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7월 7일 (수)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7. 7.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

 

 

21년 7월 7일 (수)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요셉이 이집트에 곡식을 사러 온 형들을 감옥에 가두자, 그들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라고 서로 말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분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7월 7일 (수)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창세 41장 55-57절 / 42장 5-7ㄴ절, 17-24ㄱ절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무렵 

55 
이집트 온 땅에 기근이 들자, 백성이 파라오에게 빵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러자 파라오는 모든 이집트인에게 말하였다. “요셉에게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56 
기근이 온 땅에 퍼지자, 요셉은 곡식 창고를 모두 열고 이집트인들에게 곡식을 팔았다. 이집트 땅에 기근이 심하였지만, 

57 
온 세상은 요셉에게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몰려들었다. 온 세상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42,5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가는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때 요셉은 그 나라의 통치자였다. 그 나라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이도 그였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들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절하였다. 


요셉은 형들을 보자 곧 알아보았지만, 짐짓 모르는 체하며 그들에게 매몰차게 말하면서 물었다.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 

17 
그러고 나서 그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18 
사흘째 되던 날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살려거든 이렇게 하여라. 나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19 
너희가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너희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만 감옥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굶고 있는 너희 집 식구들을 위하여 곡식을 가져가거라. 

20 
그리고 너희 막내아우를 나에게 데려오너라. 그러면 너희 말이 참되다는 것이 밝혀지고, 너희는 죽음을 면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21 
그들이 서로 말하였다.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애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 주지 않았지.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 거야.” 

22 
그러자 르우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기에 내가 ‘그 아이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하고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말을 듣지 않더니,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23 
그들은 자기들과 요셉 사이에 통역이 서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알아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24 
요셉은 그들 앞에서 물러 나와 울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고운 가락을 내며 환성 올려라.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주님은 민족들의 의지를 꺾으시고, 백성들의 계획을 흩으신다. 주님의 뜻은 영원히 이어지고, 그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0장 1-7절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성체성사의 큰 은혜를 가득히 받고 비오니 구원의 은총을 풍부히 내리시어 저희가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7일 (수)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7월 7일 (수) 15시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늘 그분 발치에 머물러 있어야 해.

 

사제의 삶은 ‘보내어지는 삶’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없는 삶입니다. 원하지 않은 곳이더라도 일단 파견되면 자신의 생각과 의향은 접고 보낸 사람의 뜻과 가치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사제는 이러한 생각과 순명의 의지를 가슴 속에 담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제만 그래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파견되는 삶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미사 전례는 언제나 파견 예식으로 끝마칩니다. 사제가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다짐을 권유하면, 신자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응답합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바로 ‘사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가까이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시고, 그들은 예수님을 온몸과 온 마음으로 느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나누어 주십니다. 당신께서 가지고 계시던 능력, 곧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자신의 능력과 장점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게서 거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에게서 파견된 사도입니다. 이때 우리의 재능이나 능력이 아닌 그분의 선택과 부르심으로 그렇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기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성사를 통하여 늘 그분 발치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분 곁에서 우리는 그분을 알고 그분을 배우고 그분을 느끼며 그분의 힘과 능력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연대하는 용기와 위로하는 마음을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도로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모이는 자, 모으는 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오늘 복음은 제자들중에서 열둘을 사도로 부르시고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의 <부르심과 파견>의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진지하게 성찰한다면 누구나 이것이 사도들만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성찰할 것이고, 저도 여러분도 사도로 부르심받고 파견되는 존재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란 어떤 존재입니까? 

첫째로 부르심에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뭐 대단하다고 하느냐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것도 잘 성찰하면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란 주님께서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제자들이 마음대로 또는 잇속으로 모여든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한 존재이며 그뿐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걷어차지도 않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둘째로 모인 존재란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만 부르시고 그래서 혼자 갔으면 모였다고 하지 않지요. 

우리 성소의 아주 중요한 측면입니다. 우리의 성소는 개별 성소이기도 하지만 모임의 성소요 그래서 교회 성소입니다. 

수도자로 치면 우리는 독수 수도자가 아니라 공동생활 수도자이고, 주님 앞에 공동으로 나아가고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것이듯 우리의 숫자가 셋이나 넷밖에 안 될지라도 우리가 주님을 중심으로 모이면 우리는 교회를 대표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이는 존재일 뿐 아니라 모으는 존재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특별히 부르심받는 이유도, 파견되는 이유도 바로 그리고 다 이것 때문입니다. 

