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5주일 -
21년 7월 11일 (일)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아모스 예언자는,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그를 붙잡으시어,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다고 알려 줍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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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제1독서
아모 7장 12-15절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그 무렵 베텔의 사제
12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13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14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화답송
주님, 저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주님, 저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주님, 저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주님, 저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제2독서
에페 1장 3-14절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14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알렐루야!
복음
마르 6장 7-13절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영성체송
주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희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거룩한 선물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이 성찬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11일 (일)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7월 11일 (일)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7월 11일 (일) 15시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버리고 떠나 봅시다.
여행을 떠나려고 짐을 싸다 보면 가방이 언제나 작게 느껴집니다.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챙기다 보면, 어느새 빈 공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여행에 무엇을 가지고 갈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놓고 가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여행 가방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따져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여행을 떠나십니다. 여행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이 여정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 여행은 ‘머물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떠나기 위한 여정’입니다. 그래서 가벼워야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머무는 동안 더 가지려고 집중합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채우려고 집착합니다. 짐이 가벼우면 쉽게 떠날 수 있습니다. 나의 울타리, 습관, 행동 방식, 소유와 집착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쌓여 무거워지고 챙겨야 할 것이 많아지면 떠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짐 꾸러미를 가볍게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지금 예수님과 함께 떠나야 합니다. 자신을 묶어 두었던 것으로부터, 자기가 선택하고 결단하였다고 생각한 것들로부터, 그러한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세상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그대로 지니고 간다면, 또 다른 집착에 허덕이며 살게 될 것입니다.
짐을 가볍게 하고 예수님과 함께 떠나는 길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그 중심으로 향하는 여정입니다.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머무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발견합니다. 버리고 떠나 봅시다.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가까운 사람에게 파견되는 우리.
오늘은 파견 얘기이고 독서는 아모스 예언자가 파견되는 얘기입니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복음은 사도들이 파견되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파견되는 얘기를 묵상하다가 남의 파견 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나의 파견도 얘기해야 하지 않나 생각되어 나의 파견을 묵상케 되었습니다.
관구장을 마치고도 저희 관구의 선교 책임을 오랫동안 맡았던 저는 파견된 적은 없고 형제들만 파견한 것 같았기 때문인데 그런데 저는 정말 파견되지 않고 파견만 한 존재였는가? 하느님만 파견하시는 분이고 인간은 누구나 파견되는 존재가 아닌가? 이런 묵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시작된 묵상은 저에 대한 성찰로 바뀌었고, 성찰은 반성으로 바뀌었는데 그것은 감히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고는 자신이 파견되었고 파견될 존재라는 저의 정체성을 너무도 어처구니없지만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반성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수도 생활에 관한 문헌 <봉헌 생활>이 생각났습니다. 여기서 수도 생활의 모범인 예수님께서는 <A Patre, Ad Patrem>의 존재 그러니까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가신 분이라고 얘기되고 있지요.
그러고 보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라는 존재는 근본적으로 출생 자체가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으로 파견된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거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지요. 그것도 우리의 의사를 물으시고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 뜻대로 창조하셨고 이에 우리는 군소리 없이 태어난 존재이고요.
그렇다면 파견된 나는 과연 파견의 삶을 살고 있는가?
답하기 참 어렵지만, 예나 지금이나 파견을 거부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파견에 얼마나 깨어 있었는지 그 의식의 차원에서는 오늘 독서에서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라고 한 아모스 예언자처럼 많이 깨어 있지 못했고 특히 일상의 차원에서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선교 강의 때 참 많이 얘기한 바와 같이 우리는 매일 미사의 끝에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파견을 받는데 해외 선교사라면 해외로 파견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우리는 그 첫째가는 파견지가 바로 같이 사는 가족이요, 형제들이지요.
같이 사는 사람에게 나는 남편이기도 아내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파견되는 선교사요 예언자이기도 하다는 말이고, 그들은 내가 복음을 들고 또는 살아있는 복음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이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우리는 이웃에게도 직장 동료에게도 파견되었고 찾아가야 하는데 수없이 만나면서도 하느님께서 나를 그들에게 파견하셨다는 의식이 없이 만났고 그래서 많은 경우 저는 복음 없이 주님은 떼어놓고 만났습니다.
