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오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느님, 거룩한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사제가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를 열렬히 사랑하여 영혼들을 돌보며 이웃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언제나 이웃에게 봉사하며 죽기까지 성자를 닮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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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여호 3,7-10ㄱㄴㄹ.11.13-17)
주님의 계약 궤가 너희 앞에 서서 요르단을 건널 것이다. - 오늘 복음
(마태 18,21─19,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여호 3,7-10ㄱㄴㄹ.11.13-17
오늘 제1독서
주님의 계약 궤가 너희 앞에 서서 요르단을 건널 것이다.
그 무렵
7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내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너를 높여 주기 시작하겠다. 그러면 내가 모세와 함께 있어 준 것처럼 너와도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8 너는 계약 궤를 멘 사제들에게, ‘요르단 강 물가에 다다르거든 그 요르단 강에 들어가 서 있어라.’ 하고 명령하여라.”
9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였다. “이리 가까이 와서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라.”
10 여호수아가 말을 계속하였다. “이제 일어날 이 일로써,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면서, 가나안족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1 자, 온 땅의 주인이신 분의 계약 궤가 너희 앞에 서서 요르단을 건널 것이다.
13 온 땅의 주인이신 주님의 궤를 멘 사제들의 발바닥이 요르단 강 물에 닿으면, 위에서 내려오던 요르단 강 물이 끊어져 둑처럼 멈추어 설 것이다.”
14 백성이 요르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천막에서 떠날 때에,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백성 앞에 섰다.
15 드디어 궤를 멘 이들이 요르단에 다다랐다. 수확기 내내 강 언덕까지 물이 차 있었는데,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물가에 발을 담그자,
16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멈추어 섰다. 아주 멀리 차르탄 곁에 있는 성읍 아담에 둑이 생겨, 아라바 바다, 곧 ‘소금 바다’로 내려가던 물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그래서 백성은 예리코 맞은쪽으로 건너갔다.
17 주님의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한복판 마른땅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동안, 온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건너서, 마침내 온 겨레가 다 건너간 것이다.
마태 18,21─19,1
오늘 복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14일
장원혁 세례자요한 신부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소개 00:06
✚ 미사시작 01:49
✚ 강론시작 09:21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한없이 용서하라.
성경에서 ‘일곱’은 완성의 숫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뒤 일곱째 날 쉬셨고, 노아는 방주에 정결한 짐승을 일곱 쌍씩 태웠으며, 그 방주는 일곱째 달에 아라랏산에 도착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계약을 맺을 때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떼어 놓았고, 야곱은 에사우에게 다가갈 때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였으며, 요셉의 꿈풀이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구원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마태 18,22)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답하십니다.
이 ‘일흔일곱 번’이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도 나오는데(창세 4,24 참조) 히브리 말과 그리스 말 성경의 번역 차이로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도 풀이됩니다. 중요한 것은 형제를 용서할 때 횟수를 세지 말고 완성에 완성을 거듭한 숫자, 곧 한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매정한 종의 비유에서는 “만 탈렌트”(마태 18,24)와 “백 데나리온”(18,28)이 대조를 이룹니다. 한 탈렌트는 육천 데나리온인데, 한 데나리온이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므로 이는 육천 일, 곧 열여섯 해 이상 일한 일꾼이 받는 하루 품삯의 총액입니다.
만 탈렌트는 그것의 일만 곱절이니 상상할 수 없는 천문학적 액수입니다. 반면 백 데나리온은 일꾼의 백일 치 품삯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6,12)라는 ‘주님의 기도’의 청원을 떠올리는 대목입니다.
마태오 공동체가 고백하는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요? 많이 사랑받은 이는 많이 사랑할 수 있고, 많이 용서받은 이는 많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와 자비 앞에 붙는 숫자는 상대적이기 마련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횟수를 따지지 않는 용서를 하려면
어제 내게 죄지은 사람을 타이르는 것보다 용서하는 것이 쉽다고 얘기했지만 용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바지요. 그러므로 오늘은 용서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것인지 두 말씀을 엮어서 묵상해 봤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한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용서한다는 말씀이라고 제게 이해가 되었고 일흔일곱 번은 해야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됐습니다.
