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
21년 7월 8일 (목)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요셉은 형제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아우가 자신임을 밝히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형제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입당송
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제1독서
창세 44장 18-21잘, 23ㄴ-29절 / 45장 1-5절
하느님께서는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이집트로 보내셨습니다.
그 무렵
18
유다가 요셉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나리, 이 종이 감히 나리께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나리께서는 파라오와 같으신 분이시니, 이 종에게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19
나리께서 이 종들에게 ‘아버지나 아우가 있느냐?’ 물으시기에,
20
저희가 나리께 대답하였습니다. ‘저희에게 늙은 아버지가 있고, 그가 늘그막에 얻은 막내가 있습니다. 그 애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 아들로는 그 애밖에 남지 않아, 아버지가 그 애를 사랑합니다.’
21
그러자 나리께서는 ‘그 아이를 나에게 데리고 내려오너라. 내 눈으로 그를 보아야겠다.
23
너희 막내아우가 함께 내려오지 않으면, 너희는 다시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하고 이 종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4
그래서 저희가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에게 올라갔을 때, 나리의 말씀을 아버지에게 전하였습니다.
25
그 뒤에 저희 아버지가 ‘다시 가서 양식을 좀 사 오너라.’ 하였지만,
26
저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희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막내아우가 함께 가야 저희가 내려갈 수 있습니다. 막내아우가 저희와 함께 가지 않으면, 저희는 그 어른의 얼굴을 뵐 수 없습니다.’
27
그랬더니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가 저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아내가 나에게 아들 둘을 낳아 주었다는 것을 너희도 알지 않느냐?
28
그런데 한 아이는 나를 떠났다. 나는 그 애가 찢겨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였고, 사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아이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29
그런데 너희가 이 아이마저 나에게서 데려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게 되면, 너희는 이렇게 백발이 성성한 나를, 비통해하며 저승으로 내려가게 하고야 말 것이다.’”
45,1
요셉은 자기 곁에 서 있는 모든 이들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모두들 물러가게 하여라.” 하고 외쳤다. 그래서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힐 때, 그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2
요셉이 목 놓아 울자, 그 소리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들리고 파라오의 궁궐에도 들렸다.
3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직 살아 계십니까?” 그러나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너무나 놀라, 그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4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나에게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서는, 그들이 가까이 오자 다시 말하였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5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화답송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그 땅에 기근을 불러일으켜, 양식을 모두 끊으셨을 때, 한 사람을 그들 앞에 보내셨으니, 종으로 팔려 간 요셉이라네.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그의 발에 족쇄 채우고, 목에는 쇠사슬 옭아매었네. 마침내 그의 말이 들어맞아서, 주님 말씀이 그를 보증하셨네.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임금이 사람을 보내 그를 풀어 주고, 민족들의 통치자가 그를 놓아주었네. 그를 왕궁의 주인으로 내세워, 모든 재산을 다스리게 하였네.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알렐루야!
복음
마태 10장 7-15절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성체성사의 큰 은혜를 가득히 받고 비오니 구원의 은총을 풍부히 내리시어 저희가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8일 (목)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7월 8일 (목) 15시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소유에서부터 자유로움과 머무름.
이스라엘 성지 순례는 복음서의 평면적이고 문자에 머무는 이야기를 입체적인 그림으로 만들어 줍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여러 차례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성지 순례를 떠나기 전에 순례가 그저 단순한 여행이 되지 않도록 많은 것을 준비하게 됩니다. 순례의 주제를 정하고 공부도 하면서 묵상과 성경 통독으로 순례를 기다립니다. 순례를 할 때에도 주제를 깊이 생각하며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같은 장소와 건물을 보더라도 늘 새롭게 다가오며,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아주 가깝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이런 순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파견되어, 그분과 함께 떠나는 순례의 여정입니다. 그 여정은 늘 같은 일상의 반복일지 모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을 만나며 같은 일을 하는 일상 말입니다. 때로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이유를 찾지도 못하며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지켜보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순례의 여정에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주제를 정해 주십니다. 순례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순례의 기준이며 가치, 그리고 방식입니다.
첫째는 ‘소유에서부터 자유로움’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탐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미리 채우려는 마음보다는 감사하고 나누려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머무름’입니다. 이것은 함께 있는 것이며 동감하는 것이고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도 서로 나누며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집착과 미련에서부터 자유로움’입니다.
집착과 미련은 성공과 좋은 결과만을 가지려는 욕심입니다. 자기만족과 성공을 위해서 더 큰 아픔과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놓고 떠날 수 있어야 새로움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일상이라는 순례에서 길을 잃고 헤매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에서부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먼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주제들에 집중해 보십시오. 그분께서 함께 걸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의 고통과 불행 이해.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이런 가정을 하면 어떨까요? 기근이 들었어도 형제들이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오지 않았고, 그래서 요셉과 형제간의 상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요셉의 성공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이것은 마치 편모슬하의 아들이 어렵게 사법 고시에 붙었는데 그 엄마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과 같은 것일 겁니다. 기쁨을 같이 나눌 사람이 없다는 슬픔이 성공의 기쁨보다 클 것입니다.
