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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8/01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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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하느님, 하느님의 교회에 언제나 새로운 덕행의 모범을 보여 주시니 영혼들을 사랑하는 복된 알폰소 주교의 열정을 본받아 저희도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그가 받은 상급을 받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8월 1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1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레위 23,1.4-11.15-16.27.34ㄴ-37)
    너희는 주님의 축일들에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한다.

  • 오늘 복음
    (마태 13,54-58)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레위 23,1.4-11.15-16.27.34ㄴ-37
오늘 제1독서

너희는 주님의 축일들에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한다.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4 “너희가 정해진 때에 소집해야 하는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은 이러하다. 

5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 어스름에 주님의 파스카를 지켜야 한다. 

6 이달 보름에는 주님의 무교절을 지내는데,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7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8 그리고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9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0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가서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너희 수확의 맏물인 곡식 단을 사제에게 가져와야 한다. 

11 사제는 그 곡식 단이 너희를 위하여 호의로 받아들여지도록 주님 앞에 흔들어 바친다. 사제는 그것을 안식일 다음 날 흔들어 바친다. 

15 너희는 안식일 다음 날부터, 곧 곡식 단을 흔들어 바친 날부터 일곱 주간을 꽉 차게 헤아린다. 

16 이렇게 일곱째 안식일 다음 날까지 오십 일을 헤아려, 새로운 곡식 제물을 주님에게 바친다.’ 

27 또한 일곱째 달 초열흘날은 속죄일이다.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고행하며,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34 ‘이 일곱째 달 보름날부터 이레 동안은 주님을 위한 초막절이다. 35 그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6 너희는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 이날은 집회일이므로, 너희는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7 이는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로서, 이때 너희는 그날그날에 맞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과 희생 제물과 제주를 주님에게 화제물로 바쳐야 한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3,54-58
오늘 복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1일
이재원 베드로 신부

 

✚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소개 00:06

✚ 8월 교황님 미사 지향 01:19

✚ 미사시작 01:36

✚ 강론시작 09:3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삼대 순례 축제가 있었습니다. 무교절(파스카 축제)과 주간절(오순절)과 초막절입니다. 그 밖에도 유다인들은 안식일, 초하룻날, 첫째 달 초하룻날, 일곱째 달 초하룻날, 안식년, 희년과 같이 ‘정해진 때’의 축제들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 축제들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시나이 계약으로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으며, 그들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 거룩하다는 것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이 축제 규정은 무엇보다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거룩한 율법에 속하였습니다.

한편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교 출신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대상으로 집필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구약 성경과 연속성 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고향 사람들의 반응에 집중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 앞에서, 유다인들은 그분의 인간적 배경만을 따집니다. 인간적 요소들에 걸려 넘어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교회 전통에 따른 전례력과 축제일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입니까? 우리 신앙 여정의 중심은 율법의 완성자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다른 인간적 요소들에 머물러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얻지 않고 받아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주님의 고향 사람들은 제가 볼 때 주님의 고향 사람답지 않습니다. 개천에서 용 나온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주님을 전혀 이해치 못하는 그런 곳에서 어떻게 주님과 같은 분이 나왔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기에 입장을 바꿔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장에서 주님 같이 대단한 분이 나온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고향 사람이나 저나 시골구석에서 그리고 목수집안에서 대단한 영적 지도자가 나온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고, 신적인 존재가 나온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키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보이신 지혜나 기적의 힘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러기에 그것들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자명합니다. 그것은 하늘에서부터 온 것이고 하늘에서부터 온 것이기에 얻은 것이기보다는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200주년 성서는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를 “어디서 이 사람한테 이런 지혜와 기적들이 내려올까?”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신적인 지혜와 기적의 힘은 하늘로부터 얻어야 하고 얻는 것이기보다는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기도의 힘입니다.  

