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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8/24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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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 종을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8월 24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1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24일 연중 제21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66,18-21)
    그들은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데려 오리라.

  • 제 2독서
    (히브 12,5-7.11-13)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 오늘 복음
    (루카 13,22-30)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이사 66,18-21
오늘 제1독서

그들은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데려 오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8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19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타르시스와 풋, 활 잘 쏘는 루드, 투발과 야완 등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20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끗한 그릇에 제물을 담아 주님의 집으로 가져오듯이 그들도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주님에게 올리는 제물로 말과 수레와 마차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1 그러면 나는 그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히브 12,5-7.11-13
오늘 제2독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형제 여러분,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3,22-30
오늘 복음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24일
이은기 미카엘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13:4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서 끝부분입니다. 예루살렘을 통하여 이방 민족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리리라 선포됩니다. 제2독서인 히브리서는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넘어온 이들을 독자로 삼는데, 특히 저자는 ‘훈육’을 강조합니다. 훈육으로 말미암은 시련과 슬픔은 기쁨과 평화와 의로움으로 바뀔 것이라며 희망을 가르칩니다.

저자는 이사야서 35장 3절과 잠언 4장 26절을 인용하며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브 12,12-13)라고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소개됩니다. 지난 주 평일 미사 때 들었던 마태오 복음서의 하늘 나라 이야기와는 다른 형태의 문맥입니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을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유다인들을 향하여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셨으며(루카 13,26 참조),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처합니다. 그러나 성조들과 예언자들을 중심으로 모이는 ‘메시아의 잔치’, 곧 하느님 나라에 유다인들은 들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13,28 참조).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이들은 이 잔치에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온] 사람들”(13,29)은 제1독서에서 이야기한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사 66,18), 곧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질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늘 열려 있고 보편 구원과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희망의 순례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구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은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사람이 묻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그 어떤 사람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구원이든 세상의 구원이든 구원에 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실로 행복 관심은 많아도 구원 관심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관심(關心)이란 무엇에 관(關)한 마음 또는 관련(關聯)한 마음이니, 행복 관심은 행복에 관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원 관심이 없는 행복 관심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는 거지요.

반면 구원 관심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물론 저세상에서의 행복까지 행복한 곧 영원한 행복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 관심밖에 없는 사람은 저세상에 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구원과 관련한 세 부류의 사람에 관해 묵상을 해봤는데, 첫 번째 부류는 앞서 본 바와 같이 구원 무관심의 사람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구원 관심은 있지만 자기 구원에만 관심 있는 부류입니다.

말하자면 구원 이기주의라고 할 수도 있는데 어떻습니까? 이기주의자라면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해도 되겠습니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만 구원받기 위해 자기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구원으로 도달하는 사다리를 걷어찬다면 나쁜 놈이 분명하지만 그렇지만 않다면 그런 이기주의는 이해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셨잖습니까? 이기주의란 어떻게 보면 좋은 것입니다. 이기주의란 나를 이롭게 하는 주의잖아요? 그러므로 이 세상 행복에만 관심 있는 사람보다 구원 이기주의자는 구원 사다리를 탄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뭔가 아쉽지요? 행복 관심만 있는 구원 무관심자보다는 현명하지만 더 현명해야 하고 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더 현명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자기 사랑밖에 없는 자보다 이웃 사랑도 있는 사람이 더 사랑이 많고 더 현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잖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현명한 구원 이기주의자라면 자기가 타고 올라간 구원 사다리를 걷어차지만 않으면 되고 먼저 올라간 사다리로 이웃도 올라오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주님께서 모으신 사람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시어 당신 영광을 알리고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아무튼 우리는 구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좁은 하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되라고 나도 초대 받고 너도 초대하는 사람들인데 그렇게 되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좁은 문이 닫힌다.

연중 제21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구원이 모든 인류에게 개방되어 있음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바빌론 유배로부터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이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넘어 온 민족에게 개방되어 있음을 선언합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이사 66,18) 

오늘 <복음>에서도 같은 내용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9)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라는 어떤 사람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질문은 신앙의 궁극적 목표가 ‘구원’에 있음을 제시해줍니다. 그런데 ‘구원받을 사람이 적을 것을 것’인지에 대해 묻는 이 사람은 아마도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관심인 ‘구원받는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적어도 네 가지 면에서 충격적입니다.

