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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토마스 사도 축일 -
21년 7월 3일 (토)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성 토마스 사도 축일 (Feast of Saint Thomas, Apostle)
사도 토마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쌍둥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던 토마스는 매우 강직한 제자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해치려고 했던 베타니아 마을로 가시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요한 11,16) 하고 큰 용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는 불신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요한 20,25).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 오늘 제1독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신자들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시라고 선포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당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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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제1독서
에페 2장 19-22절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화답송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이 말씀하신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알렐루야!
복음
요한 20장 24-29절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영성체송
네 손을 넣어 못 자국을 확인해 보아라.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이 성사에서 참으로 성자의 몸을 모시고 비오니 복된 토마스 사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주님이며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저희가 그 믿음을 삶으로 증언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3일 (토) 매일미사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7월 3일 (토) 매일미사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 보십시오.
성체 분배를 하다 보면 신자의 얼굴보다는 손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때때로 여기저기 갈라진 틈 사이로 기름 때인지 흙먼지인지 모를 노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손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험하게 살아 온 세월의 흔적을 보여 주듯 손가락의 한 마디가 없는 손도 있고, 손바닥에 굳은살이 붙어 나무껍질 같아 보이는 손도 있습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직접 대화하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힘들고 고단하게,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 왔는지를 느끼게 해 주는 손입니다. 성체를 건네는 사제의 손을 숙연하고 미안하게 만드는 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손과 손이 만납니다. 한 손은 십자가의 상처가 남아 있는 손입니다. 뚫린 못 자국의 아픔과 핏자국이 아직 가시지 않은 손이지만, 괜찮다며 먼저 내밀어 주는 손입니다. 또 하나의 손은 확신을 바라는 손입니다. 또다시 실패할까 두려워 믿고 의지하지 못하는 손이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손입니다. 자신의 손짓 하나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오만과 자만의 손이며, 타인의 말과 감정을 듣지도 함께하지도 못하는 매정하고 비정한 손입니다. 그러한 두 손이 만납니다.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손가락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상처 입고 구멍 뚫린 손에 가 닿습니다.
그 한 번의 만남을 통하여 토마스가 모든 것을 깨달을 수는 없었겠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상처의 아픔이, 그 십자가 죽음의 고통이 바로 자신 때문이었음을 말입니다. 이 두 손의 만남은 어쩌면 공감의 마음일 것이고, 어쩌면 외면에 대한 미안함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 보십시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느낌을 통하여 그의 지나온 삶에 공감하고, 조금은 미안함이 깃든 사랑을 만나 보셨으면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사보다 공동체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 사도는 그들과 함께 있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서야 돌아온 토마스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일주일 뒤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의 의심을 해갈시켜 주십니다. 그러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도대체 어떻게 보지 않고서 믿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저의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는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가 고양이를 낳았다면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TV 동물농장에 ‘개가 고양이를 낳았다? 출생 미스터리의 진실!’이란 내용이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완도에서 개가 고양이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찾아갔습니다. 어미 나주는 혼자만 다른 모습의 고양이처럼 생긴 새끼를 낳았습니다. 새끼를 낳을 때 주인이 보고 있었는데 30분 뒤 고양이 새끼가 한 마리 더 있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개가 낳았다고 믿어지지만, 고양이인 것 같아서 전문기관에 유전자 검사까지 하게 됩니다. 어미는 다른 새끼들보다 작은 고양이 새끼를 더 신경 써줍니다. 어쨌건 유전자 검사는 고양이가 맞습니다. 아마도 새끼를 낳은 그 30분 동안 어떤 고양이도 새끼를 낳았는데 밖에 나온 자기의 새끼인 것 같아서 그것을 물어와서 자기 새끼들과 함께 두었고 냄새가 같아져서 자기 새끼로 인식을 하게 된 것으로 추측합니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 한 오리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서는 좀처럼 불편해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같은 부모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고 다른 부모에 의해 키워졌다면 그 공동체에 머물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한 공동체가 형성되면 반드시 그 구성원들의 부모를 그 공동체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기까지 그 사람을 성장시켜 준 부모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양식과 가르침으로 키웠습니다. 양식으로는 부모가 창조자임을 믿게 만든 것이고 가르침으로는 부모의 모범을 따르게 한 것입니다.