제자들이 악령을 쫓아내지 못하자 왜 자기들은 주님처럼 악령들을 쫓아내지 못하는지 묻는 복음의 대목이 있지요. 기도하지 않고서는 악령을 쫓아낼 수 없다고 주님께서 답하시는데 주님과 제자들의 차이가 여기에 있고 주님과 우리의 차이도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대뜸 우리도 기도한다고 대답을 하겠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받는 기도를 하지 않고 얻으려는 노력을 합니다. 제 생각에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애쓰는 것, 달리 말하면 고달픈 수고나 노동이 아니고, 매우 편하고 수동적인 것, 달리 말하면 주시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엄마는 밥을 먹여줍니다. 어린아이는 떠주는 밥을 아 하고 받아먹기만 하면 됩니다. 지혜와 기적의 힘은 애써 얻는 것이 아니라 자녀답게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받는 겁니다.  

주님의 고향사람들은 육신의 부모를 아버지라고 했고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고향사람들과 주님의 결정적인 차이이고 이것이 우리와 주님의 차이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워했습니다.’(마태 13,54 참조).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태 13,57 참조).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대체, 왜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놀라워하면서도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마태 13,55-56)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앎은 확고부동했습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왔습니다. 결국, 자신이 ‘아는 것’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 곧 ‘자신이 안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 곧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완고함’은 불신의 씨요,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의 변형’을 이루는 일, 그것이 ‘믿는 이의 모습’일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3,57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겸손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며
따름으로 믿음을 
실현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아직도 신앙을 위해 A.I.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안녕하십니까. 오늘 강론 제목을 보고 조금 놀라거나, 어쩌면 불편하게 느끼는 분도 계실 겁니다. “신부님, 어떻게 거룩한 신앙의 문제를 인공지능 같은 기계에 이야기하십니까?”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바로 이 불편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익숙함’이라는 안전한 감옥에 갇혀 살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 보면, 50년 동안 감옥에서 산 ‘브룩스’라는 노인이 나옵니다. 마침내 가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그는 기뻐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모든 것이 낯선 바깥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브룩스, 여기 왔다 감”이라는 글씨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에게 감옥은 고통의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50년 동안 그를 길들인 유일하게 ‘익숙한’ 세상이었습니다. 자유라는 구원의 목소리가, 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지옥처럼 들렸던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 역시 이 브룩스의 모습이 제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사제가 된 후, 매일 비슷한 전례와 사목 활동 속에서 안주하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저는 또 다른 익숙함의 감옥에서 탈출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오늘 이 강론을 준비하면서,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제 생각을 정리하고, 더 좋은 예화를 찾고, 더 명료한 문장을 만드는 데 이 새로운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부님이 기도와 묵상으로 준비하셔야지, 어떻게 기계에 의존하십니까?”라고 걱정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기도와 묵상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깊게 만들어주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과거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최신 인쇄술로 만들어진 성경 주석서를 보며 연구했듯, 우리도 이 시대의 새로운 도구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익숙한 방식만이 거룩하다고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창의성과 활력을 죽이는 ‘브룩스의 감옥’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 자체가 바로 이 익숙함과의 싸움이었습니다. 313년, 신앙의 자유가 찾아오자, 어떤 이들은 그 ‘안전하고 익숙해진’ 신앙을 피해 스스로 척박한 사막으로 떠났습니다. ‘사막의 안토니오’ 성인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와 편안함을 버리고, 일부러 고통스러운 광야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교회의 새로운 영적 심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편안함이 영혼을 잠들게 하는 독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가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지혜와 기적에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들의 ‘익숙함’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 저 사람이 저 모든 것을 어디서 얻었을까?” (마태 13,55-56) 

