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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
21년 7월 10일 (토)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요셉은, 자신은 죽지만 하느님께서 반드시 찾아오셔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이라고 형제들에게 이야기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안다고 증언하면, 당신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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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제1독서
창세 49장 29-31절, 33절 / 50장 15-26ㄱ절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그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
그 무렵
29
야곱이 아들들에게 분부하였다. “나는 이제 선조들 곁으로 간다. 나를 히타이트 사람 에프론의 밭에 있는 동굴에 조상들과 함께 묻어 다오.
30
그 동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맞은쪽 막펠라 밭에 있는 것으로, 아브라함께서 그 밭을 히타이트 사람 에프론에게서 묘지로 사 두셨다.
31
그곳에 아브라함과 그분의 아내 사라께서 묻히셨고, 그곳에 이사악과 그분의 아내 레베카께서 묻히셨다. 나도 레아를 그곳에 묻었다.”
33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분부하고 나서, 다리를 다시 침상 위로 올린 뒤, 숨을 거두고 선조들 곁으로 갔다.
50,15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보고, “요셉이 우리에게 적개심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저지른 모든 악을 되갚을지도 모르지.” 하면서,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다. “아우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분부하셨네.
17
‘너희는 요셉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너의 형들이 네게 악을 저질렀지만, 제발 형들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니 아우님은 그대 아버지의 하느님의 이 종들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주게.” 요셉은 그들이 자기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듣고 울었다.
18
이어 요셉의 형제들도 직접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아우님의 종들일세.”
19
그러자 요셉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20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1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을 위로하며 다정하게 이야기하였다.
22
이렇게 해서 요셉과 그 아버지의 집안이 이집트에 자리 잡고 살게 되었다. 요셉은 백십 년을 살았다.
23
그러면서 요셉은 에프라임에게서 삼 대를 보았다. 므나쎄의 아들 마키르의 아들들도 태어나 요셉 무릎에 안겼다.
24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
25
요셉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맹세하게 하면서 일렀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때 여기서 내 유골을 가지고 올라가십시오.” 그러고 나서 26 요셉은 죽었다.
화답송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 민족들에게 알려라. 그분께 노래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 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너희는 행복하리니 하느님의 성령이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리라.
알렐루야!
복음
마태 10장 24-33절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25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26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성체성사의 큰 은혜를 가득히 받고 비오니 구원의 은총을 풍부히 내리시어 저희가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10일 (토)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7월 10일 (토)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7월 10일 (토) 15시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주님께 맡기는 삶.
강의를 끝마치고 나면 스스로 강의에 대한 평가를 합니다. 내용은 어떠하였는지, 강의에 참여한 이들의 반응은 좋았는지 반성하는데, 그 평가는 언제나 박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제가 채우지 못한 것은 하느님께서 채워 주셨다고 믿으며 주님의 은총을 청합니다. 또한 사소한 내용을 말하더라도 대단하게 받아들여 주는 신자분들이 있기에 감사합니다. 이러한 반성 가운데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얼마나 진심으로 강의를 준비하였는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삶의 이야기로 다가갔는지, 그리고 최선을 다하였는지 되돌아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한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정의를 부르짖으며 옳은 일에 나서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행하려는 노력들이 부끄럽고 어색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할지 의심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그분처럼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겨 드리고 의지하는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고 외치는 것이 오지랖이 넓은 것 같고 어색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외면하고 숨고 피하며 살아갑니다.
주님께 맡기는 삶은 우리의 두려움을, 어색함과 창피함을, 그리고 나약함과 죄스러움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 봉헌으로 더 많이 채워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사랑과 열정만 있으면 됩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바람과 희망만 있다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세상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곧이곧대로 믿었다가는.
오늘 주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간 낭패를 보거나신앙의 위험에도 빠질 수 있을 겁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설마 이 말씀대로 될까, 설마 이 말씀대로 하실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말씀들이지요.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 허락 없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악행에 의한 수많은 살해가 다 하느님 허락 하에 이루어진다는 말입니까?
인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금하셨는데도 하느님 무시하고 제 뜻대로 하고 그래서 그것이 죄가 되잖아요?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 손밖의 존재는 하나도 없고, 하느님 사랑에서 제외된 존재는 없는데 사람은 더 그러하다는 뜻이지요.
우리는 손가락 하나도 다치지 않아야지만, 고통이나 불행한 일이 하나도 없어야지만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그런 낮은 차원의 신앙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를 온실의 꽃처럼 키우는 것을 높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요즘 면역력 약화의 문제도 비슷한 맥락에서 얘기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엄마들은 아이들을 자연과 멀리 그러니까 인공적인 환경에서 너무 깨끗하게 키워 아이들이 균들과 싸워 이길 면역력을 키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하면 주님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거라는 말씀도 주님께서 설마 정말 이러실까 생각이 들 정도로 과장됩니다.