게다가 요즘의 저는 현저하게 인간적인 만남조차도 소극적입니다. 일의 추진력이 전보다 못함은 물론 일을 벌이는 것도 주저합니다. 이것을 저는 전보다 힘이 떨어져서 그런 줄로만 생각했는데 오늘 저 자신을 더 성찰하고 반성해보니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성찰인데 지금의 저는 여기서 무엇을 하기보다 여기를 떠날 생각을 더 하고 그래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인 것 같은데 그때부터 저는 이 세상에서 뭘 하는 것보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을 더 생각하고 그 돌아갈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왔으니 아버지께 돌아가긴 가야지요. 그래도 돌아갈 그때까지는 파견된 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어쩌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수도자로서 오랜 초기 양성기간을 마무리한 형제들, 이제 곧 사제품을 받고 본격적인 사목 일선에 투입될 형제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기에, 다양한 어려움이 곳곳에 산재한 십자가 길이기에, 선배로서 이런 저런 충고를 하다 보니 말이 자꾸만 길어지더군요.
“잘 아시는 바처럼 사제품은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여러분은 신입사원도 아니고 수습사원인 셈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궂은일을 하는데 주저하지 말길 바랍니다. 만나게 될 신자들과 청소년들, 함께 일하는 직원들 앞에서 한결같은 겸손의 자세를 유지해 주십시오. ‘내가 신부인데! 내가 원장인데!’하는 말은 절대 금지입니다. 무엇보다도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평생 가난한 사제로 살아주십시오. 소임이동 때는 여행용 가방 두개면 충분합니다. 양손에 가방 두개 달랑 들고 고속버스 타고 이동해주시면 그 자체만으로 사제로서 성공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저처럼 훈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 용 짐을 이런 식으로 꾸리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규범’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말씀 가운데 유독 다음의 말씀이 가슴이 꽂힙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갖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을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코 복음 6장 8~9절)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 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의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당부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사목자들이 좀 더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 신앙의 본질과 핵심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 비본질적이고 지엽적인 것들에 몰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제 개인적 생각인데, 아무래도 우리가 행하는 제반 사목에 대한 지속적인 회개의 결핍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사목자로 서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반성이 요구됩니다. 거듭되는 사목적 회개가 필요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은혜로운 사목적 회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도회 입회 전, 중고등부 교리교사를 할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부족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일종의 천국 체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위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별로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자연스레 교리교사로서의 사명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수도회 입회 후에도 비슷한 체험이 계속되었습니다. 상처 입은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틈만 나면 티격태격했지만, 그 와중에 아이들로부터 혈육 이상의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맛본 이후 사목자로서의 대대적인 회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니 그걸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힘들지만 아이들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돈이며, 좋은 차며, 메이커 옷도 다 필요 없었습니다. 어디 외출 나가도 머릿속은 늘 아이들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의 행복, 아이들의 구원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자연스레 나 자신을 위한 투자는 줄어들었습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청빈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우리가 부차적인 것들, 외적인 것들,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그리도 관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사목적 회개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사목 대상자들, 양떼들로부터 진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들이 나를 너무 사랑하고 존경해서 틈만 나면 나를 찾고, 내 소매를 붙들고 늘어진다면, 그 사랑 체험을 한 이후 어찌 그들에게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지닌 말씀의 칼날을 날카롭게 유지 하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왜일까요? 혼자 다니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충실할 수 있을 텐데 둘이 다니면 계속 상대를 신경 써야 하는데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근본이 먼저 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사랑실천에 있음을 보여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본당 신부와 보좌 신부, 본당 신부와 수녀님들, 혹은 수녀님들 간에 화목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그분들이 어떤 복음을 신자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요? 먼저 복음을 전하는 이들 안에서 사랑이 실천되어 화목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 내용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주님이 계심을 믿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것이 ‘가난’입니다. 예수님은 빵과 돈과 여벌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먹고 자고 입을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충분히 있어야 신경을 쓰지 않게 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가질수록 더 신경 쓰게 되어있습니다. 그냥 주님의 섭리에 맡기면 됩니다.
저도 돈이 필요할 때면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돈을 줄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욕심이 생기면 사람의 영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익을 챙길 도구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큰 장애가 됩니다.
만약 어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지나치게 막 대하다고 가정해봅시다. 시어머니는 자신처럼 부잣집에 자기 아들처럼 대단한 사람에게 며느리가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서입니다. 이렇게 돈을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이 공동체에 있다면 그것 때문에 공동체가 갈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오는 사람도 그러한 시선으로 보기에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이가 이런 시어머니와 같이 되면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중국 고대 전국시대 문혜왕(文惠王)을 위하여 당시 최고의 백정인 포정(庖丁)이란 사람이 소를 잡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의 손이 닿는 곳이나 어깨를 기대는 곳이나 발로 밟는 곳이나 무릎으로 누르는 곳은 푸덕푸덕 살과 뼈가 떨어졌습니다. 칼이 지나갈 때마다 설겅설겅 소리가 나는데 모두가 음률에 들어맞았습니다. 그의 동작은 상림(桑林:탕 임금이 만든 춤)의 춤과 같았으며, 그 절도는 경수(經首:요임금이 만든 음악)의 절주(節奏:가락이 반복될 때의 그 규칙적인 음의 흐름)에 들어맞았습니다.