그들의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가 “A.I.가 뭘 안다고 신앙에 대해 말해?”라고 묻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아는 평범한 이웃, 자신들의 통제와 예측 안에 있는 존재로만 보려 했습니다. 그들의 익숙함이, 눈앞에 있는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가능성 앞에서 “저 사람은 우리와 똑같잖아!”라는 핑계를 대며 그분을 거부합니다.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마태 13,58)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불신, 즉 ‘익숙함이라는 감옥’에 갇혀 문을 열고 나오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기적을 걷어찬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언제나 두 개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는 사탄의 목소리입니다. “머물러라. 여기가 가장 안전하다. 새로운 것은 위험하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목소리입니다. “일어나 가자! 두려워하지 마라.” 이것은 아브라함을 고향에서 떠나게 하고, 안토니오 성인을 사막으로 이끌고,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는 목소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떠나는 여정’입니다. 익숙한 나를 떠나 새로운 나로, 낡은 세계를 떠나 하느님의 나라로 나아가는 끊임없는 출발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은 나의 낡은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나를 깨우는 새로운 스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시작됩니다. 

이번 한 주, 이렇게 한번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A.I.는 별거 없어’라는 익숙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열어 딱 한 번만이라도 신앙을 위해 사용해 보는 겁니다. 이렇게 질문해 보십시오.  

“오늘 복음 말씀을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줘.” 혹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 잘 몰랐던 이야기 하나만 해 줘.”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그 도구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향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익숙함의 감옥 문을 열고 첫걸음을 내디딜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으로 당신의 기적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19세기 말, 구한말의 고종 황제는 땅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고종 황제는 이 모습을 보고서 어떤 말을 했을까요? 혀를 차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 
 
지금이야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두 잘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운동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라고 합니다. 이때 나왔던 표어가 우리가 잘 아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이렇게 다른 생각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맞다고 하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아니, 어떻게 저런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지?”라면서 틀린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는 지금 우리의 생각이 무조건 정답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부정하고 미워하며 단죄하는 그 모든 것 역시 시간이 지나면 틀린 것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며, 특별히 주님의 뜻에 비추어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으로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로운 가르침과 기적에 놀라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마태 13,55.56) 
 
목수라는 직업은 당시 사회적으로 평범한 신분에 해당합니다. 또한 누이들과 함께 살고 있음을 말하면서, 예수님을 특별한 출신이 아닌 그냥 ‘동네 청년’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계시지만, 정작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와 다를 것이 없다는 교만함, 예수님을 잘 안다는 익숙함을 가지고 있기에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 없는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두꺼운 벽이 되고 맙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8) 
 
예수님의 능력이 제한된 것이 아니라, 기적은 믿음을 통해 받아들여지고 열매 맺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믿지 않음은 은총을 가로막는다는 것이지요.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틀린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편견과 세속적 기준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교만함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부드러움이 억셈을 이기고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 그러므로 혀는 오래가나 이는 억세어서 부러진다 (명심보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보이지 않는 은총의 흐름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이렇듯 겉모습 너머, 조용히, 그러나 깊이 심오한 내면과 그분의 뜻 안에서 흘러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이들 안에서 크신 일을 이루십니다. 예수님 역시 평범한 인간의 모습 속에 하느님의 지혜를 감추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은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하며 놀라워했지만, 그분의 깊이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도 그와 같은 시선을 받았던 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겉이 아닌, 은총 안에서 사람을 바라본 이였습니다.

우리도 오늘, 얼마나 자주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 않나요? 진정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뿌리 내린 신뢰의 시선입니다.

성 알폰소는 "기도하지 않는 이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만큼, 기도의 절대적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특히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곁에 머물며,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며, 그 사랑 안에서 자기 희생과 내면의 회개를 실천했습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사랑도 깊어서, 성모님을 '죄인의 어머니', '은총의 중재자'로 믿고, 그분을 통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알폰소의 영성은 죄책감보다는 희망을, 율법보다는 자비를, 이론보다는 기도를, 권력보다는 섬김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과 가르침은 오늘날 상처 입은 영혼과 가난한 교회를 위한 귀중한 길잡이가 됩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완벽하길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평범한 일상, 작은 사람들, 그리고 부족한 우리 자신 안에서도 조용히 충만히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 은총을 믿습니다.

 

 

 

마태오복음 13장 56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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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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