이토록 기쁨은 공동체적이고 성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성공도 기쁨도 사랑보다 가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다른 예를 들자면 제일 맛있는 음식과 멋있는 경치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 최고이고 그래서 맛있는 것을 먹을 때나 멋있는 곳에 갈 때 생각나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거지요.
반대로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싫어하는 사람과 먹으면 맛없고, 미워하는 사람과 먹으면 체하고 말며 아무리 아름다운 곳도 싫어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으면 피하고 말잖아요?
그래서 신혼의 가난하던 때 겨우 사 먹은 눈물 젖은 짜장면이 나중에 잘살게 되었지만, 사랑이 그때와 같지 않은 때 최고급 레스토랑의 포도주와 요리를 먹는 것보다 더 맛 있었다고도 하지요.
사실 사랑은 성공 뿐 아니라 가난도 의미 있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셉의 성공을 더 의미 있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이 함께함보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입니다.
요셉의 성공이 하느님의 뜻이요 섭리라면 그 성공이 더 의미 있다는 말입니다.
요셉의 신앙적인 탁월함은 자신의 성공을 자기가 성취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섭리였다고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이집트로 팔려온 것도 형제들의 악행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 뜻이 있었다고 이해하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형제들의 악행이 하느님 뜻이었다는 식으로 이 말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요셉을 팔아먹은 형제들의 악행은 분명 형제들의 악의에서 나온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형제들의 그 악의와 악행까지 도구로 삼으셨다는 뜻이고, 요셉을 팔아먹은 것은 분명 형제들의 악행이지만 그 이후 이집트로 오기까지 모든 것을 섭리하신 것은 하느님이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드실 수 있는 하느님이시기에 악을 가지고도 선을 이루셨다는 뜻이며 고통과 불행을 가지고도 구원을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무릇 우리의 고통이나 불행 이해도 이런 믿음,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도 이런 믿음 안에서 해야 오늘 요셉이 형제들에게 한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용서를 할 수 있음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주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믿을 때 생기는 위험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복음선포로 파견하십니다. 그때 우선 주는 것에 대해 아끼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받은 것을 그대로 내어주는 모범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주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주되 받아내는 것도 무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주면 반드시 받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동네에 들어가던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 집에만 머물라고 하십니다. 다른 집들도 분명 무언가 내놓고 싶을 텐데 한 집만 거덜 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한 집에서 받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많이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일꾼에게 아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부러움을 사게 될 것이고, 그가 주님의 일꾼에게 대하는 신자의 모범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면서도 받아내야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겠는데, 하나는 ‘자신이 당연히 받기만 하면 되는 줄 알게 된다.’라는 이유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는 반대로 ‘받기만 하다가는 부담이 되어 상대를 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도 선악과를 받으려 하셨습니다. 그런 이유는 내어놓지 않는 상태에서 주기만 하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조상들은 당연히 받기만 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자신에게서 떠나게 하고 싶다면 주기만 해서 부담스럽게 만들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주기만 하고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주는 것의 목적은 그 사람도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며칠 전 저의 신학교 입학 동기였던 한 사제가 평화방송에 나와서 7성사에 대해 설명하며 자신의 성소(하느님의 부르심)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유재선 안드레아 신부는 어려서부터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커서는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때 한 신학생과 한 방에 자게 되었는데 유재선 어린이는 신학생으로 사는 게 좋냐고 물었고 그 신학생은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며 한번 신학생이 되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자신을 다 내어놓을 수는 없었는지 거의 사제가 될 즈음 8년 만에 신학교를 나오게 됩니다. 그러자 이번엔 그에게 신학교 입학 추천서를 써 주었던 아버지 신부님이 “내가 기도를 해 봤는데, 넌 어떤 식으로든 사제가 될 거라는 답을 받았어.”라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물론 그 말을 믿지는 않았는데, 어찌어찌하다가 프란치스코 전교봉사회에 입회하게 됩니다.
그런데 삶이 신학교 때보다 더 힘들어서 한 1000번은 짐을 쌌다가 풀었다가 했다고 합니다. 결국, 종신서원을 얼마 남기지 않고 떠나려는 찰나에 십자가에서 어떤 음성을 듣고는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게 됩니다.
이렇듯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은 우리가 더 많이 가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내어놓게 하시는 일입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주님께 가다가는 잘못된 주님을 섬기게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께 당신 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쏟아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최종목표입니다.
신원조회도 안 되는 산속에서 40년 동안 홀로 살아온 할머니가 있습니다. 남이 버린 음식을 주워와 먹으며 살았는데 조현병 증세까지 보였습니다.
제작진들이 완강한 할머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추운 겨울에도 텐트에서 버티며 열흘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는지 자신이 한 밥을 나누어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역시 그 밥도 보통 사람이 먹기는 역겨울 수 있으나 제작진은 맛있게 먹어줍니다. 할머니께서 조금씩 내어놓을 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자신의 음식을 먹어준 제작진의 소원대로 병원을 가기위해 산을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참사랑은 이렇게 자신의 것을 내어놓을 수 있을 때까지 끈질기게 계속됩니다. 내어놓을 수 있으면 순종도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도 이처럼 누군가와 함께 머물며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자신들에게 순종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도록 파견된 것입니다.