문혜왕이 보고 말하였습니다.
“아아, 훌륭하도다. 재주가 이런 지경에 이를 수가 있을까?”
백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로서 재주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았을 적에는 보이는 것 모두가 소였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는 완전한 소가 보이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은 멈춰 버리고 정신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천연(天然:사람이 힘을 가하지 않은 상태)의 조리를 따라서 큰 틈을 쪼개고 큰 구멍을 따라 칼을 찌릅니다. 소의 본래 구조에 따라 칼을 쓰므로 힘줄이나 질긴 근육에 부닥뜨리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에야 부딪치겠습니까?
훌륭한 백정은 일 년마다 칼을 바꾸는데 살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백정들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19년이 되었으며, 그사이 잡은 소는 수천 마리나 됩니다. 그러나 칼날은 숫돌에 새로 갈아 내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엔 틈이 있는데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넣기 때문에 휑하니 칼날을 움직이는데 언제나 반드시 여유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19년이 지나도 칼날은 새로 숫돌에 갈아 내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뼈와 살이 엉긴 곳을 만날 때마다 저도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조심조심 경계하면서 눈은 그곳을 주목하고 동작을 늦추며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면 뼈와 살이 후드득 떨어져 흙이 땅 위에 쏟아지듯 쌓입니다. 그러면 칼을 들고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기분에 잠깁니다. 그러고는 칼을 닦아 잘 지킵니다.”
문혜왕이 말하였습니다.
“훌륭하도다. 나는 백정의 말을 듣고서 삶을 기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이 이야기는 『장자』의 '양생주(養生主)'편에 나오는데 포정이 소를 잡는다는 뜻으로 ‘포정해우’(庖丁解牛)라 합니다.
장자가 말하는 ‘도’(道)’란 우리가 말하는 ‘진리’와 같습니다. 진리를 터득한 포정은 다른 백정들과는 달리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정신으로 봅니다. 진리를 터득한 사람은 소를 돈으로 보지 않고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분해한다는 뜻입니다. 무아의 경지에서만 소의 본질을 보고 그것을 분해하는 데에서 춤추듯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도 병자가 잘 낫지 않고 악령을 쫓아내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어쩌면 우리 진리의 칼이 무뎌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내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의 관계가 좋은지 살펴야 합니다.
좋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서로 사랑한다면, 그다음은 ‘가난’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가 세상 것을 바라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시선이 소에게 빼앗겨 힘줄을 건드리고 뼈를 건드려 칼날이 무뎌집니다.
우리도 포정이 소를 육신의 눈이 아닌 정신으로 대하되 이치에 따라 조금도 억지가 없이 춤추듯 칼을 놀리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 대해 스스로 욕구를 버리고 대상에 대한 의식이 없이 자연의 섭리를 따라 행동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욕구에 사로잡히면 자연의 이치를 보는 눈을 잃어 성령의 칼날도 무뎌지고 그러면 복음을 전할 힘을 잃습니다. 백정이 무딘 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말씀의 칼날이 무뎌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사랑의 가족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 자신부터 세속의 욕망을 없애 공동체와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무언가 세속적인 것을 바라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어디에 희망을 두고 있을까요?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 학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 이때를 놓치면 공부하고 싶어도 못 해. 대학교에 들어가서 실컷 놀고 지금은 열심히 공부할 때다.”
각종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향해 어른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합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좋아진단다.”
어떻습니까? 모두 맞는 말입니까?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다 거짓말 같습니다. 공부는 고등학교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하는 것이었고, 어른이 될수록 책임이 커져서 더 힘든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어른이 하는 말에 문제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어쩌면 세상 안에 거짓이 많아서 거짓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요?
시간이 지나면 잘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보다는 분명히 잘 되는 근거 있는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이 그 희망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이 지금에 더 충실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이라는 거짓된 희망이 아닌, 주님이라는 진짜 희망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명령을 하십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많은 것을 챙겨줘서 기쁜 소식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시니 이해하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제자가 아닙니까? 특히 악이 가득한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는 것이 불안하지 않으셨을까요?
세상의 것에 희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만 희망을 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의 것에 희망을 두고 세상의 것을 채우다 보면 주님의 자리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빈 마음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빈 마음이 있어야 그 자리에 주님께서 사랑으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희망을 두고 있을까요? 주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만이 희망 없는 세상 안에서 진짜 희망을 품고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꿈은 머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손으로 적고 발로 실천하는 것이다.
