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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8/25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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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 종을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8월 25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테살 1,1-5.8ㄴ-10)
    여러분은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섰습니다. 다시 일으키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여러분이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23,13-22)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1테살 1,1-5.8ㄴ-10
오늘 제1독서

여러분은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섰습니다. 다시 일으키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여러분이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1 바오로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테살로니카 사람들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2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3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4 하느님께 사랑받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선택되었음을 압니다. 

5 그것은 우리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떻게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8 하느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곳곳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9 사실 그곳 사람들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10 그리고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곧 닥쳐오는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23,13-22
오늘 복음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4)·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17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19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21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22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25일
김연수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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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바오로 사도가 품었을 부모의 마음

오늘부터 다음 주 화요일까지 평일 미사 독서로 테살로니카 1서를 읽습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이고 그리스도교 최초의 문헌인 이 서간은 기원후 51년 무렵 집필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속주인 마케도니아의 주도 테살로니카에 바오로 사도가 처음 도착한 것은 제2차 선교 여행을 하던 50년 무렵입니다. 이 도시는 그가 방문한 유럽 대륙의 첫 대도시입니다.

테살로니카에 살던 유다인들이 그의 활동에 어깃장을 놓았기에,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한밤중에 그 일행을 베로이아로 보냅니다. 그곳까지 쫓아온 유다인들은 바오로 사도의 선교를 방해합니다. 새로 생겨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두고 떠나야 하였던 바오로 사도의 마음은 갓난아기를 집에 남겨 둔 채 떠나야 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요? 

제1독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1테살 1,1)라는 인사는 바오로 서간의 전형적 특징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신자들에게 빌어 주는 은총과 평화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속합니다.

둘째,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1,2)한다는 내용은 서간의 발신인과 수신인들의 유대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더라도 기도로 이어져 있다는 뜻이지요.

셋째,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 희망의 인내”(1,3)라는 표현도 인상적입니다. 신망애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로 풀이됩니다.

넷째,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1,10)라는 이 구절은 주님께서 다시 오심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에 불안해하였을 신자들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반영합니다.

테살로니카 1서를 읽으면서 바오로 사도가 품었을 부모의 마음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뭣이 중한디!

전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말씀이 오늘 처음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두 번이나 이 말씀을 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이 말씀은 한때 유행하던 말을 떠오르게 하지요? ‘뭣이 중헌디!’ 영화에 나온 대사라고 들었는데 그 영화를 보지 않아서 어떤 상황 또는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놓치고 사소한 것에 대해 집착하는 것에 대한 일갈일 것입니다.

사실 사는 동안 작은 것에 집착하여 일을 그르치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참 많았기에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말도 옛날부터 있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 돈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작은 겁니다. 필요한 것일 뿐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가치의 크고 작음을 따지면 작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야 마땅한데 실제로 살다 보면 돈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여 건강까지 잃고 맙니다. 그리고 그런 뒤에야 ‘뭣이 중헌디!’하고 자신에게 말하곤 합니다.

한 인간도 이러면 건강을 망치고 인생을 망치는데 국가나 종교 지도자가 그러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오도하여 인생을 망치겠습니까?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왕왕 있는 일이었고, 주님 당시의 지도자들도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그들이 어리석은데다 눈까지 먼 불행한 인도자들이라고 하시며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질문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질책입니다. 그리고 꾸짖기만 하시는 질책(叱責)이 아니라 바로잡으라는 질책(質責)입니다. 우선 자신부터 중심을 바로잡으라는 질책입니다.

중심을 바로잡는 것은 중요한 것이 자기 안에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갖가지 욕심이 자기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위선을 낳는 인정 욕구, 눈멀게 하는 재물 욕심, 안주케 하는 안정 욕구, 이런 욕구와 욕심들이 내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진실과 진리와 사랑이 내 안에 중심 잡게 하는 것이며,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 내 중심에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주님께 질책받기 전에 나부터 무엇이 중한지 스스로 질문하는 우리가 되고, 진실과 진리와 사랑의 주님을 우리 중심에 모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대체 무엇이 더 중요한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에 “산상설교”를 통하여 여덟 가지의 “행복선언”(마태 5,3-12)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후기에 이르러 일곱 가지의 “불행선언”(마태 23,13-36)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세 번째까지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태 23,17-19) 

우리는 살아가면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우선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깜박 놓쳐버리곤 합니다. 물론 더러는 방법상에서 최선이 아닌 차선을 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는 한 발짝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 발짝을 뒤로 물러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 무엇이 체(몸)이고, 무엇이 용(활용)인지는 알아야 합니다. 자칫 그렇지 못하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위선자요 눈 먼 인도자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가 옳으냐?’ ‘누가 잘하느냐?’ 하고, 서로를 따지고 계산하고 심판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서,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받아들이고 있는가?’ 라는 인격적인 관계로의 회귀입니다. 그것은 일이나 능력 중심에서 벗어나서, 하느님과 사랑 중심으로의 회귀요, 본질의 삶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대체,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묻게 합니다.

