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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8/07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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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저의 도움, 저의 구원은 주님이시니, 주님, 더디 오지 마소서.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니 주님을 창조주요 인도자로 모시는 이들과 함께하시어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 모든 것을 지켜 주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8월 7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7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민수 20,1-13)
    바위에서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

  • 오늘 복음
    (마태 16,13-23)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민수 20,1-13
오늘 제1독서

바위에서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

그 무렵 

1 이스라엘 자손들, 곧 온 공동체는 친 광야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백성은 카데스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미르얌이 죽어 거기에 묻혔다. 

2 공동체에게 마실 물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갔다. 

3 백성은 모세와 시비하면서 말하였다. “아, 우리 형제들이 주님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4 어쩌자고 당신들은 주님의 공동체를 이 광야로 끌고 와서, 우리와 우리 가축을 여기에서 죽게 하시오? 

5 어쩌자고 당신들은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고약한 곳으로 데려왔소? 여기는 곡식도 무화과도 포도도 석류도 자랄 곳이 못 되오. 마실 물도 없소.” 

6 모세와 아론은 공동체 앞을 떠나 만남의 천막 어귀로 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7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너는 지팡이를 집어 들고, 너의 형 아론과 함께 공동체를 불러 모아라. 그런 다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저 바위더러 물을 내라고 명령하여라. 이렇게 너는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여, 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마시게 하여라.” 

9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주님 앞에 있는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10 모세가 아론과 함께 공동체를 바위 앞에 불러 모은 다음,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 반항자들아, 들어라.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가 마실 물을 나오게 해 주랴?” 

11 그러고 나서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치자,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 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물을 마셨다. 

12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13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과 시비한 므리바의 물이다. 주님께서는 이 물로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셨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6,13-23
오늘 복음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7일
이재원 베드로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3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 안에서 어떤 믿음을 고백하고 있나요?

구약 정경의 오경(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과 구약 외경까지 포함하는 고대 유다교 전통의 증언들은 ‘마싸와 므리바’ 사건을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비’하고 하느님을 ‘시험’하였다는 뜻의 히브리 말에서 ‘마싸와 므리바’라는 지명이 유래합니다(화답송 참조).

그런데 구약 성경의 백성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삶의 위기를 겪으며 불신과 의심을 품기도 하고, 분명하고 확실한 것을 찾기도 합니다. 마싸와 므리바사건은 불신하고 의심하는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공관 복음서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이야기를 다룹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16)라고 고백합니다. 완성도가 높은 신앙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16,23)라는 예수님의 꾸짖음과 대조를 이룹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스승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역설적이지만 불신과 의심도 자리하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구약 성경의 마싸와 므리바 사건과 신약 성경의 메시아 고백은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어떤 믿음을 고백합니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일상 속 의문과 불확실성 위에 불신과 의심이라는 독버섯만 키우고 있지는 않나요?

어려울 수 있지만 지금 있는 그대로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을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예수님과 맺은 관계를 꽃피워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껜 내가, 내겐 주님이 걸림돌이 아닌지.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오늘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또다시 불평을 터트립니다. 전에 이미 말씀드린 바 있지만 이들은 하느님께 기도하면 될 것을 모세에게 또 불평하고 있습니다. 이에 모세는 백성들의 불평을 하느님께 전하고 하느님께서는 바위를 쳐 물을 주라고 하십니다.  

이에 대해 왜 바위를 쳐 물을 주라고 하셨을까? 우리는 생각게 되는데 이내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바위는 도저히 물이 나올 수 없는 곳이니 물은 모세나 자연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것임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고 확고히 믿게 하기 위함이지요.

사실 샘 구멍을 쳐서 물이 나올지라도 하느님께서 물을 주시는 것이지만 그 경우 우리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라 샘이 물을 준다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처럼 바위에서 물이 나오면 물을 주신 것은 하느님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비슷한 맥락으로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당신의 정체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제자들에게 묻고, 이에 베드로 사도가 정확히 알고 대답하자 그것은 인간 머리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인데 알고 있으니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표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마치 학교에서 꼴찌만 하는 친구가 집에 가서 풀어오라고 숙제로 내준 아주 어려운 문제를 풀어 가지고 오면 선생님이 그것은 네 머리로, 막말로 하면, 네 머리 같은 돌대가리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풀었으니 그것은 네가 푼 것이 아니라 누가 가르쳐 줘서 푼 거라고 함과 같지요.

