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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8/06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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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구름 속에서 성령이 나타나시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 외아드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때에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 주시고 저희를 자녀로 삼으실 것을 미리 알려 주셨으니 하느님의 종인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8월 6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다니 7,9-10.13-14)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 오늘 복음
    (루카 9,28ㄴ-36)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다니 7,9-10.13-14
오늘 제1독서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9,28ㄴ-36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6일
김용주 마태오 신부

 

✚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6

✚ 강론시작 09: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기쁜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구약 성경이 신약 성경의 예고편이라면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완성이지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맞아 어머니이신 교회는 오늘 독서와 복음으로 무엇을 전할까요? 

구약 성경의 후기 문헌인 다니엘 예언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7,13)를 묘사합니다. 연로하신 분, 곧 하느님 곁으로 인도된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며, 민족과 나라, 언어가 다른 모든 이가 그를 섬기게 되었다고 서술합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하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묵시 문학적 메시지로 오늘 독서는 마무리됩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인간의 희로애락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심판관이나 초월적 통치자의 모습입니다. 

한편 다른 공관 복음서와 함께 루카 복음서는 영광에 싸여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를 전합니다. 구약 성경의 이 두 인물은 율법서와 예언서를 대표하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계시의 역사를 요약합니다.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둘과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베드로의 철부지 같은 제안이 무색하게 구름이 이 두 인물을 덮자,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다니엘서의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복음서에 이르러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재해석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분 나라의 공동 상속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힘이 없어도 믿음은 있는

오늘 독서와 복음의 얘기를 연결 비교하여 보면 재미있을 겁니다. 오늘 민수기는 가나안 가까이 파란 광야까지 온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곧 들어갈 가나안에 정탐대를 보내고 난 뒤 그 보고를 듣고 소동이 일어나는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앓고 있는 딸을 둔 이방 여인이 딸의 치유를 청하자 주님께서 이 모녀를 모욕하지만, 여인이 겸손과 믿음을 보이자 주님께서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는 내용입니다.  

민수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를 비하하고 믿지 못하는 데 비해 오늘 복음의 이방 여인은 겸손하면서도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과 비하, 믿음과 불신의 차이를 비교하면 유익할 겁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들어갈 가나안 토착민들과 비교하며 자기들을 메뚜기와 같다고 형편없이 비하합니다. 크고 강한 토착민과 그 앞에 있는 보잘것없는 자신을 보면 골리앗 앞의 사울과 그 군대처럼 졸아들어 그렇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지나친 자기 비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과 비하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겸손은 터무니없이 자기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자기를 보고, 그런 자기를 믿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정확한 자기 인식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고, 도움을 청할 것은 청합니다.  

이에 비해 자기 비하는 터무니없이 자기를 깎아내리기에 그런 자신을 믿을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신감이 없어 지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에 빠집니다.  

우리는 겸손해야지만 자신감도 있어야 합니다. 자신감이 없는 겸손은 사실 겸손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교만한 자신감을 많이 봤기에 자신감이 있게 뭘 하면 겸손한 것이 아니라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비하가 아니라 참으로 겸손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아닌, 그러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안에서 자신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히 인정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사람에게건 하느님에게건 도움을 잘 청하고 사람이건 하느님이건 잘 믿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을 보겠습니다. 같은 골리앗 앞에서 사울과 그의 군대는 졸아 지레 전쟁에 졌지만 다윗은 졸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골리앗을 때려눕혔습니다. 다윗은 결코 자기가 골리앗보다 크고 힘세다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졸지 않았으니 힘은 없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도 연약하였으나 믿음이 있었고 그래서 감히 이방 남정네와 상대할 수 없는 그때 예수님께 다가와 청합니다. 따가운 시선과 모욕도 두려워하지 않고 감수하고 감당합니다. 이것이 겸손한 믿음이고 겸손의 힘입니다. 힘이 없어도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제일 큰 힘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변모되고 싶다면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해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곧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이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주시고,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변화의 힘을 입습니다. 그 힘을 입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었다.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고”(탈출 24,15-16)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마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었”(루카 1,35)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께서 오늘 우리를 그 빛나는 구름으로 덮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의 크신 자비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토록, 아버지께서는 변화의 힘을 주시고, 그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다니엘 예언자의 환시를 통해, 장차 벌어질 사람의 아들의 영광된 모습과 통치를 미리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 역시 장차 있을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직전에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던 중에 변모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단지 예수님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만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도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길’도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이는 당신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곧 우리가 어떻게 살 때 변화를 입을 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사는 일이며, 그렇게 살 때 변화를 입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이요, 들려오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말씀의 권능을 수락하는 일’이요, ‘말씀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될 것’(에페 2,21-22 참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자신이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명’(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9,35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
말씀 아래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말씀이 제게서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에 응답하는 일, 
바로 그 일을 
제가 하게 하소서.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변모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오늘 말씀의 그늘 아래에서 
비천한 제 몸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께서 타볼산에 오를 때 이미 당신이 변하실 것을 아셨을까?