“금인가?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인가?”

“예물인가?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인가?”

“하느님이 계신 곳인가? 아니면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인가?”

“일을 잘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사랑으로 하는 것인가?”

“나의 뜻을 완수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인가?”

“나 자신인가? 아니면 나의 주인이신 하느님인가?”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여기에는, 먼저 앞세워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맑고 명료한 분별과 그를 따를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사도 바오로처럼,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1코린 2,2)라고 하는 본질을 위한 투신을 요청합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3,17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주님!
저는 참으로 어리석고
눈 먼 자입니다. 

함께 계시는 당신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있으니
진정 눈 먼 자입니다.

저의 무지를 받아들이기보다 
저의 주장을 앞세우니
진정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나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나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뭣이 중한지를 분별하는 질문 : “그러면 누가 좋은 건데?”

내년이면 우리 조원동 주교좌성당이 설립된 지 50주년이 되는 매우 뜻깊은 해입니다. 50주년을 맞아 저는 오랫동안 한 가지를 두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바로 본당의 ‘장궤틀’을 교체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장궤틀은 30년이 넘어 낡았습니다. 여전히 쓸 수는 있지만, 솔직히 주교좌성당의 위상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50주년이라는 역사적인 시점에, 성전의 모습을 일신하고 신자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기도하도록 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제가 주임으로 있는 동안 무언가 기념비적인 일을 해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저 장궤틀은 전삼용 신부 때 바꾼 거야.’ 이런 말을 듣고 싶은 욕심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아직 쓸 수 있는 것을 굳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바꾸는 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 ‘이것이 정말 신자들을 위한 일일까, 아니면 나의 만족과 명예를 위한 일일까?’ 뭣이 중한지를 분별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런 갈림길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해야 할까요? 바로 이 질문이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해야 할 강론의 주제입니다.

‘뭣이 중한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라고 강하게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멀어,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였을까요? 그들은 세속-육신-마귀, 즉 ‘자아의 욕망’에 사로잡혀 오로지 ‘자기 좋은 것’만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개종자 하나를 얻기 위해 세상 끝까지 갈 정도로 열심했지만, 그 동기는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 편을 하나 더 만들었다’는 자신들의 세력 과시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어겨도 되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성전보다, 자신들의 배를 불릴 수 있는 금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과 이웃의 마음은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지위와 이익, 명예만이 보였습니다.

영화 ‘설국열차’의 주인공 커티스가 바로 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는 기차 안에서 살아남아 앞 칸으로 가겠다는 생존 욕구에 눈이 멀어, 창밖 세상의 눈이 녹고 있다는 ‘새로운 생명의 신호’를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남궁민수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존보다 딸의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딸에게 진짜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는 ‘사랑의 욕구’가 있었기에, 그의 눈은 기차 밖을 향할 수 있었고, 마침내 ‘뭣이 중한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커티스처럼 욕망의 기차를 폭주하는 우리가 어떻게 멈춰 설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신호등’이 필요합니다. 내가 지금 빨간불을 무시하고 달리고 있는지, 파란불에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외부의 신호 말입니다.

2012년 침몰한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의 스케티노 선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는 4천 명이 넘는 승객들을 배에 남겨두고 자신 먼저 구명보트에 올랐습니다. 자신의 생존 욕구에 눈이 멀어 선장으로서 ‘뭣이 중한지’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때, 이탈리아 해안 경비대장이 무전을 통해 불호령을 내립니다. “Vada a bordo, cazzo!” (배로 다시 돌아가, 이 자식아!) 이 세상의 분노 섞인 외침이 바로 그에게는 ‘신호등’이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는, 나 자신이 아니라 고통받는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평가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오랜 전통 안에서 “백성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Vox populi, vox Dei)”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처음에 던졌던 장궤틀 문제의 답을 여기서 찾으려 합니다. 이것이 저의 욕심인지, 아니면 공동체 전체의 선익을 위한 일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저는 이 문제를 본당의 모든 신자들에게 묻고 그 결정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 본당 신자 대다수가 기쁜 마음으로 이 일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은총의 신호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많은 분들이 시기상조라고 여기거나 마음의 부담을 느끼신다면, 그것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주님의 뜻일 것입니다. 저의 욕심은, 여러분이라는 ‘하느님의 목소리’ 앞에서 멈춰 서야 합니다.

