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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7/28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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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한마음으로 모인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백성에게 권능과 힘을 주시네.

저희의 희망이신 하느님, 하느님이 아니시면 굳셈도 거룩함도 있을 수 없고 하느님만이 저희를 지켜 주시니 풍성한 자비로 저희를 보살피시고 이끄시어 저희가 지금 현세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며 영원한 세상을 그리워하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7월 28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탈출 32,15-24.30-34)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13,31-35)
    겨자씨는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

 

 

 

탈출 32,15-24.30-34
오늘 제1독서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 무렵 

15 모세는 두 증언판을 손에 들고 돌아서서 산을 내려왔다. 그 판들은 양면에, 곧 앞뒤로 글이 쓰여 있었다. 

16 그 판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며, 그 글씨는 하느님께서 손수 그 판에 새기신 것이었다. 

17 여호수아가 백성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진영에서 전투 소리가 들립니다.” 하고 모세에게 말하였다. 

18 그러자 모세가 말하였다. “승리의 노랫소리도 아니고 패전의 노랫소리도 아니다. 내가 듣기에는 그냥 노랫소리일 뿐이다.” 

19 모세는 진영에 가까이 와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과 수송아지를 보자 화가 나서, 손에 들었던 돌판들을 산 밑에 내던져 깨 버렸다. 

20 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하였다. 

21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이 형님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그들에게 이렇게 큰 죄악을 끌어들였습니까?” 

22 아론이 대답하였다. “나리, 화내지 마십시오. 이 백성이 악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23 그들이 나에게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저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빼서 내시오.’ 하였더니, 그들이 그것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불에 던졌더니 이 수송아지가 나온 것입니다.”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큰 죄를 지었다. 행여 너희의 죄를 갚을 수 있는지, 이제 내가 주님께 올라가 보겠다.” 

31 모세가 주님께 돌아가서 아뢰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 

3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에게 죄지은 자만 내 책에서 지운다. 

34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일러 준 곳으로 백성을 이끌어라. 보아라, 내 천사가 네 앞에 서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내 징벌의 날에 나는 그들의 죄를 징벌하겠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3,31-35
오늘 복음

겨자씨는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31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28일
양두승 미카엘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4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나는 어떤 우상을 가지고 있는지요?

오늘 독서의 앞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수송아지 상을 만들어 자기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주님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수송아지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치며 먹고 마시는 가운데 흥청거리며 놉니다(탈출 32,4.6 참조).

하느님과 계약 관계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수송아지 상을 숭배하여 십계명의 첫째 계명을 깨면서 그분과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시고 글씨를 새기신 돌판을 모세가 깨 버린 것은 이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가 깨짐을 뜻하며, 모세의 화는 하느님의 화를 닮았습니다(32,10 참조).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은 이리도 빨리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깨뜨렸을까요? 그들은 그분의 막강한 현존을 체험하였지만, 모세의 부재로 암시되는 하느님의 부재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자신들을 이끌어 주셨는데, 그 모세가 시나이산 위로 올라가 사십 일 밤낮을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떠나 있었습니다(24,18 참조). 그래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 대신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신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 보이지도 잘 느껴지지도 않는 하느님 대신에 당장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에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내 옆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우상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을 식별하는 방법은 그에 대하여 집착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나는 어떤 우상을 가지고 있는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복음의 겨자 씨를 뿌리자!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오늘도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첫째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로서 겨자씨는 하늘나라인데 어떤 사람이 그 씨를 자기 밭에 뿌린다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세 요소는 ‘어떤 사람’과 ‘겨자씨’와 ‘자기 밭’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이라고 하심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겨자씨 곧 하늘나라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주어지고 너에게도 주어지는 것으로서 누가 심든 주어지는 대로 겨자씨를 심기만 하면 그 씨는 크게 자라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씨가 중요합니다. 사실 씨란 겨자씨뿐 아니라 모든 씨가 작고, 작지만 크게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겨자씨 곧 하늘나라라는 씨를 뿌려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 씨를 뿌린다거나 악마의 씨를 뿌린다거나 욕망이라는 씨를 뿌릴 경우, 그때가 문제이고, 그 사람이 문제입니다. 자기 씨를 뿌리면 자기가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이고, 악마의 씨를 뿌리면 악이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이며, 욕망이라는 씨를 뿌리면 욕망이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밭’이 자기 마음일 수도 있지만 자기 교회나 자기 사업이나 자기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교회에 자기 씨를 심으면 자기 교회는 하늘나라로 성장하지 않고, 자기 소유의 나라가 되고 말 것이고 자기 교회가 대형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개신교 많은 대형 교회가 이런 식으로 커진 교회이고, 가톨릭의 경우엔 성당이 사제 개인의 소유는 아니지만 본당이 하느님 중심의 하느님 나라가 자라게 하는 사목이 아니라 자기가 왕인 양 자기중심의 사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겨자씨 곧 하늘나라의 씨앗을 뿌리는 사목이 아닌 겁니다.  

