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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7/20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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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7월 20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농민주일
연중 제16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20일 농민주일, 연중 제16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18,1-10ㄴ)
    나리,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 제 2독서
    (콜로 1,24-28)
    과거의 모든 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이제는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0,38-42)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창세 18,1-10ㄴ
오늘 제1독서

나리,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그 무렵 

1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2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3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5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 반죽하여 빵을 구우시오.” 

7 그러고서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8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천막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콜로 1,24-28
오늘 제2독서

과거의 모든 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이제는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형제 여러분, 

24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25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당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라고 나에게 주신 직무에 따라,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26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27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 나타난 이 신비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성도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28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0,38-42
오늘 복음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20일
안영배 사도요한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14:48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필요한 한 가지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루카 10,40)하였습니다. 그녀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외롭고(“혼자”[10,40]) 아무도 자신을 신경 써 주지 않는다고(“내버려 두는데도”[10,40]) 느낍니다.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이러한 느낌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마르타도 다른 사람 때문에 어렵다고 여기어 그를 변화시키려고 합니다(“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10,40].)

이제 주님께서 마르타를 도와주십니다. 상대에 대한 친밀감의 표시인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시면서 그의 영혼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께서는 마르타가 자신의 상태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10,41).

마르타는 예수님을 모셔 들였지만 예수님은 잊은 채 일을 중심에 두고 일에 끌려다니고 있음을 예수님께서 깨우쳐 주십니다. 우리도 얼마나 자주 이런 상태에 빠지는지요!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성을 제시해 주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10,42).

어차피 사람은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일 가운데 우선순위를 정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때 정말 필요한 한 가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마리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필요한 한 가지, 좋은 몫이 무엇인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본보기를 보여 주십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섬기려 모셨고 예수님께서도 마르타를 돌보고 계십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비교 불행은 피하고, 일념으로 사랑하는

오늘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복음의 마르타는 주님을 맞이하여 지성으로 시중든 것에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덕분에 아들을 선물로 받는 데 반하여 마르타는 기껏 시중들고는 주님께 꾸지람을 듣습니다. 

왜 꾸지람을 들었습니까? 시중드는 일로 주님과 마리아를 싸잡아 타박했기 때문입니다. 동생 마리아는 시중드는 일에 같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그런 그를 나무라지 않고 내버려 둔 것 때문에. 타박하는 마르타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나무라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이 나무라심 안에는 이런 잘못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일념으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시중드는 것을 사랑으로 하지 않고 일로 하는 것이고, 사랑 일념으로 하지 않고 이것저것 너무 생각이 많습니다. 다념(多念)이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너무 다념입니다. 

염려(念慮)가 많은 것이 그 표시입니다. 염려의 염이 바로 생각 염(念) 자가 아닙니까? 염려의 려(慮)도 생각 또는 근심 걱정의 뜻이고요. 그러니까 사랑 하나만 생각하고 하면 되는데 이 생각 저 생각이 많은 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둘째는 주님과 주님 일행에게 시중드는 거라면 주님과 일행에게만 신경 쓰면 되는데 마리아를 신경 쓰는 잘못입니다. 사실 동생 마리아가 없었다면 마르타도 딴 신경 쓰거나 불평 불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하느님 일을 하다가 하느님은 놓치고 사람을 붙잡고 씨름하고 시비합니다. 이 시비(是非)가 바로 잘잘못 또는 옳고 그름이고 그것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까? 아무튼 너의 잘잘못을 따지다가 하느님을 놓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우리말에 아주 좋은 말이 있는데 바로 ‘너나 잘하세요.’입니다. 

셋째로 마르타는 아마 마리아에 대한 시기 질투 같은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만 좋은 몫을 택한 것 같은 시기심과, 마리아만 주님 사랑을 받는 것 같은 질투심 그런 것이 있지 않았을까요? 

우리 공동체 안에서 그런 일이 많습니다. 누구는 허드렛일하는데 누구는 책상받이인 경우, 누구는 룰루랄라 하는데 누구는 땀 뻘뻘 흘리는 경우, 누구는 노상 성체 앞에 있는데 누구는 주방에서 솥뚜껑 돌리고 있는 경우 등. 이렇게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한 것을 시기 질투하며 그것을 뺏으려고 하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남과 비교하며 시기 질투하면 불행해지게 됩니다. 남과 비교하다가 하느님 사랑도 잃고 이웃사랑도 잃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비교 불행’ 가운데 시기 질투보다 우리를 더 불행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비교 불행’을 극구 피하고, 일념으로 사랑해야 함을 마르타와 아브라함에게서 배워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

오늘 <말씀전례>는 “환대 곧 손님맞이”, 또는 ‘하느님 맞이’, ‘주님 섬기기’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나그네에 대한 아브라함의 환대(손님맞이)를 들려주며, <제2독서>에서는 이방인과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복음의 환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와 마르타의 환대, 곧 진정한 손님맞이와 진정한 주님 섬기기는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마을 어귀에까지 나가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여 환대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경청함으로써 환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르타가 예수님의 몸을 섬기고 있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섬기고 있습니다. 곧 마르타는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마리아의 환대는 칭찬을 받고 마르타의 환대는 꾸중을 듣게 되는 것일까?  