<첫 번째> 충격은 들어가는 ‘문이 좁다’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는 언뜻 듣기에는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의 보편성에 어긋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라는 질문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이라 해서 모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이가 들어가는 “좁은 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9)

그런데 이처럼 동서남북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 들어오는 문이 어찌 “좁은 문”일까요? 정말 당신의 문은 바늘귀처럼 좁은 문일까요?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문은 비록 좁지만 하나뿐인 문이 아니라, 각자에게 열려있는 수없이 ‘많은 문’일 수 있습니다. 곧 ‘길이신 당신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기에’(요한 14,6 참조)에 “좁은 문”이지만, 동시에 당신께 응답만 하면 누구든지 사방에서 몰려 온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들어오는 많은 “좁은 문”일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양들이 드나드는 문”(요한 10,7)이시며,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된 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문(마태 18,3-5)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충격은 ‘문이 닫힌다’는 사실입니다. 곧 ‘닫힌 문’에 대한 말씀입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이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나>는 좁지만 열려 있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닫힌 다음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문은 나중에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지금 들어가야 하는 시급성을 다투는 ‘문’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재림의 때에 완성되겠지만, 이미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이라는 “좁은 문”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문을 들어가는 데는 그 어떤 특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곧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13,26)라고 하실 것입니다. 곧 이 ‘문’을 들어가는 데는 교황님도 주교님도 신부님도 수도자도 그 누구도 결코 예외가 없는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충격은 ‘문을 열고 닫는 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집주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루카 13,25), 우리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이는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닫는 ‘집주인’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네 번째> 충격적인 사실은 ‘첫째와 꼴찌’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이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는 꼴찌가 되어도, 하느님 앞에서는 첫째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데는 꼴찌가 되어도, 하느님을 앞세우는 데는 첫째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듯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마태 6,4; 6,6; 6,18)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3,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주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문이 좁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열린 문이신 당신이
저의 희망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좁은 문 : 사랑 때문에 고생을 선택하는 삶

찬미 예수님
요즘 해리 장애를 앓고 있는 이유엽 (그리고 강순) 씨의 이야기가 인터넷에 많이 뜹니다. 이유엽 씨의 이야기는 단순히 여장하는 남자의 이야기가 아닌,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되찾으려는 한 인간의 처절한 여정입니다.

세상에 알려진 그의 첫 번째 모습은 30년 경력의 45세 베테랑 보디빌더 이유엽입니다. 헬스장에서 그는 누구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엄청난 무게의 역기를 들어 올립니다. 그의 몸은 오랜 훈련으로 다져진 단단한 근육 갑옷으로 덮여 있습니다. 그는 과묵하고, 강인하며, 스스로를 통제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한 인물로 비칩니다. 이 근육질의 몸은 세상의 편견과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생존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또 다른 인격, ‘강순’이라는 30대 여성이 살고 있습니다. 강순은 애교가 많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며, 예쁘게 꾸미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밝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나타날 때면 이유엽 씨의 강인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수줍은 미소와 여성스러운 말투가 드러납니다. 그녀는 이유엽 씨의 옷장 한편에 고이 간직된 긴 머리 가발과 화려한 원피스, 하이힐을 신고 세상에 나옵니다.

이 두 인격이 한 몸에 살게 된 이유는 그의 끔찍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유엽 씨는 지독한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셋방살이를 했는데, 주인 남자가 유엽을 상습적으로 폭행과 추행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보호해주지 못했습니다. 사춘기 전까지 유엽은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다고 믿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영혼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인격, ‘강순’을 만들어냈습니다. 강순은 유엽이 감당할 수 없는 모든 고통과 슬픔, 공포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 태어난 보호 인격이었습니다. 유엽이 근육으로 자기 몸을 지키는 ‘외부의 갑옷’을 만들었다면, 강순은 그의 여린 영혼이 부서지지 않도록 끌어안는 ‘내면의 보호막’이었던 셈입니다.