자기 사업이나 계획도 하느님 사업이나 계획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식당에 가면 네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하다는 성경 구절을 달아놓곤 하는데 이처럼 자기 사업이 번창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는 협동조합과 식당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게 이 사업이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 방송을 타면 좋겠다고도 하십니다.  

저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고 그래서 그것이 유혹으로 다가올 때도 있는데 저는 그것을 항상 경계하고 그럴 때마다 단호하게 끊어버립니다. 프란치스코가 세운 작은형제회의 작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작은형제회가 자기 수도회가 될까 봐 조심하였고, 작은형제회가 큰 수도회가 될까 봐 더 조심하고 그래서 형제들의 수가 갑작스럽게 늘어나는 것도 걱정했습니다.  

사실 수도회가 큰 것이 중요하지 않고 복음적인 것이 중요하고, 형제들의 숫자가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한 명이라도 프란치스칸다운 프란치스칸이 있는 것이 좋겠지요. 제가 가끔 얘기하듯 저와 같은 사람 수만보다 프란치스코 성인 한 분이 세상을 진정 복음화하잖습니까? 그러므로 우선 내 안에, 다음으로 우리 공동체에 복음의 겨자씨를 뿌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해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에 이어,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 31)

‘겨자씨’는 유다 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밭’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가 모든 인류를 품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아니, 오히려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신께서도 아주 작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는 말에서, “깃들다”(κατασκηνω)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으로 반죽되는 것’이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 않습니다. 단지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일 뿐입니다. 그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밀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3,31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지 않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혹시 누군가의 삶의 이야기나 그가 남긴 말 한마디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마치 내 이야기처럼 곱씹고 또 곱씹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혹은 한 위인의 일대기를 듣다가, 그 사람의 삶이 통째로 내 마음에 들어와 나의 생각과 방향을 바꾸어 놓는 그런 체험 말입니다. 위대한 사랑을 품은 이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잘 쓰인 이야기, 즉 ‘비유’가 됩니다.  

오늘 복음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유는 비유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삶으로 이 비유를 증명해내면 그것은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가 되고 누룩이 되셔서 진리로 보여주셨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던 임진왜란의 바다로 가봅시다. 영화 ‘명량’은 당시의 절망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133척이 넘는 왜군 함대 앞에 남은 것은 고작 12척의 낡은 배. 모두가 공포에 질려 더 이상 나아가기를 주저합니다. 이순신에게 고대 병법서인 『오자병법』의 구절인,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그러나 다른 장군들은 그 진리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감히 싸우러 나서지 않습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 혼자만이 홀로 적진을 향해 노를 젓습니다. 그리고 홀로 수많은 적과 싸워 이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때 다른 장군들에게도 그 말씀이 진리로 다가옵니다. 그러자 그들도 실천할 힘이 생깁니다. 이순신 장군 스스로 진리를 비유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 씨앗은 그들의 내면에서 순식간에 자라나,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들도 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함께 달려들자, 수많은 일본 배들이 줄행랑을 치고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스스로 작은 씨앗이 되셨고 많은 이들의 그늘이 되어주셨습니다. 땅으로 내려오셔서 안식일 법을 어긴다고 나무라는 바리사이들 앞에서 제자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도 그러한 삶이 행복인 것을 믿고 자신들도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힘든 이들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때 참으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낍니다.