이들의 환대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리의 환대와 섬김이 진정한 섬김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손님을 주님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를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규칙]에서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규칙서 53,1)라고 말합니다. 곧 주님을 주님 되시도록 해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나는 섬김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말씀대로 해드리는 것입니다. 곧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섬기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자신을 향한 주님의 섬김을 수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시도록 허용해 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종’인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 석상에서 자신의 발을 씻겨주는 것을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그렇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종’이 되십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시어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지금 자신보다 더 작아진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셈입니다. 묘하게도, 그 순간 “종”으로 오신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드리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주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그 어떤 섬김보다도 더 큰 섬김이요, 더 큰 환대입니다. 마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이 ‘섬김’은 그분과 한 자리에 있게 합니다. 아니 그분 면전에 있게 합니다. 곧 그분은 마리아에게 면전에서 말씀으로 섬김을 행하시며, 마리아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귀 기울여 들음으로 섬김을 행합니다. 반면에, 마르타는 예수님 면전에 있지 못하고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으며, 오히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있는 꼴입니다. 이것이 마리아와 마르타의 섬김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당신께서 주인 되시어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승복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진정 당신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수락하는 일이요,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일이 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無爲而無不爲) 단계, 곧 무위(無爲)의 도(道)라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사실은 전부를 하는 신령스런 도(道)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마르타 마르타야!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그렇습니다. 결코, 빼앗겨지지 않는 그 무엇이 우리에게는 ‘이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을 지니고 있다’는 이 사실을 먼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이 “한 가지”는 ‘전부’인 하나입니다. 이것 하나만 지니게 되면, 다른 모든 것을 얻게 되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세 번 반복되고 있는 “주님”이라는 “한 가지” 입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이 사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실상 필요한 한 가지’요, ‘전부인 한 가지’이며, 결코 빼앗겨지지 않으며, 그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그리고 거부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이 “한 가지”로 하여 행복하고, 이 “한 가지”로 이미 더할 수 없이 충만하며, 그 어떤 것도 이 행복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가 할 “환대”는 ‘주님이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이요, 자신을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승복하는 일이요, 동시에 당신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당신께서 나를 섬기도록 자신을 허용해드리는 이 일이야말로 바로 당신을 섬기는 진정한 환대요, 손님맞이요, 주님 섬기기가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0,42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저는 그것을 이미 가졌고,
그것을 당신이 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근심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주님이라는 이 사실!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진정한 “한 가지”입니다. 

오로지 
이 “한 가지”로 하여 
저는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신앙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이것만 물어보라.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집에 방문하십니다.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타는 손님 대접을 위해 마음이 온통 분주합니다. 성경은 그녀가 “온갖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루카 10,40)라고 표현합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최고의 식사를 대접하고, 가장 편안한 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 자체는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각,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일손은 부족하고 마음은 조급해진 마르타는 결국 예수님께 볼멘소리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가서 저를 도우라고 이르십시오.”(루카 10,40)

이때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주신 답변은, 오늘 우리 모두의 신앙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봉사와 수고를 절대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녀의 ‘분주한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만약 마르타가 불만을 토로하지 않으셨다면 그런 말도 들을 필교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 즉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doing)’에 집중하는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있느냐(being)’에 집중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마키아벨리가 쓴 『악마 벨파고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지옥의 왕은 인간 세상에서 결혼 생활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 알아보기 위해 악마 벨파고르를 지상으로 보냅니다. 부유한 귀족으로 변신한 벨파고르는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지만, 그의 삶은 곧 지옥보다 더한 고통으로 변합니다. 사치와 허영에 빠진 아내는 그의 재산을 물 쓰듯 썼고, 돈이 떨어지자 온갖 경멸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벨파고르가 겪은 고통의 근원은 단 하나였습니다. 아내는 ‘벨파고르’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재산과 지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조건이 사라지자 사랑도 사라진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감동적인 실화가 있습니다. 영화 ‘슈퍼맨’으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던 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95년 승마 경기 도중 낙마하여 목 아래로는 전신이 마비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하늘을 날던 슈퍼맨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숨조차 쉴 수 없는 존재가 되자, 그는 깊은 절망에 빠져 아내에게 삶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 다나는 남편의 눈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가졌던 그 무엇과 결혼한 게 아니에요. 나는 ‘당신’과 결혼했어요.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에요. 그리고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이 말은 꺼져가던 그의 삶에 다시 불을 붙였습니다. 아내의 사랑은 ‘슈퍼맨’이라는 화려한 배우를 향한 것이 아니라, 전신마비가 된 ‘크리스토퍼 리브’라는 한 인간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지지와 사랑에 힘입어 재활에 매진했고, 휠체어에 의지한 채 척수 마비 환자들의 권익을 위해 평생을 바치며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자칫 주님이 아닌 주님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0년 동안 정말 죽을힘을 다해 사목했지만 신자 수는 늘지 않았고, 교회의 상황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모든 것이 실패했다는 생각에 십자가 앞에 엎드려 절규했습니다. 

