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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7/24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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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7월 24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탈출 19,1-2.9-11.16-20ㄴ)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이 시나이 산에 내릴 것이다.

  • 오늘 복음
    (마태 13,10-17)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탈출 19,1-2.9-11.16-20ㄴ
오늘 제1독서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이 시나이 산에 내릴 것이다.

1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바로 그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2 그들은 르피딤을 떠나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진을 쳤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그곳 산 앞에 진을 쳤다. 

9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너에게 다가가겠다. 그러면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이 듣고 너를 언제까지나 믿게 될 것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주님께 그대로 전해 드리자, 

10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에게 가거라.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아 

11 셋째 날을 준비하게 하여라. 바로 이 셋째 날에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이 시나이 산에 내릴 것이다.” 

16 셋째 날 아침,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뿔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진영에 있던 백성이 모두 떨었다. 

17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모세가 백성을 진영에서 데리고 나오자 그들은 산기슭에 섰다. 

18 그때 시나이 산은 온통 연기가 자욱하였다. 주님께서 불 속에서 그 위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마치 가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연기가 솟아오르며 산 전체가 심하게 뒤흔들렸다. 

19 뿔 나팔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모세가 말씀을 아뢰자, 하느님께서 우렛소리로 대답하셨다. 

20 주님께서는 시나이 산 위로, 그 산봉우리로 내려오셨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모세를 그 산봉우리로 부르셨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3,10-17
오늘 복음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24일
양두승 미카엘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2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

제자들이 예수님께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여쭈어보자, 예수님께서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마태 13,11)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만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만 특권을 주신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실 때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13,15)라고 하신 말씀은 사람들을 내치시는 느낌마저 받게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뜻을 풀이해 주시는 내용을(13,1-9 참조) 보면 씨가 뿌려지는 여러 형태의 땅은 여러 부류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듣는 이의 마음 밭 상태에 따라 결실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싹이 나든 나지 않든, 열매를 맺든 맺지 않든 간에 씨는 모든 곳에 뿌려집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라면 열매를 기대하기에 적절한 곳에만 뿌리는 것이 당연지사이지만, 이 비유의 씨 뿌리는 이는 모든 곳에 씨를 뿌립니다.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똑같이 하느님 말씀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허락”에는 하느님 편에서의 허락도 있지만, 말씀에 대한 인간 편의 응답도 포함되는 듯합니다. 주님께서는 일방적이시지 않고 관계 속에서 반응하시고 행동하시는 관계의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을 따르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 곧 주님께 온전히 열려 있는 이들은 주님께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도 더 주시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받아들인 것을 바탕으로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허락되지 않은 자들

어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말인데 이것은 하느님의 엄청난 차별이고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 되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어지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들”이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감각이 불능상태이고 마비 상태인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하늘나라에 대한 감각이 불능이거나 마비 상태인 이유는, 저들에게는 영적인 감각이 없기 때문이고 이 세상 감각만 있기 때문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육신의 두 눈 외에 제삼의 눈으로 ‘Eye of Wisdom’ 곧 ‘지혜의 눈’ 또는 ‘혜안’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을 일컬어 ‘저 사람 참 혜안이 있다.’라고 흔히 얘기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불교의 혜안과 같이 영안에 관해 말씀하시고, 이 영안이 있어야 하늘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어떤 사람이 영적인 감각이 마비되고, 어떤 사람이 영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을 바꿔서 얘기하면 본다는 사람에게는 보여주시지 않고, 보여주십사고 청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며, 슬기롭다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저는 철부지여서 잘 모릅니다.’라고 하는 사람에겐 보여주신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실로 안다는 사람,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만 알 뿐,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음을 알지 못하고, 특히 하늘나라의 신비와 관련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은 정작 알아야 할 것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고, 사실 하늘나라 신비와 비교하면 몰라도 되는 것들뿐입니다.

