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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8/26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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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 종을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8월 26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테살 2,1-8)
    우리는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23,23-26)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1테살 2,1-8
오늘 제1독서

우리는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 형제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일이 헛되지 않았음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2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전에 필리피에서 고난을 겪고 모욕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우리 하느님 안에서 용기를 얻어 격렬히 투쟁하면서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3 우리의 설교는 그릇된 생각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불순한 동기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속임수로 한 것도 아닙니다. 

4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여 맡기신 복음을 그대로 전합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5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한 번도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구실을 붙여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증인이십니다. 

6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에게서도 찾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찾지 않았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위엄 있게 처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에서,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 

8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23,23-26
오늘 복음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26일
백상렬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2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공동체에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하였나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마치 자식을 품에 안은 부모처럼 신자들을 온화하게 대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은 그 내용도 중요하였겠지만, 전하는 방식도 중요하였을 것입니다.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서간을 쓸 경우와 이방계와 유다계가 섞여 있는 경우, 같은 복음 내용이더라도 다양하고 저마다 적합한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복음 선포는 내용과 형식에서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의 복음 선포 행위를 도구로 삼아 풍성한 열매를 맺어 주셨습니다.

이 점을 놓친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비판하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오류인 위선과 탐욕과 방종이라는 ‘독버섯’이 교회 안에 피어오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교회 활동을 할 때 하느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활동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방식으로 하고 있는지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봅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 마르 2,22; 루카 5,38)라는 예수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아무리 위대하고, 아무리 이상적이어도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이 변변하지 못하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크고 작은 교회 활동 가운데 공동체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우리가 선택한 방식이 얼마만큼 하느님 뜻을 담아내고 있는지 겸허하게 돌아봅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위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어제에 이어 오늘도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주님께서 신랄하게 나무라시는데 어제는 눈이 먼 상태에서 하느님 백성을 잘못 인도하는 것에 대해 나무라셨다면 오늘은 그들의 위선에 집중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위선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되면서 위선의 깊은 뿌리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철학 중에서도 최고의 철학인 고대 형이상학은 존재의 문제나 진선미와 같이 난해한 주제를 다루지요. 위선에 관해 얘기하다가 왜 느닷없이 진선미에 관해 얘기하나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형이상학에 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오늘은 제가 왠지 진선미와 함께 위선을 묵상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은 진선미를 사랑하고 자기가 진선미의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미스코리아를 뽑을 때도 진선미로 뽑고, 남자는 남자 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아름다워지려고 할 뿐 아니라 화장하거나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아름다워지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자연미를 얘기하며 비판하곤 하였지만 요즘은 자기 사랑의 차원에서건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건 일종의 사랑이라고 좋게 이해하려고 합니다. 사실 아름답기를 포기한 사람은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고, 흉한 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것은 이웃 사랑을 포기한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외모만 아름답고 속은 추하디추하다면 비판을 피할 수 없겠지요. 어쨌거나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아름답기를 바라고, 그래서 실제로 아름다워지려고도 하고 겉꾸밈을 하기도 한다는 것인데, 위선도 같은 맥락에서 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선(眞善)이거나 진선이 되어야 하는데 진선이지도 않고 진선이 되려고 해도 못 되니까 위선(僞善)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선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진위(眞僞)를 가리면 위(僞)라는 말입니다. 작품으로 치면 자기가 진짜로 쓰거나 그린 작품이 아니라 위작(僞作)입니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대로 우리 인간은 위작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외에는 성인일지라도 위작자나 위선자일 수밖에 없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은 제 생각에 이런 자기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겁니다. 그래야 위선을 고칠 수 있게 되고 오늘 주님께 불행 선고받은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불행하게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암 선고받은 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암 선고받고 그 선고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고치지 않을 때 불행합니다. 프란치스코가 한번은 위선과 관련하여 심한 가책을 느꼈습니다. 사순절에 의사의 처방에 따라 닭고기 국물을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프란치스코가 사순절에 금식과 금육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텐데 자기가 닭고기 국물을 먹고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위선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제에게 자기를 끌고 다니며 ‘닭고기 국물을 먹은 걸터듬이를 보시오’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역시 의사 처방으로 위 보호를 위해 천을 수도복에 대야 할 경우에도 남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속으로 대지 말고 겉으로 대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부자 청년이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불렀을 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라고 하셨지요.