- 존 고다드
괴물이 되면 안 됩니다.
기원전 4세기에 활약하던 그리스 조각가 프락시텔레스는 어느 날 두 개의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정교하고 빼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이 중 하나를 감추고,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했습니다.
공개된 작품을 보고 “이곳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그 말대로 고쳤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하나도 흘려버리지 않고 모두 따르면서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조각상은 어떠했을까요? 처음에 만든 작품보다 더 뛰어난 작품이 되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괴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숨겨둔 조각상을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혼자 만든 것인데 이렇습니다. 그리고 이 괴물은 사람들의 말을 모두 듣고 만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모두 달라서, 제가 모든 사람에게 아름답게 칭찬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겠다고 고치다간 이렇게 괴물이 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 때로는 필요하겠지만, 전적으로 따르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괴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말씀만을 온전히 따르면서 자기 고유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사명감은 목적지와 같다.
사마천과 우장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마천은 중국의 사관입니다. 사마천은 ‘기전체(紀傳體)’라는 양식의 기록을 남겼고, 후대의 사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기전체는 인물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사마천의 기록을 통해서 중국 고대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진시황제의 이야기, 황우와 유방의 이야기를 사마천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삼국유사, 고려사는 사마천의 기전체 양식을 따른 우리의 역사서입니다. 사마천이 역사에 남을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사형을 모면하는 대신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포기하는 궁형을 감수했기 때문입니다.
우장춘 박사는 세계적인 육종 학자였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하였고, 일본인 아내와 자녀를 낳아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1950년 대한민국은 가난하였습니다. 농사를 지을 씨앗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모든 씨앗을 일본을 통해서 얻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의 농림부 장관은 우장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한국에 와서 일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195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한민국의 농업발전을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 제주도에서는 감귤을 재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강원도에서는 씨감자를 재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배추를 재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우장춘 박사가 한국의 농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에서의 풍족한 삶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포기’의 또 다른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마천이 명예로운 죽음을 포기하고 궁형이라는 수치스러운 삶을 선택한 것은 후대에 남을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장춘 박사가 일본에서의 풍족한 삶을 포기하고 신생 대한민국에서 고된 삶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 나라에 대한 헌신이라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18년 교구청에서 성소국장으로 5년을 지내고 떠났습니다. 특수사목을 5년 동안 했었기 때문에 본당사목을 원하면 주교님께서는 본당사제로 보내 주셨을 것입니다. 저는 주교님께 본당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청을 받아 주셨고,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로 갈 수 있는지 제안하셨습니다. 저는 주교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2019년 8월 21일 미국으로 왔습니다. 어느덧 2년이 되었습니다. 사마천이나 우장춘 박사처럼 특별한 사명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의 포기를 후회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사명감’을 이야기합니다. 사명감은 목적지와 같습니다. 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비록 힘들어도, 고난이 닥쳐도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내딛습니다. 1시간만 더 걸으면 시원한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참을 수 있습니다. 곧 더위와 갈증을 피할 수 있는 물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아모스는 그저 가축을 키우는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가축을 키우는 목자의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빵도, 전대의 돈도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발은 신지만 옷도 두벌은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여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성공, 명예,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박해와 고난이 있었고, 목숨을 바쳤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포기한 것이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포기도, 선택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난한 마음이 믿음이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마르 6, 12)
제자들은 주님께서 바라시는대로 길을 떠난다. 길을 떠나면서 더더욱 깨닫게되는 하늘 나라의 신비로운 여정이다. 사랑은 회개를 동반한다. 회개의 삶이란 소유하지 않고 나누는 하늘나라의 삶이다. 하늘 나라의 삶은 빛처럼 감출 수 없다.
우리의 삶이란 신비로운 만남의 연속이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이다. 떠나고 돌아오는 모든 여정이 은총이다. 떠나는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다. 믿음은 소유하지 않는 가난한 여정이다. 가난하기에 깨어있을 수 있고 맡길 수 있다.
가난한 마음이 믿음이다. 우리가 가지고 떠나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믿음이다. 물질은 우리를 얽매이게 하지만 믿음은 우리를 자유롭게한다. 믿음은 구체적인 하늘 나라의 나눔이다. 떠남도 회개도 선포도 나눔이다.
은총은 나눔으로 빛을 발한다. 제자들은 사람들 안에 계시는 주님, 그 빛을 기쁘게 뵙게된다. 믿음은 거룩한 만남의 여정이다. 거룩한 은총의 주일에 기도를 나눈다. 믿음의 향기와 맛은 간절한 마음에 있다. 활짝 피어나는 믿음의 꽃이길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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