대화할 때 혼자만 이야기하면 그것이 대화일까요? 상대도 말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을 넘어서서 내어놓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감사의 마음을 일으켜 내어놓게 하시지만, 우리 또한 주님의 기도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내어놓게 청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주어도 내어놓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떠나는 것이 옳습니다. 내어놓는 빈 곳에 주는 이의 것이 채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내어놓는 공간에 상대의 것을 채우는 것이 관계입니다. 그래야 상대 안에 내가 살고 내 안에 상대가 살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방법입니다.
주고받음이 없이는 어떤 관계도 형성되지 않고 그래서 복음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기쁘게 내어놓게 만드는 사람이 진짜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받는 것도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떻게 또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초등학교 다닐 때, 제가 사는 동네에 커다란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파트를 짓는다고 합니다. 층수가 자그마치 15층, 높아서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는 고급 아파트라고 합니다. 지금이야 15층 하면 그렇게 높다고 하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높은 층수였습니다.
이 아파트가 세워지고 입주가 시작되면서 친구들과 아파트로 놀러 갔습니다. 이 아파트에는 근사한 어린이 놀이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흙바닥에서 고무공 가지고 놀았던 당시에 이 놀이터는 신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몇 번만 들어갈 수 있었고, 얼마 뒤부터는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외부인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세워지면서 우리의 아파트 입장도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우리 집도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졸랐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아파트 내에 외부인이 들어가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거주민만을 위한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아파트 단지 내 정원만 개방해도 굳이 공원을 만들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 것’이라는 생각, 남과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의 부재가 중복 투자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마음, 나눔의 마음이 우리 모두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욕심이 우리를 계속해서 갈라놓습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집이나 고을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저를 털어 버려라.”
발밑의 먼지를 터는 것은 고대 근동 사람들이 결별의 뜻으로 하던 몸짓이었습니다. 즉, 부당한 고을,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하지 않은 고을에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날에 외면받을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십니다.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구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마음, 나눔의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의 자리를 비워나갑니다. 그래서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삶을 사십니까? 아니면 주님을 거부하는 삶을 사십니까?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게만 집중하고 있으면, 절대로 주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사랑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주님과 함께하면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또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 앨리스 먼로
주님만이 진정한 자유를 주십니다.
“신부님은 행복하세요? 기도생활, 독신생활, 하느님께 구속되는 삶이 힘들지 않아요?”
정해진 시간에 미사와 기도를 해야 하고, 독신을 지켜야 하며, 교회의 장상에게 순명해야 합니다. 누구는 이를 자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를 지키는데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은 신학교에 들어간 첫해뿐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안에서 영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자유의 억압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신학생 때부터 얼리어답터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새로운 기계를 가장 먼저 사용해보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신부가 되어서도 계속 이어졌지요. 지금 많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처음 나왔을 때, 매스컴에서 광고가 대단했고 이를 보면서 저 역시 빨리 사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낭비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고 싶다는 생각이, 기도할 때와 묵상할 때도 계속되었습니다.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에 생각의 자유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해야 할 일에 충실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지요.
주님만이 영적으로 또 육적으로 자유를 주십니다. 세상의 것은 더욱더 자신을 세상에 구속하게 할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삶의 관계.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마태 10, 8)
거져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거져 받는 우리들이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하느님의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실상 내것이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하느님의 소중한 생명이었다.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삶의 관계가 사랑이다. 주고받는 사랑의 실천이 참된 신앙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믿음과 나눔이다. 믿음을 놓치면 나눔은 사라진다. 믿음과 나눔이 머물러야 할 곳은 주님의 품이다.
삶의 의미는 주님의 은총에 있다. 주님의 손으로 나누고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가 믿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시작하는 믿음의 새날이다. 새날 안에서 내가 없어지면 털어야 할 욕심의 먼지조차 없어진다. 꽉 쥐고 있는 것을 놓는 것이 건강한 평화의 힘찬 발걸음이다.
가벼워야 더 자유롭다. 버려야 할 것이 아닌 나누어야 할 것들이다. 막힌 곳을 뚫어주시는 그리스도의 대자유이다. 그리스도는 자유롭기에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 거져 받은 오늘이며 거져 받은 평화이다. 거져 주어야 할 삶의 나눔이다. 삶이 새롭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년 7월 11일 (일) 매일미사 (0) | 2021.07.11 |
---|---|
21년 7월 10일 (토) 매일미사 (0) | 2021.07.10 |
21년 7월 9일 (금) 매일미사 (0) | 2021.07.09 |
21년 7월 7일 (수) 매일미사 (0) | 2021.07.07 |
21년 7월 6일 (화) 매일미사 (0) | 2021.07.06 |
21년 7월 5일 (월) 매일미사 (0) | 2021.07.05 |
21년 7월 4일 (일) 매일미사 (0) | 2021.07.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