왜 이런 묵상을 했냐 하면 우리는 용서에 있어서 실패를 자주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한 것 같은데 흙탕물이 다시 올라오듯 다시 미움과 분노의 감정이 올라오고, 그래서 다시 또 용서했는데 어떤 계기로 다시 또 감정이 올라오고는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앙금이 남아있고 근절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앙금이 남아있으면 조금만 휘저어도 가라앉아 있던 것이 올라오고, 근절이 되지 않으면 종기가 다시 생기듯 감정이 다시 올라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용서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곱 번 용서하는 것도 적지 않고 쉽지 않지만 일곱 번 용서하는 것으로 한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앞서 봤듯이 미움의 뿌리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거기서 미움과 분노가 다시 살아나고 했던 용서는 물거품이 되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흔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의 뜻이 실은 숫자 몇 번이 아니라 근절될 때까지를 말함입니다.
사실 숫자를 헤아리며 용서하는 것은 용서의 자세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용서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마지못해서 그리고 의무적으로 하려는 자세이고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용서했다면 미움과 분노가 다시 솟아오르지 않겠고 그가 내게 죄를 짓고 또 지어도 그를 위해 수천 번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할 겁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어느 관구장에게 훈계합니다.
“죄를 지은 형제가 그대의 눈을 바라보고 자비를 청했는데도 그대의 자비를 얻지 못하고 물러서는 형제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도록 하십시오. 나는 그것으로 그대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고 또 그분의 종이며 그대의 종인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가 자비를 청하지 않으면 그대는 그가 자비를 원하는지를 물어보십시오. 그런 다음에도 그가 그대의 눈앞에서 수천 번 죄를 짓더라도 그를 주님께 이끌기 위하여 나보다 그를 더 사랑하고 이런 형제들에게 늘 자비를 베푸십시오.”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도전과 자극도 받지만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마음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사랑하려는 의지와 마음이 없이 용서하려고 하면 한숨만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부터 성급하게 하려 하거나 횟수를 따지기에 앞서 사랑을 마음에 채우는 것이 앞서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용서받은 자가 지녀야 할 마음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설교(마태 18장)에서 먼저 공동체에서의 작은이들의 가치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마무리 하셨습니다. 이어서, 공동체에서의 형제애를 말씀하시면서 죄지은 형제에 대한 “사랑의 교정”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왜 용서를 해야만 하는지?’를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고 말씀하신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다고 해서, 모두가 자비로운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자비를 입은 그 사실 자체도 깨닫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주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제는 “자비를 베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아니 죄를 인정하기도 전에, 우리를 먼저 용서해주신 자비와 용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해달라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도 똑같은 죄를 반복해 짓는 우리를, 여전히 끝없이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끝없이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용서하고 있지 못하는 저를 또한 용서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이유는 그분께서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미 입은 바로 그 사랑, 그 용서, 그 자비로 우리도 끝없이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결국, 그분이 우리가 용서하기를 원하시니 우리가 용서하는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 ‘용서하는 자가 지녀야 할 마음’과 ‘용서받은 자가 지녀야 할 마음’을 말씀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빚을 탕감해준 주인의 “가엾은 마음”(마태 18,27)과 탕감 받은 자가 지녀야 하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란 빚진 사람이 진 부채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채를 진 사람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이해타산의 계산이 아니라 사람의 존귀함을 들여다보는 마음입니다. 곧 내가 받은 상처를 헤아려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은 상처를 헤아려보는 마음입니다.
