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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
21년 7월 6일 (화)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야곱과 씨름을 하시고는, 그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에 이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라며 복을 내려 주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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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제1독서
창세 32장 23-33절
네가 하느님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그 무렵 야곱은 밤에
23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야뽁 건널목을 건넜다.
24
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이끌어 내를 건네 보낸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25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
26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 엉덩이뼈를 다치게 되었다.
27
그가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그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묻자, “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30
야곱이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하고 여쭈었지만, 그는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보느냐?” 하고는, 그곳에서 야곱에게 복을 내려 주었다.
31
야곱은 “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었는데도 내 목숨을 건졌구나.” 하면서, 그곳의 이름을 프니엘이라 하였다.
32
야곱이 프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의 위로 떠올랐다. 그는 엉덩이뼈 때문에 절뚝거렸다.
33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오늘날까지도 짐승의 엉덩이뼈에 있는 허벅지 힘줄을 먹지 않는다. 그분께서 야곱의 허벅지 힘줄이 있는 엉덩이뼈를 치셨기 때문이다.
화답송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오리이다.
주님, 의로운 사연을 들어 주소서. 제 부르짖음을 귀여겨들으소서. 거짓 없는 입술로 드리는, 제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오리이다.
당신 앞에서 저에게 승소 판결 내리소서. 당신 눈으로 올바름을 보아 주소서. 제 마음 떠보시고 밤중에도 캐 보시며, 저를 달구셔도 부정을 찾지 못하시리이다.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오리이다.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놀라우신 당신 자애를 베푸소서. 당신 오른쪽으로 피신하는 이들을, 적에게서 구해 주소서.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오리이다.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오리이다.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알렐루야!
복음
마태 9장 32-38절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때에
32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영성체송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성체성사의 큰 은혜를 가득히 받고 비오니 구원의 은총을 풍부히 내리시어 저희가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6일 (화)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7월 6일 (화) 15시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
저는 평소에 꽤 열려 있는 시각과 사고를 가졌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또한 선입관을 버리고 내 안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잘 바라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트로트 생활 성가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나는 리듬과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박자도 어색하고, 그 자리가 무척이나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머리로는 ‘트로트도 성가가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거부하고 있었나 봅니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을 차별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열린 마음을 가졌다는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행동, 말씀과 시각은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이었습니다. 군중은 언제나 예수님을 보고 놀라워하였고, “이런 일은 본 적이 없다.”며 감탄하면서도 낯설어합니다. 바리사이들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그 낯섦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미움으로 발전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심과 더해져 결국 그 낯설고 다른 것을 거부하고 오해하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시선과 마음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고 스스로 고통과 아픔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희생과 수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온 마음으로 가난하고 길 잃은 사람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때로는 죽음 앞에 당당해야 하고 두렵지 않은 척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 낯선 일을 나의 일로, 나의 일상으로 만들어 가는 주님의 일꾼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한 당신을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욕심은 잘못을, 사랑은 고통을.
오늘 복음은 군중을 가엾이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을 때는 늘 상대의 고통이 보이고, 욕심이 있을 때는 늘 상대의 잘못이 보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물건에 욕심이 있을 때는 물건에 좀 흠이 있어도 그것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거나 적어도 미워하지 않는데 인간에 대한 욕심이 있을 때는 욕심이 클수록 단점과 잘못이 보이고 그로 인해 미움도 생기고 분노도 생깁니다.
그런데 그렇게 미워하던 그 인간이 어떤 때 불쌍하게도 보이는 것이 또한 인간이요 인간 관계이기도 합니다.
물건은 욕심의 대상일 뿐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에 미워하면서까지 소유할 필요 없고 그래서 싫어할지언정 미워하지 않으며, 그래서 싫어지면 버려버리고 말지 싫은 것이 미워질 때까지 가지고 있지 않지요.