“주님, 저는 실패한 목사입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니다. 내가 실패한 것이다.”

깜짝 놀란 그는 되물었습니다.

“아닙니다, 주님. 제가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네가 성공했다면, 그것이 너의 성공이었겠느냐?” 

이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성공의 영광은 자신의 것으로 돌리고, 실패의 책임은 주님께 미루는 모순 속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장 극적인 예는 ‘기적의 순교자’로 불리는 베트남의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입니다. 그는 주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무려 13년 9개월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중 9년은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독방이었습니다. 처음 몇 년간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사랑하는 신자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었습니다. 그는 사목자로서 완전히 실패했다고 느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찾아와 물으셨습니다. 

“투안아, 너는 나를 선택했느냐, 아니면 나의 일을 선택했느냐?”

이 질문 앞에서 그는 모든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주님의 일’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를 말입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다른 모든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그 고백의 순간,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모든 고통과 어둠, 무력감이 사라지고 참된 자유와 평화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감옥은 그에게 주님과 가장 깊이 만나는 사랑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유능한 ‘가정부’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신랑이신 그리스도만을 갈망하는 순결한 ‘신부’가 되고 싶습니까? 진정한 신부는 신랑과 ‘함께 있는 것’ 자체를 가장 큰 기쁨으로 여깁니다.

우리의 신앙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스스로에게 이 질문 하나만 던져보면 됩니다. 

“나는 하루 중 어떤 시간을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가?”

만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망설임 없이 ‘기도 시간’일 때, 우리의 신앙은 길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내는 시간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과 그냥 ‘함께 머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신학생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기도 시간이 줄어든다는 자조 섞인 말을 하곤 합니다. 신자분들 중에는 평생 신부님이 성체 조배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르타처럼 주님을 위한 봉사에 분주하여, 정작 주님 곁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자리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거리에 돈이 나뒹굴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할까요? 아마 돈을 줍기 위해 온 힘을 쏟을 것입니다(돈 주인에게 돌려주든 아니면 자기가 갖기 위해서든).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나뒹구는 돈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돈 욕심이 전혀 없는 착한 사람들만 사는 곳일까요? 아닙니다. 돈의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나뒹굴어도 아무도 줍지 않았고, 환경미화원이 쓰레기 치우듯 쓸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땔감으로 화폐를 사용합니다. 빵 한 덩어리를 사기 위해 돈을 수레 가득 싣고 가야만 합니다. 

아프리카 후진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가장 선진국이라고 하는 독일의 옛날 모습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패해 이후, 독일 정부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무분별하게 화폐를 발행했고, 그 결과 물가는 전년 대비 1조 배 이상 폭등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혼란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극단주의 세력의 등장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나치 정권의 집권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혼란은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나만 잘되고, 안정적으로 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평안할 때 나도 평안할 수 있었으며,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사회에서만 나 역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기심과 욕심. 이를 없애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어디서 해야 할까요?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나’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입니다. 그리고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지만,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를 보고 예수님께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마르타가 말합니다. 

마르타가 처음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일 때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평화가 깨집니다. 자기를 돕지 않고 주님 발치에 앉아 있는 여동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음의 평화가 깨진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집에 모신 것은 여동생이 아닌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불편함을 따질 것이 아니라, 모두가 평안함을 따져야 했습니다. 자기의 불평등을 따질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길을 따져야 했습니다. 그래야 혼란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야단치는 것으로도 보이지만, 사실 애정과 부드러움을 담은 부르십니다. 

함께하는 마음에서만 진정한 평화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자기의 불편함, 자기의 불평등만을 따지다 보면 결국 자기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칭찬은 평범한 사람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 마법의 문장이다 (막심 고리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많은 것이 필요한 줄 알았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성장하고 관계를 통해 사랑을 실천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통로인 관계는 무엇이 더 본질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먼저입니다. 마르타는 해야할 일에 갇혔고 마리아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그분 앞에 머무는 시간 안에서 우리는 기쁘게 깨어납니다. 

사랑이 머무는 곳에 하느님이 머무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바로설 때 모든 관계가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진짜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중심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듯 보이지만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 중심입니다. 중심을 잃으면 방향도 잃습니다. 

일관된 신앙과 삶의 힘은 중심에서 나옵니다. 바로 그 중심에서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조용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삶의 중심과 방향을 가장 좋으신 하느님 안에서 다시 찾는 은총의 주일 되십시오..

 

 

 

루카복음 10장 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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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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