나만 주님 곁에 있고, 

나만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나만 주님의 치유를 받고, 

그래서 나만 구원을 받는 그런 이기주의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는 모으기 위해 파견되어야 합니다. 

어제 복음의 끝에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음을 한탄하시며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추수 밭 주인에게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라고 하신 주님의 뜻에 따라 사방에 흩어진 주님의 양 떼를 모으기 위해 파견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을 자랑스럽게나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부담스럽게만 생각할 사람은 빠질 것입니다. 

며칠 전 이 영광스러운 일에 초대를 하였더니 나이 핑계를 대며 빼는 것이었습니다. 

늙어서도 늙은 것 만큼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늙은이이면 늙은 사람을 모아도 되는데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걷어차니 불쌍해보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냉담률이 높으면 선교도 힘들어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십니다. 이때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하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마음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한 이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다른 민족이나 사마리아인들에게 가지 말라고 하시고 우선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어쩌면 아직 그들의 능력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이미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길 잃은 양에게 하늘 나라를 실현하게 하라는 말씀은 우선 ‘내실’을 먼저 기하라는 의미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요즘 코로나가 회복되어도 기존의 50% 신자만 다시 성당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국 평균으로 하면 신자의 10% 수준만 주일미사에 참례한다는 뜻입니다. 세례받은 10명 중의 9명은 길잃은 양들입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2021.06.08 방송)에서 방영된 내용입니다. 아파트 9층 베란다에 사납기로 소문난 황조롱이가 날아들었습니다. 주인장의 눈을 오랫동안 응시하던 천연기념물 황조롱이는 다음 날 알 하나를 베란다에 낳고 갔습니다. 그다음 날도 하나, 그다음 날도 하나. 이렇게 6마리의 새끼들이 태어났습니다. 엄마 황조롱이는 아빠 황조롱이가 물어오는 음식을 잘 다듬어 새끼들에게 먹였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른 어느 날 새끼 한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이소’를 시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소란 새가 자기 둥지를 떠나는 첫 비행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없어진 한마리가 이소에 성공하지 못하고 다른 새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파트 바닥까지 떨어진 첫째는 고양이와 다른 동물등의 공격 대상이 되었지만, 아파트 주인의 발 빠른 대처로 전문가를 불러 다시 베란다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첫째 황조롱이는 바로 다시 비행을 시도했고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가 하는 것을 보고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이소에 성공합니다. 마지막 남은 막내는 좀 약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있던 어미 황조롱이가 무서워하는 막내를 위해 먹이로 유인해서 조금씩 나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러자 황조롱이의 새끼들이 모두 다 잘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며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새끼 새의 주위에서 항상 새끼 새를 지켜보며 스스로의 힘으로 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줬던 것입니다. 그리고 새끼 새가 아파트 베란다에 있으면 언제나 안전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 새끼들이 하늘 높이 비상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보호해주고 응원해주었습니다. 이는 새끼 새를 안전하게 맡아줄 아파트 주인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 본성을 완성하는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리스도처럼 사랑으로 또 누군가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본성적으로 선교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으로 만들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선교하려면 자녀를 낳아 안전하게 맡길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그런 사도들을 배출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한다고 해도 10명 중의 9명을 잃어버리는 상태라면 선교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선교할 마음이 생길 수 있을까요? 

영화 ‘가버나움’(2018)에서 집을 뛰쳐나온 자인은 결국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법정에 고소합니다. 키울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을 낳아놓고 형제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부모가 원망스러웠던 것입니다. 부모는 능력을 다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자인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부모를 고소하는 자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냉담률을 줄이지 않고 선교만 강조한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당에 나와서 세례를 받았더니 고해성사도 무섭고 미사 드리는 것도 재미가 없는데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 하나 없다면 그런 식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어쩌면 자신에게 선교한 교회를 고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냉담률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 이전에 ‘기를 살려주시는 목자’로 나오십니다. 그리고 그런 목자들을 많이 보내 달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미사 때 하느님의 자녀가 됨을 기뻐하며 기가 살아야 하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공동체가 있기에 세상에서도 당당히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냉담률이 높은 것입니다. 