그러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랑을 하고 부수적으로 욕심도 부리기에 미워할지언정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붙잡고 미워하고 심지어 분노하기까지 하는데 그러다가도 욕심에서 한걸음 물러나 보면 그 인간도 사느라 이 고생 저 고생, 고생이 많고 또 나를 만나서 고생이 많은 불쌍한 인간이라 연민이 갑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연민도 이런 우리의 연민과 비슷한가요? 물론 연민이라는 것이 불쌍함을 보고 느끼는 것이니 비슷하지만 그 불쌍히 여김이 우리의 불쌍히 여김과 다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불쌍히 여기는 것은 가난하고 힘 없고 병든 자의 고통이라면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우리의 고통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여러 활동 그러니까 가르치심, 치유하심, 악령을 쫓아내심을 요약하고 나열한 다음 군중을 가엾이 보셨다고 하는데, 그 가엾음의 이유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병들고 가난해서 불쌍할 뿐 아니라 특히 목자 없는 양이기에 가여워하셨다는 뜻이고, 또 목자가 없는 양이 왜 가엽냐 하면 시달리며 기가 꺽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마귀를 쫓아내주시는 주님을 보고 사람들이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며 감탄하는데 같은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시비나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지 고통을 덜어주고 없애주려고 하는 좋으신 목자인 주님에 비해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의 고통은 못 보고 이러저러한 것들을 가지고 시비나 가리기에 다시 말해서 옳다 그르다만 따지기에 이런 바리사이들 밑에서 사람들이 시달리고 기가 꺾인 것입니다.
양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기를 살리는 것이 목자인데 바리사이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아니, 그 반대였다는 것인데 이런 바리사이들을 보면서 양들의 아픔은 헤아리지 못하고 옳고 그름만 따지는 저는 아닌지 저를 반성하는 오늘 이 아침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기를 살리는 리더, 기를 죽이는 리더.
오늘 복음에서는 두 리더의 상반된 모습이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유다 지도자들을 대표하는 바리사이들과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마귀에 들려 말을 못 하는 한 사람을 치유해 주시어 말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많이 하면 실수를 많이 해서 최대한 말을 안 한다고 합니다. 좋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두려움에 짓눌려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귀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존재이고 예수님은 입이 열려 말을 하게 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에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권한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지도자들에게 시달리며 고통받는 당신 백성을 보시고 가엾어하십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자신들이 아니면 안 된다고 믿는 유다 지도자들에 반해서 예수님은 마치 당장이라도 떠날 분처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들의 기를 살려주시는 예수님의 모범이십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믿는 목자는 양들의 기를 죽입니다.
이무석 교수는 자신의 책 『30년 만의 휴식』에서 자신이 썼던 논문 주제인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분석해 놓았습니다.
고흐는 스물일곱 살에 미술을 시작해서 서른일곱 살에 자살하기까지 불과 10년 동안 850여 점의 창조적인 미술 작품을 그린 천재 화가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불행했고 정신이상으로 귀를 자르더니 2년 후에는 가슴에 권총을 쏘고 자살했습니다.
이 교수는 고흐의 이런 삶 이면에는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고흐는 엄격한 켈빈주의 목사인 아버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엄격함에 고흐는 죄책감을 많이 느꼈고 그것을 씻기 위해서는 자신을 학대하거나 혹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지나친 연민을 가졌습니다.
그가 누예넨의 광산에서 전도사 생활을 할 때는 불쌍한 광부들을 위해 자기 빵과 매트리스까지 주고, 자신은 2년 동안 거의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헤이그에서 그림 공부를 할 때는 늙은 창녀와 그녀의 딸을 먹여 살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들을 그렸고 그들의 거친 손을 예찬했습니다.
이런 동정심은 바로 아버지에게 짓눌려 고통받아온 불쌍한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약한 자들을 돕는 선한 행동을 한 것이므로 죗값을 치르는 속죄 행위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5년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건 이후 그의 그림은 극적으로 발전했고, 대작이 쏟아져 나왔으며, 색채도 화려해졌습니다. 아마 그를 괴롭히던 엄한 아버지로부터의 해방 덕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 아버지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남을 비난하고 폭발적으로 화를 자주 냈기 때문에 대인관계가 아주 안 좋았다고 합니다. 보통은 미워하는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닮아간다고 하는데 귀를 자르던 날 밤에도 동거하던 고갱과 싸운 끝에 귀를 잘라 고갱의 단골 창녀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생겨난 분노와 죄책감, 자학성과 보복의 마음에 순종한 것뿐입니다.
