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저의 도움, 저의 구원은 주님이시니, 주님, 더디 오지 마소서.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니 주님을 창조주요 인도자로 모시는 이들과 함께하시어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 모든 것을 지켜 주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민수 12,1-13)
모세는 다른 예언자와 다르다.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도 없이 그를 비방하느냐? - 오늘 복음
(마태 14,22-36)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민수 12,1-13
오늘 제1독서
모세는 다른 예언자와 다르다.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도 없이 그를 비방하느냐?
그 무렵
1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미르얌과 아론은 모세가 아내로 맞아들인 그 에티오피아 여자 때문에 모세를 비방하였다.
2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주님께서 이 말을 들으셨다.
3 그런데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
4 주님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르얌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셋은 만남의 천막으로 나오너라.” 그들 셋이 나오자,
5 주님께서 구름 기둥 속에 내려오시어 천막 어귀에 서시고, 아론과 미르얌을 부르셨다. 그 둘이 나와 서자
6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말을 들어라. 너희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으면 나 주님이 환시 속에서 나 자신을 그에게 알리고 꿈속에서 그에게 말할 것이다.
7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는 사람이다.
8 나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그와 말하고, 환시나 수수께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도 없이 나의 종 모세를 비방하느냐?”
9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시며 떠나가셨다.
10 구름이 천막 위에서 물러가자, 미르얌이 악성 피부병에 걸려 눈처럼 하얗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론이 몸을 돌려 미르얌을 보자, 과연 그 여자는 악성 피부병에 걸려 있었다.
11 아론이 모세에게 말하였다. “아, 나의 주인님, 우리가 어리석게 행동하여 저지른 죄의 값을 우리에게 지우지 마십시오.
12 미르얌을, 살이 반은 뭉그러진 채 모태에서 죽어 나온 아이처럼 저렇게 놓아두지 말아 주십시오.”
13 그러자 모세가 주님께 “하느님, 제발 미르얌을 고쳐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마태 14,22-36
오늘 복음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물에빠져들기시작하자, “주님, 저를구해주십시오.” 하고소리를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35 그러자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왔다.
36 그리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5일
강철호 세례자요한 신부
✚ 교황님 8월 기도지향 00:20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9:12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인생과 마찬가지로 신앙 여정도 언제나 잔잔한 바다나 장밋빛 꽃길일 것이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의심과 두려움의 풍랑과 가시밭길을 지나 회복 탄력성, 곧 실패나 좌절을 이겨 내고 안정된 심리적 상태를 되찾는 힘을 키우는 것이 오히려 신앙생활에서 현실적이며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오늘 독서는 모세를 비방하는 미르얌과 아론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만남의 천막에 나타나시어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도 없이, 나의 종 모세를 비방하느냐?”(민수 12,8)
곧이어 미르얌은 피부병에 걸립니다.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던 모세의 위치를 의심한 결과라 볼 수 있지요. 그러나 모세는 하느님께 누이를 고쳐 주십사 간절히 청합니다.
의심과 두려움이라는 주제는 오늘 복음에서도 나타납니다. 파도로 흔들리는 배 위에 있던 베드로는 새벽녘 호수 위를 걸어오는 유령 같은 형체를 알아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리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하시며 그를 안심시키십니다. 곧이어 스승의 분부대로 물 위를 걷게 된 베드로는 거센 바람을 보자 또다시 두려워졌습니다. 의심과 두려움은 마침내 그를 물속에 빠지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십자가를 없애 주시는 ‘쉽고 뻔한 길’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는 길, 이른바 ‘돌아가는 길’을 제시하실 때가 많은 듯합니다.
인생이라는 호수 위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떠 있는 신앙 여정에서 의심과 두려움은 삶의 균형과 방향을 잃게 합니다. 그때마다 예수님 말씀을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무엇을 볼 것인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베드로 사도가 물위를 걷는 얘기는 마태오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의 구성은 참으로 뜬금없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움에 빠지는 것은 마르코복음에서도 같은 식으로 기술을 하고 이해할 만하지만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는 베드로 사도의 얘기는 그 상황에서 너무도 이상합니다.
그렇게 두려운 바다라면 거기서 살려달라고만 얘기하지 그 두려운 바닷물 위를 걸어갈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걸어갈 엄두는 내지 못할 겁니다.
그러므로 마태오가 이 얘기를 집어넣은 것은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점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고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이지요.