영화 ‘곡성’에서 평범한 경찰인 주인공은, 정체불명의 사건에 딸이 얽혀 들어가자 이성을 잃고 헤매기 시작합니다. 그는 경찰로서 사건을 해결하려는 ‘일’과, 딸을 살리려는 ‘사랑’ 사이에서 혼란에 빠집니다. 그런 그를 향해 한 인물이 절규하듯 외칩니다. 대한민국 모두가 아는 그 대사입니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디’. 이것이 우리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자아의 생존 욕구에 눈이 멀어 성전의 ‘금’을 좇을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바쳐 성전의 ‘주인’을 사랑할 것인가. 개신교는 성체의 중요성을 잃어버리면서, ‘뭣이 중헌지’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을 놓쳤습니다.

신앙에서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도, 우리의 열심도, 우리의 봉사도, 그것이 사랑을 증가시키는 데 봉사하지 않는다면 모두 성전의 금을 좇는 행위일 뿐입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이 사랑을 우리 안에 채워주는 유일한 신적 통로입니다. 이 진실을 깨닫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아야 할 ‘뭣이 중헌지’의 최종 결론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1코린 13,13)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빈센트 반 고흐는 천재일까요? 아니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까요? 꽤 오래전, 네덜란드에 갔다가 고흐 박물관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긴 줄이 있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솔직히 ‘그림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이렇게 줄 서서 기다려 관람하는 것이 의미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언제 또 이 박물관에 올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미술에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저였지만 큰 감동이었습니다. 자기 감정을 시각화했음을 볼 수 있었고, 그의 붓질은 격정과 생명의 리듬이었습니다. 잘 모르는 제가 봐도 그는 분명 천재였습니다. 그런데 이 천재성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 이 위대한 작품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딱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 자신이었습니다. 
 
남이 인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인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의심과 불행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자기를 스스로 인정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했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해도,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통해 나를 긍정할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만드신 ‘나’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나’를 쓰고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작품이 실패작일 수 있을까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허투루 사용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께서 나를 만드시고 사용하고 계심에 용기를 내며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기준만을 가지고 살아가면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살 수가 없게 됩니다.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하느님과의 관계를 두텁게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위선으로 사람들이 올바른 믿음을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형식적이고 자기 권위에만 매달리면서 하느님께 사람들이 가는 것을 막아버리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간직하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나의 이웃에게 참된 믿음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의 명언

삶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 불확실함과 아픔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결국 사람이고, 말이고, 마음이라는 것.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지만, 누군가가 그 무게를 나누어질 때 그 십자가는 더 이상 절망의 상징이 아니라 사랑의 증거가 된다(유정민, ‘앉지 못하는 아이, 곁에 앉아 준 마음들’ 중).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눈먼 인도자란, 신앙의 본질을 놓친 채 형식에 갇힌 자를 가리킵니다. 눈먼 인도자는 길을 보지 못하면서 다른 이를 이끌려 합니다.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이가 다른 이들을 인도할 때, 공동체 전체가 잘못된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형식과 체면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을 살아내는 신앙입니다. 죽은 전통이 아니라 오늘을 새롭게 하는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겉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닦아내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진실을 보십니다. 우리의 가면을 벗겨 내시고, 은총의 빛으로 우리의 상처와 어둠을 드러내 주십니다. 인간은 과거를 미화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같은 폭력과 같은 부정을 반복합니다. 

겉과 속의 괴리인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야 합니다.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반성과 변화여야 합니다. 진정한 반성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숨김없이 살아내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은 외형을 보지만, 하느님의 눈은 마음을 비추십니다. 신앙이란 외적 형식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진실한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내 안의 어둠과 자기 확신에 갇혀, 하느님의 빛을 보지 못하는 순간 우리 또한 눈먼 인도자가 됩니다. 하느님의 빛을 바라보는 겸손한 마음이 자신과 공동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힘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오늘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오늘이며, 겉과 속이 하나 되는 오늘입니다. 그 오늘을 진실로 사랑합니다. 눈먼 인도자를 하느님의 빛으로 인도하는 것은 진실한 회개뿐입니다. 참된 사랑이 참된 회개입니다. 

 

 

 

테살로니카1서 1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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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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