그렇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돌대가리인 우리가 아는 것은 돌에서 물이 나오는 것처럼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지요.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정체는 악령들만 아는 것이었지요. 다시 말해서 영적인 존재만 아는 것이었지요.

그 외에 우리 인간에게 주님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주님의 세례 때와 어제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타볼산 위의 주님 변모 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할 때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머리로 다 알 수 없는 것은 주님의 정체뿐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모든 것은 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신비이고, 하느님의 계획도 신비이고 섭리도 신비이며 주님의 십자가도 신비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전서 1장 23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걸림돌이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그리스도께는 그 신비를 모르는 베드로와 우리가 걸림돌이기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이렇게 일갈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하느님의 일을 사람의 일처럼 생각하는 걸림돌이 아닌지, 아니 그보다 더 하느님의 일은 아예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돌대가리는 아닌지 성찰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

오늘 <복음>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교회의 신비’는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곧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는 베드로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밝혀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 위에 세워집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며, 베드로에게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놀라운 ‘교회의 신비’가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가 주어지고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이 부여됩니다. 이는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곧 교회 안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땅에서 열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곧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서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마태 16,21)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오늘 우리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 자신만을 챙기는 일로 주님의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우리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다 겪어내는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6,23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주님!
저희는 그 누구도 면제되지 않는
당신도 피해 가지 않으신 
갖가지 어려움과 
고통들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제 신변 안전을 위하고 
어려움과 고통과 
죽음을 피하려 할 때, 
마치 그것들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로 여기고
이루고자 하는 나, 
되고자 하는 나 
자신을 앞세우며
남들이 나에게 잘해주는 지를 
따지고 있을 때, 
바로 그 때가 
바로 당신의 일이 아닌 
제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제는 고통을 피하지도 
제거하지도 않으며
극복하려고도 
타협하려고도 않으며
무관심하거나 
뛰어넘으려 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 속에서 
사랑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십자가를 지고 그 속에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 
당신이 하신 그 일을 
저도 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탄이 절대 아멘 할 수 없는 명령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한 편의 반전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어떻게 한순간에 주님의 가장 든든한 ‘반석’이, 그분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으로 추락할 수 있었을까요? 방금 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위대한 신앙을 고백하여 칭찬받았던 베드로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싸늘하게 돌아서서 벼락같이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베드로가 겪은 이 아찔한 추락은, 어쩌면 우리 역사 속 한 장면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조선의 가장 위대한 왕 세종께서 마침내 훈민정음을 반포했을 때, 가장 가까이서 그를 보필하던 최만리와 같은 집현전의 충신들이 핏대를 세우며 반대 상소를 올립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어찌 중화를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의 길을 가려 하시나이까!”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그들은 세종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분명히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들의 마음을 지배한 진짜 임금은 용상에 앉은 세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화(中華)의 질서', 즉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거대한 이념 그 자체였습니다. 진짜 주인이 따로 있으니, 눈앞의 주군에게 온전히 순명(順命)하지 못한 것입니다. 백성의 안위가 아닌 자신의 이념을 따르는 이들에게 세종이 신앙이 있었다면 ‘사탄’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세종을 막아섰던 신하들처럼,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알아보았지만’, 그의 마음을 지배한 진짜 주인은 ‘고통 없이 영광만 얻고 싶은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이라는 당신의 길을 말씀하시자,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필사적으로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의 본질을 꿰뚫는 하나의 영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사탄이란, 하느님을 알아보면서도 결코 순종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진짜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주인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태초의 하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분명히 알았지만,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는 뱀의 속삭임, 즉 스스로 주인이 되고픈 욕망에 굴복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뱀이 그의 주인이 되었고, 그가 자아내는 생각은 ‘사람의 일’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고, 사람의 일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일은 하느님의 일에 불순종하게 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모든 혼란과 싸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 안에 도사린 다른 주인의 정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게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세종의 신하들이 ‘사람의 일’인 중화질서를 따랐을 때 임금의 걸림돌이 되었듯, 베드로가 ‘사람의 일’인 안락한 구원만 생각했을 때 주님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싸움은 결국 ‘사람의 일’을 생각할 것인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할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여기서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번역한 문장은 “내 뒤에 서라!”