헌데 참 이상한 것은 우리 인간이 두려워하며 본다는 겁니다.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고 두려우면 더더욱 안 보면 되는데 두려운 것이 있으면 안 볼 수가 없고 두렵기에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운 것은 안 볼 수가 없고 두렵기에 보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로잡히고 빠지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두려움에 빠지지요. 우리 인간은. 이것은 좋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너무도 좋거나 너무도 아름다우면 그것도 우리 시선을 잡아끌고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니까 웬만큼 좋거나 아름다우면 우리를 잡아끌거나 사로잡지 못하고 웬만큼 싫거나 보기 싫어도 우리를 잡아끌거나 사로잡지 못하지만 너무 좋으면 우리를 사로잡고, 너무 싫고 두려워도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니 선도 극단적으로 가면 우리를 사로잡지만 악도 극단적으로 가면 우리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뱀과 정말 아름다운 꽃이 같이 있다면 우리는 무얼 볼까요?
거의 대부분의 우리는 꽃이 아니라 뱀을 볼 것입니다. 마귀와 하느님이 같이 계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없다면 하느님이 아니라 마귀를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눈은 감성의 눈을 초월하는 것이며 분명한 하느님 선택이요 고도의 하느님 집중입니다. 줄타기처럼 늘 아슬아슬하게 하느님께 가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떨어져 집중치 못하면 두려움의 심연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을 박해시대의 신앙과 비교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박해는 우리로 하여금 순교와 배교 중 하나를 선택케 합니다.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정에 끌리는 순간,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두려움에 머무는 순간 배교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 아닌 것에 조금도 곁눈을 주지 말고 초고도의 집중력으로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두렵기에 하느님께 집중하고 두려울수록 하느님께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신앙이란 순종이 있을 때에만 참이다. 순종할 때에만 비로소 신앙은 신앙이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홍해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면서 당신께서 ‘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당신께서 바다의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욥기>에서도 또한 ‘하느님’을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욥 9,8)로 드러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는 동시에,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시며 야훼 하느님께서 현현하셨듯이, 예수님께서도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라는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저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돛을 올리고 맞바람과 풍랑을 헤치며 항해를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요,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오너라!”(마태 14,29)라는 주님의 말씀에 주저 없이 안전한 배에서 내려 파도가 이는 물 위를 걸어가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두려움에 휩싸여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떠받쳐주던 물이 이제는 그를 삼켜버리는 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안전한 배로 되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동료들에게 구명대를 던져달라고도 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 순간 눈은 들어 다시 ‘주님’이신 예수님께 향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마태 14,30)
그는 오로지 주님께만 희망을 두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믿음을 붙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그렇습니다. 신앙의 길은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그러기에,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풍랑이 이는 길을 떠나야 하고, 물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순종함으로써 신앙의 도약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변화는 하느님에 대해 알게 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복종할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신앙이란 순종이 있을 때에만 참이다. 순종할 때에만 비로소 신앙은 신앙이 된다.”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4,28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주님!
배안에 머물러 있기만을
고집하지 말게 하소서.
풍랑이 위협할지라도
믿음의 구명대를 입고
물위를 걷게 하소서.
삼킬 것 같은 풍랑이
오히려 저를 떠받들게 하시고,
넘어뜨릴 것 같은 거센 바람이
오히려 저를 이끌게 하소서.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신
당신이 바로
‘저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 삶을 기적으로 만드는 방법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소원이고 베드로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면 기적과 소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둘 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바란다는 점에서는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소원이 ‘그저 막연한 바람’에 머문다면, 기적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현실’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둘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삶을 소원의 영역에서 기적의 영역으로 옮겨갈 수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 나누려 합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길을 잃습니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사소한 고민부터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기로까지,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우리의 영혼은 오히려 더 가난해지는 역설을 경험합니다. 이 불안의 파도를 잠재울 명확한 목소리, “이 길로 가라!” 하는 단 하나의 명령을 우리는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체험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그분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내 온 존재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의 상식, 나의 경험, 나의 계산이 “불가능하다.”라고 소리칠 때, “아니다, 그분의 명령만 있다면 가능하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가장 숨 막히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인류를 구하기 위해 우주로 떠난 주인공이, 지구의 중력에 이끌려 맹렬히 회전하며 추락하는 우주정거장에 도킹을 시도합니다. 모든 데이터를 분석한 인공지능 컴퓨터 ‘타스(TARS)’는 0.1초의 오차도 없이 보고합니다. “불가능합니다(It’s not possible).” 확률적으로, 논리적으로, 계산적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완벽한 분석입니다.
하지만 주인공 쿠퍼는 그 냉철한 분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컴퓨터의 계산, 즉 눈앞의 ‘풍랑’을 넘어 자신의 목표를 바라보며 이렇게 답합니다. “아니, 필요하다(No, it’s necessary).” 이것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당위성의 문제라는 믿음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는 컴퓨터에게 불가능 보고를 멈추고, 자신이 도킹을 할 수 있도록 보조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명령이 인공지능의 계산을 뛰어넘어 불가능의 한계를 돌파하게 만듭니다.