먼저 전례 개혁이나 소공동체 개혁을 통해 기가 사는, 행복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길 잃은 양들이 돌아올 것이고 그들이 또 새로운 이들을 선교할 것입니다. 냉담률이 높다는 말은 교회가 매력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먼저 매력 있는 교회가 되어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선교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 사도들과 그 곁에 모이고 싶어서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 싶어 했던 그런 교회의 모습을 희망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와 동등하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이었던, 2004년은 제가 갑곶성지에 처음 발령받아왔던 해였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미사를 할 수 있는 경당을 먼저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원래 있던 건물 일부분을 부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미사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토목 공사를 했습니다. 
 
솔직히 건물 허무는 것을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오함마라고 불리는 커다란 망치로 마구 부수고 정리하면 되는 것으로 간단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일에 순서가 있다고 토목회사 사장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렇게나 허물다 보면 건물이 무너져서 위험할 수도 있고, 또 시간 절약을 위해서도 체계적으로 따로 떼어 부셔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사로운 욕망을 품습니다. 이를 부셔야지만 깨끗한 마음으로 지금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욕망을 억제할 수 있을까요? 건물을 부수는 것처럼 우리의 욕망도 체계적으로 부숴 나가야 합니다. 간단한 것부터 어렵고 힘든 것을 향해서 체계적으로 말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셨습니다. 사도는 단순히 제자와 다릅니다. 사도는 파견된 이, 사자, 더 나아가서는 전권을 위임받은 이를 뜻합니다. 특수 사명을 띠고 파견된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와 동등하다.’ 
 
사도가 되어 세상에 파견되는 것은 주님과의 동등함을 가지고 파견된 것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받았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같이 다니며 하나씩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세상에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교육 방식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계속됩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또 신심 서적 등을 통해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이런 노력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처럼 삽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금 해야 할 것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분명히 도착하게 되어 있어. 오래 걷다 보면 말이야.

- 루이스 캐럴

 

 

인간의 네 부류.

 

인간은 네 부류로 나눠진다고 합니다. 
 
첫째, 훌륭한 사람. 자신을 존중하고 남을 존중합니다. 자신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남도 귀하게 여길 줄 압니다. 타인과의 관계도 잘 이끌어가며 자신과의 관계도 잘 유지합니다. 
 
둘째, 나쁜 사람. ‘나쁜 놈’이 ‘나뿐인 놈’에서 나왔다고 하듯이, 오직 나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를 귀하게 여기지만 남은 발가락의 때만도 안 여깁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은 어떤 피해를 보든지 알 바가 아닙니다. 
 
셋째, 착한 사람. 남은 존중하지만, 자신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남을 돌보느라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자신의 욕구보다 항상 남의 눈치가 더 중요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편의를 위해 이 착한 사람을 자꾸 이용합니다. 세상살이에서 상처받아 점점 지쳐갑니다. 
 
넷째, 아픈 사람. 자기도 돌보지 않고 남도 돌보지 않습니다. 남을 돌보지 못하므로 관계가 나빠지고 이것이 아픈 자신을 회복시키기 어려운 쪽으로 작용해서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 혐오 수준으로 갑니다. 세상만사가 다 싫고 미우니 심한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존중은 훌륭한 사람이거나 최소한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늘 나라의 구원은 실천이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 10, 7) 

하늘 나라를 찾습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의 다양성과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인정하는 나라이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새로운 삶의 나라이다. 가까이 온 하늘 나라는 이렇듯 친근한 고향과 같다. 

하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하늘 나라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신다.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는 복음의 길이다. 하늘 나라는 하늘 나라로 이어지고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완성된다. 

하늘 나라의 구원은 단연코 실천이다. 가슴 뛰도록 기쁘고 행복한 하늘 나라와의 만남이다. 하늘 나라가 우리의 참 스승이시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다. 가까이 온 하늘 나라가 맑다. 맑기에 아파도 희망이 있다. 마음과 실천 부르심과 응답은 분리될 수 없다. 

하늘 나라가 먼저 하늘 나라를 여셨다. 절망과 간절한 마음을 위로하시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가까이서 가르쳐주신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다시 묻는다. 하늘 나라가 부재중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이 부재중인 것이다. 하늘 나라는 실천의 나라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