입니다. “네가 명령하는 자가 아니야!”란 뜻입니다. 순종하란 뜻입니다. 당신 뜻에 “아멘~!”라는 뜻입니다.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하느님의 싸움을 단칼에 끝낸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천사의 말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응답하신 그분의 ‘피앗’, 그분의 ‘아멘’이야말로, ‘사람의 생각’을 완전히 몰아내고 ‘하느님의 일’에 자신을 온전히 투신한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사탄은 ‘아멘’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빛을 섬기기 시작하여 빛의 존재가 되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아멘은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입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임금인 선조에게 끊임없이 의심받고, 모함에 빠져 관직을 박탈당하고, 심지어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백의종군(白衣從軍)의 수모를 겪습니다. 인간적인 생각, ‘사람의 일’로만 본다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부당한 명령의 연속이었습니다. 원망과 배신감에 칼을 버려도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의 순명은 무능한 임금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구해야 한다.’라는 자신의 소명, 하늘의 뜻을 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자존심이라는 ‘사람의 일’을 내려놓고, 고통 속에서도 나라를 구하라는 ‘하늘의 뜻’에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한 임금의 신하를 넘어 하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성장합니다. 사람이 되어갑니다. 저도 순명이 참 어려웠습니다. 사제가 되라는 것도 그렇고, 유학가라는 것도 그랬습니다. 한 번 아멘,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신학교 들어가서 그 삶 안에서 행복해지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순명할 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유학 가서는 첫 6개월은 방황하였습니다. 그래도 순명하려고 하니 빨리 끝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사제도 되었고 신학박사도 되었습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뜻’에 하는 ‘아멘’은 마법과 같습니다. 그것은 내 삶의 운전대를 나의 옹졸한 ‘사람 생각’에서 전능하신 ‘하느님의 생각’으로 넘겨드리는 영적인 선언입니다. 불평 대신 ‘아멘’을 선택할 때, 우리는 걸림돌이 되는 사탄의 자리에서 물러나, 빛의 자녀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 작은 순명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거룩한 장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언제나 당신의 뜻 앞에서 “아멘”으로 응답하는 당신의 참된 자녀가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어느 형제님께 너무나 소중하고 고마운 은인이 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정말로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십니다. 사업으로 힘들어할 때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셨고, 집안의 문제도 잘 풀어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또 앞으로도 이분께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은인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집에 찾아오셨지만 맞이하지도 않고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면 어떨까요? 이 은인에게 “알아서 쉬다 가세요. 제가 지금 바쁘거든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세상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은총과 사랑으로 도움을 받고 있습니까? 힘차게 세상을 살 수 있게 해주시고, 또 기쁘게 살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하지만 그런 주님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함께하자고 직접 찾아오셨지만 바쁘다면서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레오 14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남도록 나 자신은 사라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분이 알려지고 영광을 받으시도록 나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겸손과 주님을 향한 마음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외면하지 않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은인이고 앞으로도 계속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당연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 16,13)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평을, 즉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말한다고 전합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메시아가 과거 예언자의 재림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라고 묻었고,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이라고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이 정답에 하늘 나라의 열쇠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 16,23)고 하시면서, 방금 신앙을 고백하고 축복받은 베드로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유혹이라는 점에서 사탄의 일을 하고 있다고 꾸짖으십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걸림돌이 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 제대로 관심을 두지 않고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걸림돌이 아닌, 주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지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일을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작은 일이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일이 다 큰 일이 됩니다. 거룩한 사랑을 위하여 작은 일에 인내하는 것이 영웅적인 행위입니다 (호세 마리아 에스프리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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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마태오복음 16장 23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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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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