누룩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하느님이시자 스승이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서로 자신들이 높다고 주장하던 제자들의 마음이 누룩으로 부푼 빵처럼 부드러워졌습니다.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양식이 되어주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 실현된 비유를 보며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참 진리를 믿게 되고 실천하는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진리는 실천된 비유로만 전달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5세기의 로마, 당시 로마는 끝없는 전쟁과 정치적 암투, 도덕적 타락으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노르치아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젊은이, 베네딕토는 그 안에서 깊은 회의와 영적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는 이대로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서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수비아코의 한 동굴로 들어갑니다. 

그는 그곳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3년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오직 하느님과 단독으로 마주하며 자신의 내면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깨닫습니다. 즉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단순하지만 위대한 규칙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믿을까요? 

베네딕토 성인은 단순한 말의 가르침을 넘어 자신의 삶으로 그 진리가 실현된 비유가 되게 하였습니다. 수도 공동체를 세우고 그 공동체 안에서 8시간 일하고, 8시간 기도하고, 8시간 쉬는 규칙을 만듭니다. 그렇게 사는데도 행복한 모습을 유지하는 베네딕토 성인을 보며 많은 이가 일하고 기도하라는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천 년 이상을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심긴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야고 1,21-22)

그렇습니다.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나를 통해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삶이 그 말씀이 진리임을 증거하는 하나의 비유가 됩니다. 이것이 진리를 전하는 방식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편지’, 즉 세상이 읽을 수 있는 ‘살아있는 비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과 같습니다. 우리는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실천된 비유들입니다. 그 비유의 가치는 영원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겨자씨는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전에 읽었던 소설책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평범한 외판원인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착실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커다란 벌레가 되었습니다. 왜 벌레가 되었는지 이유도 또 설명도 없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살 속에 파묻히면서 심한 상처와 염증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다 조용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신학생 때 이 책을 읽고는 곧바로 “뭐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이 줄거리를 들은 분들 역시 “뭐야?”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책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최고의 극찬을 받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책입니다. 

처음에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몇 번을 읽게 만들고 계속 생각나는 내용입니다.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 고독, 정체성 상실 등에 대해, 또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심지어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공동체마저도 이기적일 수 있음을 날카롭게 보여주는 깊이 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렇게 깊이 있는 내용이지만, 계속 읽지 않고 또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힘든 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말씀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 말씀도 단번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읽고 마음에 새기면 두고두고 자기 삶 안에서 그 깊이가 드러나게 됩니다. 딱 한 번 읽고 도저히 모르겠다고 포기한다면, 세상의 어떤 책보다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책을 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먼저 겨자씨의 비유로, 작고 보잘것없는 씨앗이 성장하여 많은 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나무가 되는 모습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이야기합니다. 다음으로는 누룩의 비유로, 은밀히 작용하는 누룩이 밀가루 전체를 변화시키듯 하느님 나라가 세상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이 작고 보잘것없는 시작 같지만,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시어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안식처를 제공하실 것임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쉽고 편안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배려 깊은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 (괴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작음 속에 감추어진 위대함이 있습니다. 겨자씨같이 겉보기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세상을 바꾸는 생명의 강력한 잠재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겨자씨는 자라는 동안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풀보다 더 크게 자라 나무처럼 되며 새들이 깃드는 쉼터가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성장시키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크고 화려한 성취보다 작은 시작 안에 담긴 믿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씨앗은 겉모습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자랍니다. 진정한 변화는 안에서 밖으로 작음에서 충만함으로 시간과 인내를 통해 조용히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천천히, 그러나 깊이 자라나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조급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때에 반드시 결실을 맺게 하십니다.

작음 속에 담긴 무한함이며 겸손 속에 깃든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오늘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겨자씨는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13장 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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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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