처음엔 강순이 자신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휴가 후 군대에 복귀할 때 갑자기 강순이 나타나 하루 늦게 복귀하여 영창에 가야 했습니다. 아마 스트레스가 극심해지면 회피 성향으로 강순이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핸드폰에는 전혀 다른 인격의 얼굴이 녹화되어 있었고, 그것을 본 유엽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 고통의 시간 끝에, 그는 마침내 강순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가 자신의 여성 인격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단순히 여장을 하고 싶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일부를 온전히 인정하고 세상에 드러내려는 용기 있는 고백이었습니다. KBS Joy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출연한 그는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이렇게 직접 표현했습니다.

 “38년 동안 (강순을) 누르면서 살았어요. 병원에도 오래 있었고요. 약도 오래 먹었고… 그런데 이게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그냥 받아들이고, 같이 그냥… 공존하면서 살고 싶은 거죠.” 

서장훈 씨가 “여장을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거죠?”라고 묻자, 그는 더욱 근본적인 자신의 내면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장을 하고 싶다는 그 표현보다는… 그냥 제 안에 여자가 살고 있다는 걸… 좀 보여주고 싶어요. 그냥… 저도 이제는 (강순의 모습을) 끄집어내서, 같이 좀 살고 싶어요. 이제는…” 

이 말속에는 ‘여장 남자’라는 세상의 편견을 넘어,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이자 분신인 ‘강순’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그녀의 삶 또한 지켜주고 싶다는 그의 눈물겨운 다짐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소망은 더 이상 숨지 않고, ‘이유엽’과 ‘강순’이라는 두 모습 모두가 자신임을 인정하며 온전한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는 지금 여성 호르몬을 맞으며 여성으로의 성전환 수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슴을 만들고 얼굴도 여성스럽게 수술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가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쌍둥이 아들이 있고 이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아내도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라고 충고하고 싶습니까?

 ‘그래, 그 동안 네가 힘들 때 네 친구가 되어주었던 강순을 살게 해라. 이제는.’

그러면 아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여성처럼 가슴이 있고 여성의 얼굴과 목소리를 내는 아빠를 갖는다는 것은 실로 아이들 삶에 큰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유엽 씨가 남편과 아버지라는 현실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45세까지 저런 근육을 키워왔다면 그것만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젠 한계에 부딪힌 것입니다. 마치 휴가 나왔다가 다시 군대로 복귀해야 하는 그날처럼, 고통스러운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마다 도피처가 되어주었던 것이 바로 강순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살려면 ‘좁은 문’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이 명확히 무엇인지는 밝혀주지 않습니다. 다만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 어떤 의미인지가 핵심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불의(ἀδικία, 아디키아)’는 단순히 나쁜 짓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받은 것에 합당하게 돌려주지 않는 것이 바로 불의입니다. 좁은 문이란 바로 이 ‘정의’와 관련됩니다. 내가 남편이고 아버지라는 이름을 받았다면, 그 이름에 합당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강순으로 회피하는 것은,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정의를 저버리는 ‘불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좁은 문은, 사랑을 위해,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는 정의를 위해, 이전의 나를 죽이는 고생을 기꺼이 선택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나가사키에 ‘자기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는 뜻의 ‘여기당(如己堂)’이라 불리는 작은 집이 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은 방사선과 의사였던 나가이 다카시 박사입니다. 그는 방사선 연구의 후유증으로 백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그 자신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잿더미 위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던 그에게 남은 것은 어린 두 자녀뿐이었습니다. 그는 절망 속에서 도망칠 수도,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라는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무너진 성당 터에 두 평짜리 작은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 누워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끔찍한 고통과 슬픔을, 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희망의 메시지로 바꾸어냈습니다. 그의 책들은 전쟁으로 상처 입은 수많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위로했습니다. 그는 아내를 잃은 남편, 병든 환자로서의 고통을 회피하는 대신, 아버지이자 의사, 작가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좁은 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가 선택해야 할 좁은 문이 있다면, 아들이 감당해야 할 좁은 문도 있습니다. 성장 가능성이 최대 1m밖에 안 되는 희소병을 안고 태어난 대성이의 삶이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지만, 그의 몸은 10kg을 넘지 못하고, 작은 손가락과 팔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아빠가 미안한 마음에 ‘대성아, 몸이 작아서 불편하지 않니?’ 하고 물으면, 아이는 오히려 아빠를 위로합니다. “아빠, 어쩔 수 없는 거지. 슬퍼하지 마, 걱정하지 마!” 자신 탓인 것 같다며 눈물짓는 엄마에게는 “엄마, 나 혼자 할 수 있어!”라고 외치며, 불편한 손으로 어떻게든 자신의 일을 해내려 애씁니다. 대성이가 자신의 불편한 몸으로 부모님을 위로하고 동생을 배려하는 그 모든 순간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불평할 이유가 세상 누구보다 많지만, 그는 아들이라는 자신의 자리에서 사랑으로 보답하는 ‘좁은 문’을 기꺼이 선택한 것입니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와 어린 대성이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원망하며 넓은 길로 도망치는 대신, 아버지로서 혹은 아들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좁은 문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위해 기꺼이 조금 더 고생하는 삶을 살아냈고, 그 결과 수많은 이들에게 빛이 되었습니다.