역사는 이 명령이 한 개인의 운명을 넘어 한 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15세기 프랑스, 백년전쟁의 패배로 나라 전체가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을 때, 프랑스 동레미의 작은 시골 마을에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글도 읽을 줄 모르고, 전투 훈련은커녕 말 한 번 타본 적 없는 17세 소녀, 잔 다르크였습니다. 모두가 패배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때, 그녀는 홀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프랑스를 구하라.”
왕과 신학자들, 백전노장의 군인들까지 모두가 그녀를 비웃었습니다. 불가능을 넘어 망상이라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잔 다르크에게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녀의 심장을 관통한 그 명령은, 두려움에 떨던 왕세자를 일으켜 세웠고, 흩어졌던 군인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갑옷을 입고 군대의 선봉에 서서 오를레앙을 탈환하는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그녀의 지식이나 능력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세상의 소리를 압도하는 단 하나의 ‘명령’을 붙들었던 믿음이 나라를 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전능하신 분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명령’해주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왜일까요?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당신의 능력을 함께 펼쳐나가는 ‘협력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명령을 통해 우리가 무엇까지 할 수 있는 존재인지 스스로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신비는 놀랍게도 최신 기술 속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납니다. 요즘 유행하는 인공지능(AI) 그림 서비스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그림 그리는 능력이 전혀 없어도, AI에게 어떤 그림을 그려달라고 ‘명령’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명령, 즉 ‘프롬프트’가 결과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냥 “고양이 한 마리”라고 명령하면, 영혼 없는 합성물이 나올 뿐입니다.
하지만 “저녁노을 아래, 낡은 성경책 옆에서 두 손을 모으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아기 고양이를 렘브란트의 화풍으로 그려줘”라고 구체적으로 명령하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걸작이 탄생합니다. AI라는 전능한 화가는, 그 자신이 먼저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용자가 얼마나 구체적이고 창의적으로 ‘명령’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수준의 작품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 “주님, 알아서 잘 좀 해주십시오” 하고 퉁치는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거센 풍랑이 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베드로가 외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마태 14,28)
보십시오. 베드로는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라는 막연한 소원을 빌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명령’해달라고 구체적으로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너라.”(마태 14,29) 하고 명령하시자, 그 명령 한마디가 베드로를 배 밖으로 나오게 했고, 물 위를 걷게 했습니다.
삶이 기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구체적인 명령을 청하십시오.
“주님, 오늘 하루는 한 사람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하루가 되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주님, 오늘 제가 그동안 성당 안 나오는 아이에게 성당 나오라고 할 테니까, 기적적으로 성당 나오겠다고 대답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배우자를 더 깊이 사랑하는 일이든, 새로운 소명을 시작하는 일이든, 혹은 오래된 상처를 용서하는 일이든, 당신의 마음을 두드리는 그 명령을 청하십시오.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여 첫걸음을 내디딜 때, 당신의 삶은 소원의 바다를 건너 기적의 땅에 닿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제가 세례를 받은 날까지 제 삶의 이야기는 단순한 회심 이야기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의 회심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회심은 전 삶의 과정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튼의 글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회심과 같은 장면이 언제 우리에게 다가올까요? 세례받을 때, 고해 성사 때, 피정 때? 아니면 성품이나 혼인 성사 때? 이것도 아니라면 죽음의 순간일까요?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만 특별한 체험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특별한 체험을 했다면서 눈물 흘리며 신앙 고백하는 분도 많습니다. 이들은 이제 다시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며, 주님 뜻에 맞춰 살겠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영원할까요? 우리 인간은 죄로부터 너무 쉽게 걸려 넘어집니다. 그래서 특별한 체험을 했어도 몇 년이 지나 만났을 때, 냉담하고 있는 분도 꽤 많이 봅니다. 물론 이렇게 그 이유를 이야기하시지요.
“바빠서요.”
특별한 순간만 변화되고, 진정한 회심을 갖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말처럼 전 삶의 과정에서 이 회심이 진행되어야 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매일의 삶이 특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셔서 제자들에게 가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예수님을 보고서는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댑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기적을 처음 접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직전에 빵의 기적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일까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라는 예수님 말씀에 베드로가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 두려운 마음을 품고 물에 빠지고 맙니다.
빵의 기적만 체험했던 제자들이 아닙니다.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 역시 직접 목격했던 제자들이었니다. 그런 표징을 보았기에,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4,33)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특별한 체험을 통해 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커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순간의 거센 바람에도 쉽게 믿음을 내려놓는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우리입니다. 그래서 단 한 번의 강한 체험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 앞서 토마스 머튼의 말씀처럼, 전 삶의 과정에서 회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철저하게 주님께 의탁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베드로처럼, 세상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때 주님께서 손을 내미십니다. 이 주님의 손을 잡아야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데에는 하나의 비결이 있다.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샬돈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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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 14장 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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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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