몰라도 되는 세상 것은 잘 알고 잘 보지만 정작 봐야 할 하느님 나라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영적 감각을 살아나게 하고, 교만은 영적 감각을 마비되게 하는 것임을 겸손하게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이미 와 있는 하늘나라를 믿음으로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10)하고 여쭙자, 먼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마태 13,11) 

참 이상한 일입니다. 만약, 이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는 군중들에게 하늘나라를 주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사실, 이 말씀은 “하늘나라”가 신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주시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없는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의 신비”가 모두에게 가려져 있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곧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그 “신비”를 아는 일이 허락되어 있고, 반면에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그 은혜를 거역하기에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이는 마치 불공평한 처사처럼 여겨집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4)는 초대교회의 모습에 견주어보아도 너무도 빗나간 처사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불공평한 처사를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똑같이 하늘나라를 가르쳐 주고 기적을 보여주시지만,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자는 더 받아들여 넉넉하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탤런트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마태 25,28-29 참조),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통해 밝히십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4-15;이사 6,9-10)  

위의 두 번째 문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어가 “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원하지 않고 거부한 완고함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완고한 마음을 주신 것(탈출 4,21)이 이집트인들에게 당신이 ‘하느님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셨듯이(탈출 14,4.18).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하느님 백성의 눈과 귀를 닫는 것은 ‘진정한 하느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제자들에게 선언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이는 이미 온 ‘하늘나라’를 믿음으로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을 듣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믿고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3,13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
믿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주시어
하늘나라의 신비를 
제 눈이 볼 수 있고
제 귀가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오늘도 도처에
그리고 제 안에 벌어진 
이 큰 당신 사랑을 찬양하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나라가 자라나고 
세상에 번져가게 하소서.

당신의 그 큰 사랑이 
퍼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 해야 소유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라는, 언뜻 듣기에 불공평하게 들리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가진 자’가 되어 더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  

세상에는 이 질문에 답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쌓는 사람’과 ‘심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편의 이야기를 통해 누가 진정한 소유주가 되는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쌓는 사람의 비극, ‘콜리어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20세기 초 뉴욕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호머와 랭글리 콜리어 형제는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 호머가 시력을 잃자, 그들은 세상의 문을 닫았습니다.  

동생 랭글리는 형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밤마다 온갖 잡동사니를 집 안에 쌓기 시작했습니다. 140톤이 넘는 쓰레기가 집을 가득 메웠고, 그들의 집은 재산을 지키는 요새가 아닌, 스스로를 가두는 무덤이 되었습니다.  

비극적이게도, 동생은 자신이 만든 쓰레기더미 함정에 깔려 죽었고, 형은 동생이 가져다줄 음식을 기다리다 굶어 죽었습니다. 그들은 평생 소유하기 위해 쌓았지만, 결국 그 쌓아 둔 것 때문에 생명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소유주가 아니라, 소유물의 노예이자 희생양이었습니다. 

반면 여기, 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 예로니모’의 이야기입니다. 4세기, 하느님의 말씀을 불같이 사랑했던 예로니모 성인은 당시 부정확하게 난립하던 라틴어 성경들을 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지식을 서재에 쌓아두지 않았습니다.  

대신 베들레헴의 작은 동굴에 자리를 잡고, 20년이 넘는 세월을 바쳐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문에서 직접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위대한 작업에 착수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사랑한 하느님의 말씀을 당시 사람들의 마음 밭에 ‘심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결과 ‘불가타’라는 이름의 대중 라틴어 성경이 탄생했고, 수많은 사람이 비로소 정확한 하느님의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위대한 ‘심기’의 과정 속에서 그는 어떻게 되었을습니까? 그는 인류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성경을 깊고 완전하게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방 교회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콜리어 형제와 예로니모 성인. 이 두 이야기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의 방식’입니다. 콜리어 형제의 사랑은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집착’이었고, 예로니모 성인의 사랑은 더 많은 이들과 나누려는 ‘헌신’이었습니다. 