1995년 르완다 내전 당시,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이 키베호의 한 기숙학교를 습격했습니다. 그들은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후투족은 이쪽, 투치족은 저쪽으로 갈라져라!”고 소리쳤습니다. 투치족을 골라내 학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열일곱 살의 한 소녀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기에는 후투족도 투치족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매입니다.”

그녀의 외침에 모든 학생이 서로의 손을 잡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학살자들은 그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고, 수많은 소녀들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소녀들은 ‘나만 살겠다’는 넓은 문을 거부하고,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가장 좁고도 가장 영광스러운 문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공동체 안에서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 때, ‘너는 너, 나는 나’라고 선을 긋는 넓은 길을 피하도록 노력해 봅시다. 대신, 키베호의 소녀들처럼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그를 위해 아주 짧은 화살기도라도 바쳐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고생의 선택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입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4)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합니다. 이 배에는 많은 동료들이 함께 타고 있었고, 이 사람은 동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배에서 청소나 빨래 같은 잡일은 하는 사람이었지만, 선한 마음을 가지고 동료들을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동료들은 모두 바닷사람으로 거칠었지만, 이 사람의 선함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존경의 마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재판장에 서게 되었고,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선하고 착한 사람인데 왜 감옥에 갇혔을까요? 억울한 모함을 당한 것일까요? 아니면 실수로 죄를 지은 것일까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이 탄 배는 해적선이었고, 그는 해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배에서 또 동료들에게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해도, 해적선이고 해적이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과연 주님의 배에 타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만 노력하는 악의 배에 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배에 타고 있느냐에 따라 구원에 이를 수도 있고 반대로 멸망의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종종 꼭 성당에 가야 하느냐? 꼭 신앙생활을 해야 하느냐? 그냥 착하게만 살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 주님께서는 사랑 가득하신 분이라고 하는데, 겨우 신앙생활 하지 않았다고 착한 사람을 벌하겠느냐? 등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잘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주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라는 배를 타고, 그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면서 훨씬 쉽게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떤 배를 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착하게 살아도 해적선을 타고 있으면 해적이 될 뿐입니다. 교회라는 배를 타면 착하지 않아도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라고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라고 하시면서 구원의 길이 ‘좁은 문’임을 말씀하시지요. 좁은 문이라 하는 것은 편안하고 넓은 길이 아니라, 희생과 회개, 사랑의 삶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어렵고 힘든 길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집주인이 문을 닫으면 아무리 두드려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지요. 문밖에서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식적인 종교 체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미사에 참석하거나,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신 삶 속에서 진실한 회개와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라는 배에 타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주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내가 무엇을 먹는 지는 알지만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른다(살바도르 달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좁은 문은 욕망을 좇는 충동의 길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용기의 길입니다. 좁은 문은 고통스러운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에서 우리는 자기 존재를 근본적으로 맞이하며, 참된 나를 만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납니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내 안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결코 들어설 수 없는 문, 바로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은 십자가의 길을 닮았고, 그곳에서 우리는 구원의 참된 힘을 만납니다.

좁은 문은 내 안의 두려움과 욕심을 비워낼 때 비로소 열리며,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문을 지나야 참된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은 오늘, 내 삶의 자리에서 작은 사랑과 겸손한 선택으로 이미 열리고 있습니다. 결국 좁은 문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생명을 얻고,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희망에 참여하게 됩니다.

좁은 문은 우리 삶을 제한하는 길이 아니라, 참된 생명을 열어 주시는 하느님의 진정한 초대입니다. 그 길을 지나는 신앙의 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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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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