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5/07/16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7. 16.
반응형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7월 16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탈출 3,1-6.9-12)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 오늘 복음
    (마태 11,25-27)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탈출 3,1-6.9-12
오늘 제1독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 무렵 

1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2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4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6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9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10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11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12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1,25-27
오늘 복음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16일
정호영 요셉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3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높은 이에게는 낮고 평범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드러나심과 모세의 파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모세의 모습을 보면, 파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작음, 무능함,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탈출 3,11) 

탈출기 앞부분에는, 이집트의 온갖 훌륭한 교육을 받고 군사 지휘 면에서도 전문가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려는 열의로 가득 찬 모세가 나옵니다.

그러나 사십 년이 지나서(사도 7,30 참조) 이미 노쇠해 있고, 어쩌면 낙심, 절망, 그리고 일상에 자신을 적응시킨 무기력한 지금의 모세가 백성의 해방을 위하여 파견됩니다. 자신의 능력과 열의를 신뢰하는 모세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을 잘 알고 있는 나약한 모세를 주님께서 파견하십니다.

구약 성경 전체의 뿌리가 되는 탈출 체험의 시작인 이 하느님의 나타나심도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모습, 곧 그 자체로는 무심코 지나칠 수 있을 만큼 평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모습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비로소 작은 이, 곧 무력한 모세가 볼 수 있었습니다.

높은 이에게는 낮고 평범한 곳이 보이지 않습니다. 작은 이에게만 그것이 보이며, 그 작은 사건이 큰 일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작은 존재가 가장 큰 일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먼저 하느님 앞에 서서 Ad Sum! 하는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오늘 탈출기는 모세가 ‘하느님 체험’을 하는 얘기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로부터 구출하는 소명을 받는 얘기입니다.  

이로써 모세는 이전의 모세 곧 어제 탈출기의 모세와 다른 존재가 되는 겁니다. 어제 탈출기에서 모세는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성장했지만 민족적인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뜻하지 않게 동족을 위한 일에 끼어들게 됩니다.  

어제 모세가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때려죽인 것은 김구 선생님이 일본 순경을 때려죽인 것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니까 어제 모세의 행동은 김구 선생님의 민족주의적인 행동과 같습니다. 그리고 사막으로 도망친 것도 김구 선생님이 고향을 떠나 도망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사명도 받음으로써 이제 더 이상 김구 선생님과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모세에서 신앙적이고 예언자적인 모세가 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것을 가르는 것이 오늘 하느님 체험입니다. 이 하느님 체험으로 인해 모세는 민족주의자에서 예언자로 변모케 되는데 오늘은 모세의 이 하느님 체험과 그가 받은 소명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하느님 체험에서 제일 첫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산으로 오름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가는데 이것은 그가 스스로 간 것이라기보다는 이끌려서 간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 체험임과 동시에 성소 체험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시는 얘기나, 모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응답하는 것이 바로 성소 얘기의 전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성소를 보게 됩니다. 수도 성소든 선교 성소든 우리의 성소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려면 모세처럼 이렇게 하느님 체험과 성소 체험을 먼저 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예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제 체험에서 비롯된 얘기입니다. 나갔던 수도원에 제가 다시 돌아온 것은 나간 후 하느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체험을 하기 전에는 제가 좋아서 선택했고 부적합하다고 제가 판단하고는 떠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체험하고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 부르심임을 확고히 깨닫고는 성소의 흔들림이 한 번도 없었고 하느님께서 나가라고 하시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고, 아니,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모세의 불타는 떨기나무 체험처럼 하느님 체험이 강렬하면 강렬한 만큼 흔들림 없다고 생각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체험하기 위해서도 ‘Ad Sum(여기 있습니다)’하고 하느님 앞에 서야 하지만 체험하고도 소명 수행을 위해 늘 주님 앞에 서야 하고 ‘Ad Sum’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 맞서기 두려운 파라오 앞에 서기 전에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서기 전에 우리가 반드시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두려워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은 그전에 하느님 앞에 서지 않은 사람, ‘Ad Sum’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기 전에 기도 중에 늘 주님 앞에 서기로, ‘Ad Sum’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요, <뒤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오늘은 두 개의 절로 된 <앞 장면>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 장면>의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마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니 기도가 수난의 길을 앞두고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라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로서 당신의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감추시고”와 “드러내 보이시고” 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찬양을 나타내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곧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은 결코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8)라고 말씀하신 사도 바오로처럼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장막에 머무는 길은 우리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수도규칙 머리말 22-30 참조)고 제시하신 성 베네딕도의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1,26
아버지의 선하신 뜻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아이가 밥만 잘 먹고 공부만 잘하면 사회생활도 잘할 수 있을까?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와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아버지는 철부지들에게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이실까요?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그 진리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지 않으셨다면 알 수 없는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그저 외워야 하는 딱딱한 공식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이 삼위일체 신비를 아는 것이, 이 세상과 하느님 나라에서의 우리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절박하고 실질적인 ‘생존의 문제’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모든 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공부는 ‘부모님의 관계’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과목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서로를 어떻게 사랑하고 신뢰하며 용서하는지를 본능적으로, 그리고 필사적으로 공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남는 유일한 교과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감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범죄 연구 중 하나는 하버드 법대의 셸던과 엘리너 글루크 부부 교수가 수십 년간 진행한 연구입니다. 그들은 청소년 범죄에 영향을 미치는 수백 가지 요소를 분석한 결과, 가장 결정적인 변수는 가난이나 거주 지역이 아니라 바로 ‘가정의 관계적 요인’임을 밝혀냈습니다.  