“감사히 여기는 마음”이란 죄를 지은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곧 우리를 향하여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순전한 “선의”요, “자비”를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선의”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에게도 역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받았음에 대해 “감사히 여기는 마음”이 우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의 표현으로 다른 이들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8,2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
일곱 번이 아니라
이제는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희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도저히 용서가 안 될 때, 당신이 놓치고 있는 단 한 가지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마태 18,21)
형제자매님들, 이 질문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시는 분, 아마 아무도 안 계실 겁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 그 사람의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에 돌덩이가 얹히는 것 같은 그런 상처가 하나쯤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해야지, 이제 그만 잊어야지.’ 수십 번, 수백 번 다짐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상처는 더 선명해지고 미움은 더 깊어지는 기이한 경험, 다들 해보셨을 겁니다.
마치 심리학의 유명한 ‘북극곰 실험’과 같습니다. “절대로 흰색 북극곰을 생각하지 마세요!” 라는 지시를 받으면, 오히려 머릿속은 온통 북극곰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의지의 채찍질은, 우리 영혼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미움이라는 감옥에 더 단단히 가두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고 하신 이 말씀은, 우리에게 불가능을 명령하신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이 풀리지 않는 숙제, ‘용서’에 대한 새로운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이 ‘의지의 함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실화가 있습니다. 나치 사냥꾼으로 유명한 시몬 비젠탈의 자전적 저서 『해바라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있던 그는 어느 날, 죽음을 앞둔 21살 나치 병사에게 불려갑니다. 병사는 유대인 일가족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인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죽기 전에 유대인에게 용서를 받고 싶다고 애원합니다.
비젠탈은 그의 끔찍한 고백을 끝까지 듣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용서의 표시도 하지 않고, 침묵한 채 병실을 나옵니다. 그는 평생 이 침묵의 무게에 대해 고뇌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어쩌면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의 이름으로 거대한 악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의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처 앞에서, ‘용서하려는 시도’ 자체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영화 '밀양'의 엄마 신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겠다’는 거룩한 결심을 하고 찾아갔지만, “나도 하느님께 이미 용서받았다”는 범인의 평온한 한마디에 처참히 무너져 내립니다. 내 힘으로 하려는 용서는 이렇게 실패하거나, 더 큰 상처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잠시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너무 눈앞의 장애물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높은 산 정상을 향해 등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집채만 한 바위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바위만 쳐다보고 ‘이걸 어떻게 치우지? 이걸 어떻게 넘지?’ 하고 전전긍긍한다면, 그 바위는 세상에서 가장 큰 절망의 벽이 될 겁니다. 하지만 잠시 고개를 들어 우리가 가야 할 저 높은 산 정상을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갑자기 그 바위는 정상으로 가는 수많은 과정 중 하나로, 잠시 딛고 넘어가야 할 디딤돌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용서라는 과제가 바로 그 ‘집채만 한 바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산 정상’은 바로 ‘사랑’입니다. 용서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바위와 씨름하는 것입니다. 대신, 사랑하려고 하십시오. 저 높은 정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그 바위는 더 이상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사랑의 여정 위에 놓인 하나의 과정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온 삶으로 증명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1993년, 미국의 메리 존슨은 외아들을 총으로 쏴 죽인 16세 소년 오셰아 이스라엘을 증오했습니다. 그녀는 복수심으로 폐인처럼 살았습니다. 하지만 몇 년 후, 그녀는 교도소로 그를 찾아갑니다. 처음에는 증오를 터뜨렸지만, 만남을 거듭하며 깨닫습니다. 자기 앞에 있는 것은 괴물이 아니라, 두려움에 떠는 한 ‘어린아이’라는 사실을요.
그 순간, 메리는 ‘용서하려는 노력’을 그만둡니다. 대신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오셰아가 출소하자, 그녀는 그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영적인 아들’로 삼습니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함께 용서와 치유를 위한 재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유영철에게 아들을 잃고 그를 양자로 삼았던 고정원 씨처럼, 메리는 사랑을 선택했을 때, 용서는 그 사랑의 길 위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로 돌아가 봅시다. 임금은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을 어떻게 해줍니까? 법과 원칙대로 그를 감옥에 가두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를 탕감해 주었다.” (마태 18,27)
‘가엾은 마음’, 바로 사랑입니다. 임금은 사랑으로 종을 보았기에, 용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그 종은 어땠습니까?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자,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거저 받은 사랑을 완전히 잊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힘과 계산, 세상의 법으로 살아가려 했습니다. 그 결과는 파멸이었습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종과 같기 때문입니다. 임금에게 받은,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그 엄청난 사랑을 잊고,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내 상처의 크기만 계산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힘은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먼저 사랑해주신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강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겠습니다. 용서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하려 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삶으로 가져가야 할 유일한 실천 방법입니다. 나에게 상처 준 그 사람을 억지로 ‘용서’하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대신, 그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미움이 솟구칠 때마다 잠시 멈추고 이 짧은 기도를 바쳐주십시오.