고흐를 도와준 사람은 그와 네 살 터울인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림 매매업자였는데 고흐에게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마저 결혼해 아들을 낳게 되었고 사업도 잘 안 되어 수입도 시원치 않게 되자 형이 부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귀를 자르고 자살한 이유는 친구와 동생에게까지 부담이 되어버려 누구도 그의 기를 살려줄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며칠 전에 소개해 드렸던 쓰레기로 가득 찬 이층집 가장은 아들에게 마치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아들이 요구하는 것을 가져다 바쳤습니다. 아들이 자신에게 의존하게 한 것입니다. 이는 아들의 자존감을 끌어내리는 행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부터 그림의 꽃을 피웠습니다. 아버지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자녀는 어쩌면 부모가 사라져주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 혼자의 힘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은 지도 모를 일입니다. 부모의 존재 자체가 자녀의 기를 꺾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를 세워줄 목자는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고흐에게 고갱도 동생도 사라졌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기를 세워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믿어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고흐는 850여 점 그림 가운데 단 1점밖에 팔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기를 살려줄 만한 목자를 만나지 못한 고흐는 그렇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들의 리더로서 어서빨리 자녀들에게 자신들이 없어도 충분히 잘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어야 합니다. 아니면 영원한 아이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로서 자신에게 의존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아이는 영원히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공동체를 만들 때도 그 공동체를 만든 사람은 예수님처럼 반드시 빠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공동체를 만든 이가 빠졌을 때 더 잘 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지 그가 빠졌을 때 무너지는 공동체는 그 구성원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었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구성원들도 평소에 기가 꺾여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모든 게 잘 돌아가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 기를 살리는 리더의 모습입니다.
훌륭한 리더는 양들 안에서 기를 죽여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악령을 믿음으로 쫓아내어 자기의 말을 하게 만드는 목자입니다. 만약 양들이 해야 할 말을 목자에게 막 할 수 있다면 그 목자는 기를 살리는 목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상식의 오류.
어떤 분이 제게 기도를 부탁하십니다. 암으로 인해 많이 힘들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무슨 암인데요?”라고 여쭤보니 ‘갑상선암’이라고 하십니다.
갑상선암은 가장 흔한 암이고, 간단한 수술로도 완치가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그런 수술조차 권장하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지요. 더군다나 잘 전이가 되지 않아서 착한 암이라고 불린다고 하더군요.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나서 “그래도 다행이네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자신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암은 갑상선암 중에서도 1%에 해당하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전이가 되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검색해 보니 정말로 그런 암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상식의 오류에 자주 빠집니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마치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처럼 말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나와 다른 의견이라고 무조건 반대하고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품습니다.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 점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말 못 하는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하느님의 힘’ 외에는 불가능하다고 교부들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상식의 오류에 빠집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품고 있다 보니, 하느님의 일이 아닌 마귀 우두머리의 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이라고 무조건 반대하고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품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지금을 사는 우리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상식의 오류에 빠져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또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기쁨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힘든 세상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주님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너무 적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그 일꾼을 보내주십사고 계속 청해야 하겠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용기란 일어나서 말하는데도 필요하고 앉아서 듣는 데도 필요하다.
- 윈스턴 처칠
인생.
5월에 지방에서 충청도 대전에서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인연으로 주례를 서게 되었지요. 그 시각이 낮 12시 30분이었습니다. 이 결혼은 모두에게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주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1시가 넘어 결혼식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좋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글쎄 저의 작은 아버지 부고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1시에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결혼의 즐거움이 가득할 때, 사랑하는 가족은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연관되어있습니다. 항상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도 함께하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삽니다. 이런 인생을 바라보면서 왜 겸손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삶과 죽음을 모두 감당하기에 우리는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복음은 사랑이 될 수 없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마태 9, 37)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할 주님의 일꾼들이다. 일꾼은 자기자신을 제대로 알아야한다. 주님의 일꾼은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주님과 함께 떠나는 이들이다. 일꾼은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있어야한다.
사람이 되어오신 참된 사람이 하느님이시다. 사랑으로 우리들 안에 계신다. 일꾼의 도리는 감사와 기쁨에 있다. 감사와 기쁨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만남이다. 사람과 사람의 참된 만남이 수확이며 복음이다.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복음은 사랑이 될 수 없다.
복음은 삶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주는 사랑이다. 사랑은 행복을 되찾아준다. 사랑이 새로워지는 일꾼들의 행복이다. 주님의 일꾼은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이들이다. 일꾼들이 만나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 필요한 것은 뜨거운 가슴과 끊임없는 기도이다. 수확할 삶의 현장에 더 가까이 있어야 할 주님의 일꾼이다.
일꾼이 행복하면 주님께서도 행복하다. 삶 자체를 주님과 함께 나누는 것이 일꾼의 사명이다. 수확의 교훈은 일꾼들이 지녀야 할 인격적 성장이다. 인격으로 풍요로워지는 수확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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