우리는, 나는 그를 아는데 그는 나를 모른다고 하면 자존심에 크게 상처입어 나도 그를 모른다고 하기로 마음 먹지요.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그러실 리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아무리 모른다고 하여도 주님은 우리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주님을 우리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불붙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지옥은 불이 이글이글 타오는 곳이라고 믿는다면 그 믿음은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는 구식 믿음이지요.
지옥은 불이 이글이글거리는 내 밖의 어떤 곳이 아니라 미움과 분노가 이글이글거리는 내 마음 상태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내치지 않고 우리가 오히려 그분을 모른다 하고 주님 사랑을 차버렸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지요.
그리고 이 믿음을 어떻게 갖게 됐냐 하면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차버러지 부모는 결코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고서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머리로서는 아는데 그런데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어떻습니까? 고통을 받게 되면 자신이 주님의 사랑 밖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고통을 주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을 모른다고 한 죄의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더 나아가 그렇게 믿어버리면 주님도 어쩔 수 없으십니다. 믿는 대로 될 것이기에 그것이 그의 벌이고 그의 지옥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은 지금 속한 세상을 찢을 용기를 준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한다면 영혼까지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은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도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덜 두렵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주님을 조금 더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아갈수록 당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게 되어있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하면 큰 차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사랑이 이렇게 죽음의 두려움도 이기게 만드는 이유는 사랑이 영원한 생명의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 사랑만 받으며 삽니다. 그러나 더 넓은 가정이라는 세상으로 나아오면 가족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그것을 넘어서면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지금 있는 세상에 갇히게 되고 제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지금 세상을 극복하여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힘은 지금 함께 사는 사람들이 나를 죽이더라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기 피로와 무기력감, 자살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막 40대에 접어든 미혼 여성의 삶을 보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이 여성은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연봉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족스럽게 살아가기에는 충분했습니다.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난 그녀는 소위 한국의 전형적인 장녀였습니다.
아버지를 일찍이 사고로 잃은 그녀는 고등학생 때부터 집안의 기둥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도 사춘기도, 질풍노도의 시기도 그녀에게는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네가 빨리 자리를 잡아 어린 남동생을 경제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청춘도 연예도 뒤로하고 오직 안정된 직장을 잡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남동생이 재수, 삼수를 하는 동안 학원비는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하자 남동생은 그녀가 평생 엄두도 내보지 못한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를 원했고 그다음은 사업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업비용은 어머니의 대출로 이루어졌고 어머니의 대출금은 당연하게도 그녀가 갚아나갔습니다.
동생의 결혼을 여러 날 앞둔 어느 날 어머니의 다음 말은 그녀를 폭발하게 하였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 있지? 그거 네 동생 신혼집으로 주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이 남잔데 집 한 칸은 해줘야 사돈 보기에도 체면이 서지.”
기가 막힌 그녀가 “그러면 엄마는 어디로 이사할 건데?”라고 묻자 어머니는 당연한 듯 말했습니다.
“너희 집으로 가면 되지. 이제 같이 나이 먹어 가는 모녀끼리 친구처럼 한 번 살아보자!”
그녀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애 처음 반대의견을 내본 뒤 돌아오는 것은 어머니의 순식간에 일그러진 얼굴과 폭언,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빨대 꽂아 다 빨아먹은 동생의 적반하장 반응이었습니다.
“불효녀”, “욕심 많은 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누나 왜 그렇게 엄마 힘들게 해!”와 같은 비난이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는 동생이 신혼집으로 쓰고 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집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만나던 남자친구는 어머니의 반대로 헤어졌습니다.
[출처: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시다』, 권순재, 생각의 길]
위 여성의 문제는 이전 세상을 찢을 용기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자궁이 좋아서 자궁을 찢을 용기가 없다면 아기는 자궁보다 더 넓은 세상을 맛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도 어머니, 아버지를 버릴 용기가 없다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세상에 머무르도록 딸과 아들을 자기가 꼭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어머니가 나쁜 사람입니다. 나뿐인 사람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자신을 버리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딸은 어머니와 동생을 버릴 용기를 가졌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평생 살아봐야 자신의 인생은 단 하루도 살 수 없고 그렇게 해도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삶이 될까요? 어리석은 삶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도 우리를 자신들에게 충성하도록 붙잡아놓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 방법으로 위협을 합니다. 돈을 덜 준다던가 빼앗는다던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여러 위협을 견뎌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은 어쨌건 하느님 나라로 나아갈 준비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집착하여 두려움 속에 당신을 증언하지 못하고 당신을 믿는 것을 부끄러워한 것을 이해하실 수 있으실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세상의 많은 회유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하셔서 순교하셨습니다. 이 모습이 천국으로 나아갈 준비가 된 분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이용하려고 두려움이란 무기로 우리를 잡아두려 합니다. 그러나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가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고 또 성체조배도 하며 결국엔 사제의 길로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했을 때 적지 않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고 여자들의 반대도 있었으며 다니던 학교도 지금까지 공부 잘해놓고 왜 그러느냐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을 극복할 힘은 더 큰 사랑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 사람들을 더 구원하고 싶은 사랑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이 세상에서 저를 붙잡는 힘을 이겨내게 하였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성소자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위 40대 노처녀는 어머니와 동생이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해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끊을 힘도 줍니다. 따라서 사랑을 많이 성장시킨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꾸준하게 해나가야 하는 일은 ‘사랑을 성장시켜’ 언제라도 이 세상을 찢고 영원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의 사랑에 세상의 모든 질투와 인색함은 사라진다.