어떤 사회복지사가 말해준 내용입니다. 평생을 소년원에서 아이들을 상담해 온 그분은, 아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되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아빠가 엄마를 때리고, 엄마는 저를 버렸어요. 사랑이 뭔데요? 그걸 어떻게 하는 건데요?” 이 아이에게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었고, 관계는 빼앗거나 빼앗기는 전쟁이었습니다. 사랑의 모델을 보지 못했기에, 그는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몰라 주먹을 휘두르는 방식으로 세상을 대한 것입니다. 

반대로, 비록 가난한 단칸방에 살았지만, 서로를 끔찍이 아끼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한 자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퇴근길에 늘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풀빵 한 봉지를 사 오셨고, 어머니는 그 풀빵을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자매는 ‘사랑은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작고 따뜻한 관심이구나’ 하는 것을 온몸으로 배웠습니다. 훗날 이 자매는 커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모의 관계를 공부한 아이는 세상을 살아갈 튼튼한 뿌리를 갖게 됩니다. 

20세기 미국 가톨릭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인 도로시 데이의 삶은 이 진리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급진적인 사회운동가로 살며 하느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딸 ‘타마르’를 낳았을 때, 그녀의 마음에는 이전에는 없던 거대한 바람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 작고 연약한 딸에게 자신이 줄 수 없는 영원하고 안정적인 사랑의 공동체, 즉 ‘가족’을 선물하고 싶다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녀는 딸이 불완전한 자신을 넘어서는 더 큰 사랑의 관계 안에서 보호받기를 바랐습니다. 이 열망은 그녀를 가톨릭교회로 이끌었고, 결국 그녀는 딸에게 세례를 주고 자신도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 선택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져야 하는 큰 아픔을 겪었지만, 그녀는 삼위일체 신비를 자신과 딸 사이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려면 부모의 관계를 잘 배워야 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잘 살려면 하느님 삼위일체 신비를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하시며 당신의 모습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사랑의 일치가 바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이루시는 사랑의 관계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온갖 지식과 정보에는 기꺼이 무관심하고, 오직 부모의 관계 맺는 법에만 필사적으로 관심을 갖는 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젊고 유능한 신경외과 의사였던 폴 칼라니티의 자전적 소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이에 대한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는 뇌과학의 정점에 있던 ‘지혜롭다는 자’였지만,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죽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 그가 쌓아온 모든 의학 지식이 자신에게 진정한 답을 주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복잡한 뇌 지도가 아니라, 아내와의 사랑, 갓 태어난 딸아이의 숨결, 그리고 그가 다시 마주하게 된 하느님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 세상의 가장 ‘지혜로운 자’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철부지’가 되어 평화를 얻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어려운 신학 공식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아이에게 ‘너희 부모님이 어떻게 사랑하는지는 알 필요 없어. 그냥 밥 잘 먹고 공부만 잘하면 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말입니까.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는 아이가 제대로 살아갈 수 없듯, 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관계를 모르면 우리의 영혼은 결코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음악을 너무나 좋아하는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서 음악에서 뛰어난 재능까지도 보였습니다. 깊은 기도와 묵상으로 아름다운 곡을 많이 만들었고,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의 장상이 그를 불러 말했습니다. 
 
“사제가 되려면 음악을 포기하게. 만약 음악을 계속하겠다면, 신부가 될 수 없어. 그만둬라.” 
 
이 신학생은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음악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자기의 도구였고, 기쁨이고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음악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성가는 하느님 말씀을 더욱 깊이 마음에 새기게 한다.’, ‘말씀이 노래로 선포될 때, 그것은 두 배의 힘을 지닌다.’라면서 성가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기를 낮추는 순명이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결정해야 할 때, 결정 자체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고민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결정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의 중심이 되어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파악해야 “예”라고 응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먼저 “예”라고 응답하셨고, 그 뒤에 곰곰이 생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마태 11,25)라고 기도하십니다.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분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세상의 지혜를 쌓는 것보다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렇습니다. 아버지!”(마태 11,26)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 뜻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기쁨을 표현하십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언제나 옳고 완전하다는 것이며, 성모님께서 “예”라고 응답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예”라고 하느님 뜻에 순명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에 얼마나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서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하느님 뜻에 우리도 “예”라고 먼저 응답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은 누구나 여러 번 좌절한다. 하지만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실패자는 아니다 (존 버로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땅을 어루만지는 비가 내립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이 나의 뜻과 다를지라도 그것이 가장 선한 것임을 믿는 마음입니다. 이렇듯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열린 마음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이가 참된 진리를 봅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께서 친히 드러내시는 은총입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며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 열립니다. 신앙은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참된 지혜는 단순함 속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의탁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진리는 높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낮고 단순한 마음 안에 머뭅니다.

우리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하느님의 뜻앞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철부지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철부지의 믿음은 모든 것이 이해될 때가 아니라 이해되지 않을 때 "아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철부지들의 마음은 가장 가난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철부지의 마음을 찾고 계십니다. 철부지의 믿음은 계산이 없고 조건이 없습니다. 오늘도 선하신 하느님의 뜻만으로 우리에게는 충분합니다.

 

 

 

탈출기 3장 12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250716_오늘성경구절이미지.jpg
0.35MB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