찬미 예수님!

새해 첫날 헬스클럽은 왜 늘 인산인해를 이룰까요? 그리고 한 달 뒤에는 왜 그토록 텅 비어 버리는 걸까요? 우리는 모두 더 나은 내가 되기를 꿈꾸며 ‘변화’를 시도하지만, 그 결심이 작심삼일로 끝나고,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보며 실망하곤 합니다.
왜 포기할까요? 어쩌면 이제 변하는 것보다 편하게 먹고 마시는 것을 더 좋아하기를 선택하였거나, 혹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일단 돈까지 줬으면 결과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이것을 끝까지 버티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기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변한다’라는 사실을 온전히 믿지 않으면 기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요즘 성당에서는 아이들 신앙학교가 한창입니다. 제가 겪은 일 중에 재미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개신교 신앙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오늘 밤 기도회에서 주님을 만날 거야!’, ‘뜨겁게 찬양하다 보면 성령을 체험할 거야!’ 하는 아주 강한 기대를 품고 갑니다. 그리고 정말 밤새 울고 웃으며 기도하면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뜨겁게 체험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톨릭 신앙학교는 어떻습니까? 물론 즐겁고 유익하지만, ‘기도해서 내가 변할 수 있다’, ‘기도 중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는 상대적으로 약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안타깝게도, 성당에 열심히 다니던 아이가 친구를 따라 개신교 수련회에 갔다가, 난생처음으로 몇 시간씩 뜨겁게 기도하는 체험을 하고 와서는 “신부님, 하느님은 정말 살아계셨어요!” 하고 고백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기도를 대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올라가셔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실 때, 홀로 계시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났습니다. 왜 하필 이 두 사람이었을까요? 이들은 바로 기도를 통해 우리가 변화되는 두 가지 핵심 통로, 즉 ‘은총’과 ‘진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우리의 이성이나 노력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하늘에서 거저 주어지는 뜨거운 ‘은총’의 불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법, 즉 십계명을 받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삶의 기준이 되고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변화는 바로 이 두 기둥, 즉 불같은 은총과 빛 같은 진리를 통해 일어납니다. 기도 안에서 만나는 이 두 가지는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나를 변화시키는 핵심 요인들입니다.  

