우를 이 세상에서 너무 쉽게 바라보게 됩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자기 생각과 다르면 엄청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단지 다를 뿐인데도 그것을 틀렸다고 하면서 함께할 수 없는 것처럼 만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사랑이 제대로 움터 나올 수 있을까요? 분열과 불의가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함께 사는 세상이기에 남의 말과 행동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기준을 맞춘다면, 또 함께 사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더 조심하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합니다. 바로 앞 절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신 사건(12,9-13)이 나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다고, 죽여서 제거할 계획을 모의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한쪽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쳐 주는 것은 굳이 안식일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죽음이 임박한 상황도 아닌데, 굳이 안식일에 고친 것은 율법을 일부러 어기려는 나쁜 속셈을 가지고 있는 커다란 죄인이라고 단정한 것입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에 있습니다. 죽을병이 아니어도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종교적 비판받을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이런 죽음의 분위기라면 빨리 도망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이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다름을 틀렸다고 말하기 전에, 주님 사랑의 기준에 맞는가를 따져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말하기 전에, 이 역시 주님 사랑의 기준에 맞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때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사람을 얼마 동안 속일 수는 있다. 또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에이브러햄 링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이제는 그만 비가 멈추고 햇살같은 희망이 피어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과 그의 삶 전체를 담은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사랑과 용서 낮아짐과 치유 연대와 정의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유다 민족의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이름은 다른 이름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치유이며 정의이며 무엇보다도 희망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고통과 죽음을 안고 넘어선 이름 무력함 속에서도 참된 힘을 보여준 역설의 이름입니다.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포용과 사랑의 보편적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부러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희망입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음은 참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입니다.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음은 포기하지 않음이 아니라 끝까지 믿는 사랑입니다. 

그분의 이름 안에 우리의 생명을 온전히 맡기는 신뢰이며 사랑입니다. 그분의 이름 안에서 비로소 우리 존재를 완성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루를 시작하고 그 이름 안에 우리의 이름을 맡기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마태오복음 12장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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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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