옛날 어느 집에 질투가 심한 사람과 몹시 인색한 사람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질투와 인색함은 서로 함께 잘 살도록 도움을 주었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상대로 허구한 날 둘이 싸웠고, 이 점을 마을 사람 모두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이 이 둘을 화해시키려고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모두 들어주마. 그런데 먼저 청하는 자에게는 하나를 주고, 나중에 청하면 그것의 두 배를 주겠다.”
이 둘은 어떻게 했을까요? 소원을 이야기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상대방이 두 배 얻는다는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방이 먼저 이야기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말을 하지 않자 임금은 질투가 심한 자에게 먼저 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잠깐 머뭇거린 질투가 심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제 눈 하나를 뽑아주십시오.”
먼저 말한 사람의 두 배를 상대방이 받는다는 말에, 자기의 눈 하나가 뽑히면 상대는 두 눈을 잃게 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남 좋은 꼴은 보지 못하겠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남의 이익을 보지 말고, 호의를 베풀어 준 임금을 봤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질투를 없애고 인색함도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계속해서 남의 이익만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투가 넘쳐나고 인색함이 멈추지 않게 됩니다. 우리도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베풀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질투와 인색함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에 충만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배척하듯이 제자들을 배척할 사람들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바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질투와 인색함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사랑의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 주님의 보살핌을 계속해서 받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기에 두려움 없이 힘차게 복음을 전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호의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참 많은 보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밤에 잠자는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주님의 보살핌이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내가 가장 힘들다고 여겼던 그 순간에도 생각해보면 주님께서 분명히 함께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세상의 모든 질투와 인색함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랑 가득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망망대해에서 두 사람이 만나면 실제로는 여섯 사람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각자 스스로 보는 두 사람, 각각 상대방이 보는 두 사람, 그리고 실제의 두 사람이다.
- 윌리엄 제임스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길 원하십니까?
어느 의사의 책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읽었습니다.
바쁜 아침의 회진 시간에, 자신이 돌보는 유방암 환자가 물어보지도 않는 내용까지 계속 의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바쁘고 귀찮기도 했지만, 차마 이 말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지요. 이런 의사의 마음도 모르고 환자는 자기 집안의 일을 비롯한 병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환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미안해요. 바쁜데 내가 너무 귀찮게 하지? 사실 선생님이 나를 암 환자로만 기억할까 봐 그래. 나야 선생님이 보는 수많은 환자 중 하나겠지만, 그냥 암 환자가 아니라 적어도 ‘재밌었던 아줌마’로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다른 이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길 원하십니까? 몸이 아픈 사람? 돈만 밝히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아니지요. 아마 열심히 살았던 사람, 사랑을 실천한 사람, 주님 뜻에 맞게 산 사람 등등 긍정적 이미지로 기억되길 바랄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랑은 소중함으로 완성된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 31)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소중함의 시간이다. 소중함이 사랑이다. 소중하고 귀한 우리들이다. 더 귀하게 만드시는 하느님 사랑이 또 우리를 비춘다. 그냥 사람이 아니다. 사랑받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영원한 소중함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 사랑받는 소중한 관계는 살아야 할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이유이다.
소중함이 깊어갈수록 사랑도 깊어간다. 소중한 존재로 변화시키시는 소중함의 하느님이시다. 이 순간이 소중한 순간이다. 기도는 소중함을 되찾는 은총의 체험이다.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들은 기도로 걱정을 맡겨드린다.
소중함으로 제일 중요한 하느님을 알게된다. 서로를 소중함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더 귀한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이다.
사랑은 소중함으로 완성된다. 소중함이 더 귀한 우리 삶의 정체성이다. 소중함은 소중함으로 관계가 확장된다. 소중하기에 삶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아픔을 치유하는 소중함이다. 소중한 오늘이 주어졌다. 소중함을 봉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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