속에 악이 가득한데도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처럼 그것을 감추거나 오히려 선으로 겉꾸밈 하려고 하지 않고 프란치스코처럼 속의 것을 겉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이, 주님처럼 나는 선하지 않고 하느님만이 선하다며 하느님의 선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가 위선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무엇이 더 중요한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불행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사실, 여러 가지 부패 중에서도 종교적 부패는 항상 가장 신랄한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부패는 더욱 그렇습니다. 또한 그들의 윤리적 부패 못지않게 탐욕에 의한 부패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부패와 분열이 <요한묵시록>에서는 세상 종말의 징표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의 ‘불행선언’은 종교지도자들의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네 번째> 불행선언은 그들의 십일조에 대한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었고 철저했고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마태 23,23)라고 경고하십니다.

<다섯 번째> ‘불행선언’은 속은 감추고 은폐하면서 겉은 기만과 허위로 깨끗이 닦는 ‘정결법’에 대한 경고입니다. 곧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마태 23,25)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차원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애초에 그릇 안에 담고 있는 음식을 정당하게 취득하였는지를 문제 삼으시는 것입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방종에 대한 경고입니다.

앞의 불행 선언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곧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을 깨우쳐주신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그리고 <루카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깨끗해지는 방법, 곧 더러움을 비워내는 방법도 가르쳐주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결국,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운 그릇을 비우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이웃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정결법의 정신이 자신을 지키는 데 있기보다,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사랑하면 깨끗해질 것입니다. 깨끗하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닌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잔 속을 깨끗하게 하는 일, 그것은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입니다(루카 11,41).

하오니, 주님! 오늘 제 마음 속, 탐욕과 방종을 비우소서! 사랑을 채우소서! 제 몸이 당신 사랑을 담은 잔과 접시가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3,26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주님!
제 마음 속, 
탐욕과 방종을 비우소서. 

깨끗한 것을 깨끗한 채로, 
더러운 것을 더러운 채로 
드러내게 하소서. 

속은 탐욕과 이기로 채우면서 
겉모양만 깨끗이 닦고 
치장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채우소서. 

제 몸이 당신 사랑을 담은 
잔과 접시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수단에 매몰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

어제 우리는 ‘뭣이 중헌지’를 보지 못하는 눈먼 이들의 비극을 묵상했습니다. 영화 ‘설국열차’의 주인공 커티스처럼, 자신이 갇혀있는 시스템 안에서의 생존과 성공이라는 욕망에 눈이 멀어, 바로 창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비극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눈먼 인도자들의 또 다른, 그리고 어쩌면 우리에게 더 교묘하게 나타나는 특징을 지적하십니다. 바로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비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의 신앙이 바로 그와 같았습니다. 겉보기에는 누구보다 푸르고 무성한 잎사귀(신앙 행위)를 가졌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열매(사랑)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나무를 가꾸는 ‘방법’(수단)에만 집착한 나머지, 나무를 가꾸는 ‘이유’(목적)를 완전히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꾸짖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율법에서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무시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모기는 걸러 내면서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다.” 

보십시오. 그들은 박하 잎사귀 하나까지 정확하게 세어 십일조를 바치는, 완벽한 ‘방법론’의 대가들이었습니다. 십일조 규정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래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수단), 그 빈자리에 하느님께 대한 신의와 이웃을 향한 정의와 자비를 채우라(목적)’는 거룩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라는 수단 자체를 목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십일조만 잘 내면, 정의롭지 않아도, 자비롭지 않아도 괜찮다고 착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루살이(십일조 규정)는 꼼꼼하게 걸러냈지만, 낙타(정의, 자비, 신의)는 통째로 삼켜버리는 영적인 괴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단’이 ‘목적’을 삼켜버리는 이 비극이 과연 2000년 전 바리사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거대한 낙타를 삼키는 수많은 눈먼 인도자들이 있습니다.

2011년, 대한민국 최고의 영재들이 모인 카이스트에서, 불과 몇 달 사이에 젊은 학생 네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 학생은 유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받은 학점은 B, 이것은 내가 쓰레기라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학교는 세계적인 대학으로 도약한다는 ‘목표’를 위해,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고 학점이 일정 기준에 미달하면 징벌적 등록금을 부과하는 극단적인 경쟁 시스템(수단)을 도입했습니다.