“주님, 제가 저 사람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눈으로 저 사람을 보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는 마법의 주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기도는, 내 시선을 눈앞의 바위에서 저 높은 산 정상으로, 내 상처에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로 옮겨주는 놀라운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를 사랑하려 할 때, 나 역시 새로 태어날 것입니다. 원수가 있습니까? 사랑하십시오. ‘용서해야지’, 가 아닌 ‘사랑해야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덮어줄 능력을 소유한 하느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7)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어떤 형제님께서 너무나 피곤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날은 직장에서도,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모두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 모든 일을 끝마치고 퇴근 시간 지하철을 탔습니다. 사람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또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 앞에 앉아 있던 분이 곧바로 일어나는 바람에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하루 종일 힘들었는데, 하늘에서도 수고했다고 이런 선물을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때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 이 형제님 앞에 서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 순간 어떻게 해야 이 형제님은 편안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요?
1번. 눈을 감고 잠자는 척하면서 계속 앉아 있는다.
2번.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자리 좀 양보하라고 말한다.
3번.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한다.
1, 2번이 편하게 할 것 같지만 이렇게 행동하면 더 피곤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리 양보를 하면, 좋은 일을 한 것 같아서 앉아 있을 때보다 더 기운이 나게 됩니다. 이를 사회심리학자 프랑크 리스만은 ‘조력자 치료 원리’라는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누군가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이라는 이론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결국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 늘 조건을 붙이려고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들어갈 때,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순수한 사랑, 주님의 뜻이 가득 들어 있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고 묻습니다. 유다 율법 전승에서는 세 번 용서하면 충분하다는 해석이 있는데, 이 기준을 넘어 일곱 번이라는 완전수까지 제시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을 이야기하십니다. 즉, 끝이 없는 무한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탕감받은 종의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서로를 용서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앞서 ‘조력자 치료 원리’라는 이론처럼, 용서라는 사랑의 실천은 그 상대방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곧 나에게 주어지는 가장 커다란 선물입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무한히 사랑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라는 사랑의 실천을 거부함으로써 마음의 감옥에 갇히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 첫인상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그 정확성은 그리 신뢰할 만하지 않다 (이드리스 샤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단순히 마음속 감정을 지우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능동적인 선택임을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는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성모님께 완전히 봉헌된 삶을 살며,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랑으로 자신을 온전히 바쳤습니다. 그의 순교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랑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는 인간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찾았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쇄술, 언론, 라디오 등 당대 최고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진리는 성당 강론대 위에서만이 아니라 문화와 매체, 기술 속에서도 선포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자유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자유로운 순간은 생명을 완전히 내어놓을 때이며, 그것이 곧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 순간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성모님을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통로로 이해하며, 그분을 통해 가장 빨리 하느님께 도달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러한 봉헌은 고통 속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수용소에서 그는 동료를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용서'란 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사랑으로 덮어 하느님께 맡기는 봉헌이었습니다.
그의 용서는 말보다 더 강하게, 침묵과 행동으로 증언되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복수의 고리를 끊고, 죽음 이후에도 사랑이 남게 했습니다. 미움과 폭력의 절정 속에서도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사랑으로 미움을 이길 때, 하느님의 나라는 한 걸음 더 가까워집니다. 용서로 복수의 고리를 끊는 용서의 도구가 되십시오. 미움을 이기는 것은 오직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여호수아기 3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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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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