먼저, ‘은총’의 불로 변화된 한 남자, 영화 ‘미션’의 주인공 로드리고 멘도사가 있습니다. 그는 동생을 죽인 끔찍한 죄책감에 폐인이 된 채, 자신의 죄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갑옷 뭉치를 밧줄로 묶어 몸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끌고 미끄러운 바위를 기고, 거친 폭포수를 맞으며 절벽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말로 하는 기도가 아닌, 그의 ‘몸으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그가 변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그 끔찍한 길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가 과거에 노예로 잡아들였던 과라니족 원주민 한 명이 다가와, 그의 목에 걸린 무거운 밧줄을 칼로 끊어줍니다. 순간, 갑옷 뭉치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나가고, 멘도사는 어린아이처럼, 혹은 한 마리 짐승처럼 통곡합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 안에서 받는 ‘은총의 불’의 열매입니다. 자신이 가장 상처 주었던 사람의 용서라는, 하늘에서 떨어진 불과 같은 은총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변모하기 위해 올라간 모습이 예수님께서 기도하기 위해 타볼산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이런 뜨거운 은총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여기 또 한 명의 남자가 있습니다. 서양 역사상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가졌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서는 한 발짝도 빠져나올 수 없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가 절망의 끝에서 울고 있을 때, 어디선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하고 외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성경을 펼쳤고, 그의 눈에 들어온 구절은 이것이었습니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로마 13,13-14)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합니다. 그 구절을 다 읽는 순간, 마치 ‘확신의 빛’이 자기 마음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의심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말입니다. 그는 ‘대낮’에 행동하듯이, 즉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살아가라는 그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 한 문장의 진리가, 칼이 되어 그의 과거를 잘라냈고, 빛이 되어 그의 미래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 말씀으로 바로 바뀌었을까요? 매일 빛 속에서 죄의 어둠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과 싸우면서 조금씩 변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복음은 분명히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루카 9,29)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그냥 일어난 신기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본질을 알려주시기 위해, ‘내가 기도하면 어떻게 변하는지 잘 보아라. 그리고 너희도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 하고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바로 ‘기도란 나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청하려고 하는 다른 모든 것들은 덤으로 얻어지게 됩니다. 내가 변하지 않아 은총을 청해도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큰 형님은 한때 매일 가위에 눌려 힘들었을 때 자기 전에 성호를 긋고 잤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처럼 가위에 눌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계속 성호를 그었고, 지금은 성당에 아주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열매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하느님을 바꾸거나 이웃을 바꾸거나 환경을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먼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제가 많은 책을 읽는다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우선 읽은 책이 많을까요? 아니면 읽지 않은 책이 많을까요? 당연히 이 세상의 책 중에서 읽지 않은 책이 훨씬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읽었다는 고전 중에서도 읽지 않은 책이 많고, 소위 필독서라고 불리는 것도 읽지 않은 책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저 책을 좋아할 뿐이지, 많이 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대단해 보이는 사람도 별것 없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까? 그리 부족함이 많으면서도 남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 단점보다 남의 단점을 더 크게 보려고만 합니다. 그 결과 주님의 뜻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겸손을 간직해야 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족함을 알고 남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이 진짜 겸손이었습니다. 그래야 자기 영광을 드러내려는 교만에서 벗어나,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나는 장소인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십니다.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입니다. 단지 외적 변화가 아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존재가 드러난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율법과 예언서를 대표하는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에 머무르게 초막 셋을 짓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영광의 순간에 계속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자기의 생각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이 생각이 잘못되었기에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지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이 소리가 울린 뒤에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입니다. 모세나 엘리야보다 예수님이 중심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이나 예언서보다도 예수님 말씀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보다 세상일을 중심에 두려는 우리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의 관점으로만 이해하고 행동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자기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면서 주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당연히 우리가 그렇게 가려는 하느님 나라에서도 멀어집니다. 

 

오늘의 명언

길을 걸어가려면 자기가 어디로 걸어가는지 알아야 한다 (톨스토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변모는 순간적인 외적 변화가 아니라 내면의 충만함이 흘러나온 신비의 순간입니다. 이 순간은 존재의 진실과 존재의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기도하실 때, 그 얼굴이 달라졌다는 것은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된 그분의 참모습이 드러났음을 말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바꾸는 힘입니다. 하느님과 깊이 연결될 때, 우리도 그분 안에서 새롭게 '변모'되는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현실의 무게 속에서 기도는 종종 뒷전이 되지만, 기도야말로 우리가 참된 빛으로 변화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과 머무는 기도 속에서 우리의 얼굴도, 우리의 삶도 조금씩 하느님의 빛을 닮아갑니다. 기도는 내면의 변모를 통해, 하느님의 빛을 세상에 전하는 통로가 됩니다. 변모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감각 너머의 실재를 인식하는 계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변모를 통해 그동안 보아왔던 '인간 예수'를 넘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참된 실재를 목격하게 됩니다. 기도는 단지 말의 행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투신이며 봉헌입니다.

기도의 여정에서 우리는 자기중심성을 넘어서고 존재의 지평이 확장되며, 인격적 성숙에 도달합니다. 우리도 하느님 안에서 우리 본래의 빛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의 변모 사건은 시간의 중단과 영원의 스침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고, 하늘의 소리가 들리는 이 순간은 역사의 시간 속에 영원이 개입한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도 기도 안에서 참된 나를 다시 발견하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일상의 얼굴이 하느님의 빛으로 변모되는 기쁜 날 되십시오.

 

 

 

루카복음 9장 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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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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