교육의 진짜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이들이 지혜를 배우고 인격체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학교의 학생들에게, 교육의 목적은 사라지고 오직 ‘학점’이라는 수단만이 남았습니다. 학점 경쟁이라는 하루살이를 걸러내기 위해 밤을 새워 공부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친구들과의 우정, 배움의 즐거움,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라는 낙타를 통째로 삼켜버렸습니다. 결국 ‘최고의 인재’라는 잎사귀는 무성했지만, ‘살고 싶다’는 열매는 맺지 못했던 것입니다.

얼마 전, 대구에서 10대 여학생이 건물에서 추락하여 머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119 구급대가 즉시 출동했지만,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정신과 병력이 있어 안됩니다”, “수술할 의사가 없습니다”, “병상이 없습니다.”

인근의 모든 대학병원들이 이런저런 규정(수단)을 내세우며 소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구급차는 두 시간이 넘게 대구 시내를 헤맸고, 그 사이 소녀는 차 안에서 심정지가 왔습니다. 결국 다른 지역의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소녀는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병원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 병원들은 환자의 상태나 규정, 시스템의 한계라는 ‘수단’ 뒤에 숨어, 죽어가는 한 생명이라는 ‘목적’을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규정이라는 하루살이는 철저하게 지켰을지 몰라도, ‘네 이웃의 생명을 구하라’는 가장 큰 계명, 그 거대한 낙타를 삼켜버린 것입니다.

이 비극은 우리 교회 안이라고 예외일까요? 우리 가톨릭의 보물인 전례, 그 안에서는 과연 ‘뭣이 중헌지’가 잘 지켜지고 있을까요?
전례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그 사랑으로 변화되어, 세상 속에서 그 사랑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미사의 모든 예식과 규정들은 바로 이 거룩한 목적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이 수단 자체에 갇혀, 더 큰 목적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곤 합니다.

어떤 신자분이 저에게 이와 비슷한 하소연을 하셨습니다. 당신 아드님이 큰마음을 먹고 몇 년 만에 성당에 나왔는데, 미사 때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어느 열심한 자매님이 다가와 “성당에서는 주머니에 손 넣는 거 아닙니다.”라며 날카롭게 핀잔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아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다시는 성당에 나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미사 중에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수단)은 물론 좋은 예절입니다. 그러나 그 예절의 목적은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그 자매님의 마음속에서, ‘공손한 자세’라는 수단이 ‘냉담자를 환대하고 이끄는 사랑’이라는 더 큰 목적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미사 예절’이라는 하루살이는 걸러냈지만, ‘상처 입은 영혼 하나’라는 거대한 낙타는 삼켜버린 것입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미사곡의 음정 하나 틀리는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그 노래가 담고 있는 찬미와 감사의 마음은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제대의 꽃꽂이가 조화로운지, 해설자의 목소리가 매끄러운지는 꼼꼼히 살피면서도,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의 신비에는 무감각해질 때가 있습니다. 전례의 형식과 규정이라는 ‘잎사귀’는 누구보다 푸르고 무성하지만, 정작 우리가 맺어야 할 ‘사랑과 환대’라는 열매는 점점 시들어가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 제대가 마주한 슬픈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자아의 생존 욕구’가 ‘사랑의 욕구’를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 살아남고, 병원의 손실을 막아야 살아남고, 전례의 권위를 지켜야 내 자리가 살아남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만약 학교의 첫 목적이 학생에 대한 사랑이었다면, 병원의 첫 목적이 환자에 대한 사랑이었다면, 사제의 첫 목적이 아이에 대한 사랑이었다면, 오늘의 이 끔찍한 비극들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이 목적이 아니면 모든 수단이 목적이 됩니다. 어느 날 한 노인이, 밀물에 밀려와 해변에서 죽어가는 수천 마리의 불가사리들을 하나씩 바다에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다가와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이 해변에 있는 불가사리가 몇 마리인 줄 아세요? 지금 하시는 일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러자 노인은 허리를 굽혀 불가사리 한 마리를 더 집어 들고는, 힘껏 바다에 던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한 마리에게는 의미가 있지.”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규칙을 완벽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이라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부족한 수단까지도 완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무엇이 중한지 잊지 않는 사람은 사랑만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뿐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이 말을 잊지 맙시다.

“얼마나 많이 주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작더라도 그 안에 얼마만큼 사랑과 정성이 깃들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저는 결코 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할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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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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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마태오복음 23장 26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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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준비된 말씀,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말씀이 평화가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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