진정한 소유의 원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것을 하나의 인격체처럼 여기게 됩니다. 씨앗을 사랑하면 그 안에 담긴 생명의 뜻을 존중하고, 여인을 사랑하면 그녀의 인격을 존중하며, 돈을 사랑하면 돈이 가진 가치와 흐름을 존중하게 됩니다.  

인격적으로 존중하면 그 뜻을 따라주게 됩니다. 어떤 인격체든 한 사람의 소유가 되기보다, 세상에 유익이 되기 위해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씨앗은 땅으로 가고 싶어 하고, 사랑하는 여인은 자녀에게로 가고 싶어 하며, 사랑하는 돈과 지식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가고 싶어 하는 그곳에 기꺼이 심어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더 많은 열매와 함께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쌓지 않고 심습니다. 그리고 심는 사람만이 사랑하는 것을 온전히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니 돈을 소유하고 싶으십니까? 돈을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돈이 가고 싶어 하는 가치 있는 곳에 기쁘게 심게 될 것입니다. 지식을 소유하고 싶으십니까? 지식을 사랑하여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심으십시오. 그러면 그 지식은 더 깊어져 온전히 나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모시는 성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내 안에 가두려 하지 마십시오. 먼저 성체조배와 기도를 통해 그분과 깊은 사랑의 친교를 이루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나의 삶을 통해 어디에 심겨지고 싶어 하시는지, 어느 영혼에게 가고 싶어 하시는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나의 시간과 노력, 나의 삶을 기꺼이 심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수많은 열매를 영원히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쌓는 사람이 아니라 심는 사람이 됩시다. 두려움으로 붙잡지 말고, 사랑으로 내어놓읍시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을 가진 자, 하느님 나라의 참된 소유주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본당 신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콩깍지가 씌었어요.”
 
우리 본당 아이들을 좋아하고 또 아이들을 칭찬하는 저를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다르게 보려 해도 아이들은 너무나 착하고, 또 미사도 얼마나 열심히 참석하는지 모릅니다. 어느 신부님께서는 어린이 미사와 청소년 미사가 제일 힘들다고 하는데, 저의 경우는 우리 성당 아이들과 함께하는 미사가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주면 줄수록 저의 기쁨도 커지면서, 감사의 마음이 계속해서 생깁니다. 
 
감사는 풍요의 감각을 만들고, 이로써 행복의 감정을 일으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하느님께 콩깍지가 씌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께 받은 선물을 헤아리며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또 그 안의 풍요로움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은 이미 풍요롭고 충분합니다. 자료에 따르면, 지구상에는 80억여 명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한 식량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세계 곳곳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각자가 자기 몫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과 이기심이 감사의 마음도 행복의 마음도 지워 버리는 것입니다. 
 
대신 콩깍지가 씌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동시에 사랑으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기보다 더 많이 주는 데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때 진짜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라고 하십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는 인간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마음을 닫아버리는 사람은 듣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하시면서 열린 마음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콩깍지가 씐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헤아리면서 감사할 수밖에 없고, 그 안의 풍요로움을 느끼면서 행복하게 됩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라고 하십니다.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넉넉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닫힌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빈곤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나무는 열매로 말하고 사람은 행동을 보면 인간됨을 알 수 있다. 호의를 베풀면 우정을 얻고 친절을 베풀면 사랑을 거두리라 (성 바실리우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이 말씀 앞에 머물러 있다는 것 자체가 은총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겸손한 마음에만 드러납니다. 마음의 열린 정도가 은총의 깊이입니다.

복음은 마음의 문이 열릴 때 확연히 들립니다. "허락되었다"는 것은 자격이 아니라 은총입니다. 신앙은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은 단지 지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회심을 요구합니다. 깨달음은 책임을 동반합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가 허락된 사람은 이제 그 신비를 살아내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신비가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복음을 묵상하고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이 자체가 이미 큰 은총이며 선택된 자리입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신비가 허락된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이 은총 앞에 오늘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비는 감사이고 비유는 자비의 표현이고 신앙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마태오복음 13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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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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