모기처럼 자기만 아는 상태로 태어나서 공동체에서 나눔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다 이 부모 때문입니다. 그러니 각자가 공동체 안에서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 부모의 모범이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가 이기적이었는데 자녀가 공동체에서 희생하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에서 형성되는 공동체 안에서는 각자의 부모인 누가 보일까요? 바로 하느님이 보입니다. 성령도 보이고 그리스도도 보입니다. 하느님은 성령이라는 양식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리스도라는 모범으로 우리를 성장시키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당신 사도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당신을 볼 수 없었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가톨릭교회는 냉담 신자를 정할 때 고해성사를 3년 동안 한 번도 보지 않는 것으로 기준을 삼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이 과연 합당할까요?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는 과정이지 신앙의 목적이 아닙니다. 신앙의 목적은 그런 과정을 거쳐 성장한 이들이 맺게 될 신앙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본당에서 형성된 신앙 공동체에 참석하여 친교를 나누지 않는 사람이 진정 냉담 하는 신자입니다. 그 안에서 각자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데 어린이처럼 성사에 참여하는 것만을 냉담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리옷 유다도 성체를 모셨습니다. 물론 토마스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3년 동안 냉담 신자가 아닐까요? 이미 공동체에서 떠남으로써 그들은 바로 냉담 신자가 된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그들을 모이게 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데 공동체를 떠나면 곧 그리스도를 떠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영하더라도 친교를 위한 에너지를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닌 잘못된 지향으로 미사를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신앙의 목적을 안다면 토마스 사도처럼 다시 공동체에 돌아왔을 때 냉담을 푼 것이고 떠나가면 냉담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더 사목적으로 적당하다 여겨집니다.
신앙 공동체의 결속력은 각자가 얼마나 많이 내어놓을 수 있느냐로 결정됩니다. 초대 교회는 가진 재산 모두를 공동체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니아스는 재산의 반만 가져다 바쳤습니다. 아버지가 하느님이 아니란 뜻입니다. 아버지가 하느님인 사람이었다면 하느님 가족 공동체를 위해 다 바쳤어야 옳습니다. 그래서 그는 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좀 심한 내용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이는 신앙 공동체에 머물 수 없다는 큰 메시지를 줍니다.
그러니 공동체는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 공동체에서는 각자의 아버지인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초대 교회에서는 공동체 덕분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증가하였습니다. 선교는 우리 공동체의 사랑을 통해 그 속에서 우리 부모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5)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미국의 한 자선단체가 거리의 노숙자를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30여 명의 노숙자에게 매달 일정 금액의 돈을 지급하며 일상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매달 30만 원 정도의 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일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악화하였습니다. 그 돈으로 담배나 술을 샀고,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 잠든 모습이 자주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돕지 않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금액을 높여 보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 의견에 따라 매달 80만 원 정도의 돈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 많은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웠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대다수 노숙자가 금주와 금연을 결심했고 강력한 의지로 목표한 바를 이뤄서 자신의 삶을 바꿨습니다.
30만 원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나쁜 쪽에 더 끌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80만 원으로는 할 수 있다는 의미를 두게 되었고, 그 결과 나쁜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의미를 둘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의미를 두어야 의지를 세워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 축일을 맞이하는 오늘의 복음은 믿음에 대한 말씀을 주님께서 하십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토마스였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하십니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이가 되어라.’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품어 온 불신 곧 의심을 떨쳐 버리라는 말씀이지요.
이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주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하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의심하고 있을 때를 잘 보면 의미를 두지 못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으므로 의심하고 믿음을 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직접 봐야지만 의미를 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본 사람들의 증언에 의미를 두고 믿음을 두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런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와의 깊은 일치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하는 걸 배웠다. 따라서 용기있는 자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닌 그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이다.
-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
오류의 틀에서 벗어나기.
1970년대 초반에 미국의 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로젠한은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병 환자와 정상인 사람들을 얼마나 잘 구별하는지를 ‘사이언스’에 보고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여덟 명의 사람을 정신병 환자처럼 꾸며낸 서류를 만들어 여러 곳의 정신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신병동에 들어가 정상인과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의사들은 이들을 어떻게 진단했을까요? 의사들은 그들이 정상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로젠한의 실험은 의사들이 환자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차트상의 몇 가지 정보들을 통해 환자를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970년대에만 그렇고 지금은 안 그럴까요? 훨씬 더 정확한 과학적인 판단을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잘못된 판단을 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봐야 하며,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을 기억하면서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상처가 사랑이며 믿음이 행복이다.
저의 하느님!" (요한 20, 28)
우리의 하느님은 십자가의 하느님이시다. 십자가에서 알게되는 하느님이시다. 의심할 수 없는 십자가의 상처이다. 의심을 치유하는 십자가의 상처이다.
십자가의 상처는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의 상처이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의 상처를 끝내 숨기지 않으신다. 십자가의 상처에서 그리스도의 여정을 뜨겁게 만나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백이 생생한 부활의 고백이다. 아파도 십자가에서 성장하는 우리들 믿음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살린다. 우리들 삶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난다. 다름아닌 십자가의 상처가 부활의 참된 표징이다. 십자가의 상처가 모든 사랑의 근원이다.
상처가 사랑이며 믿음이 행복이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시다. 제대로 우리를 울게하신다. 십자가의 상처에서 쏟아지는 사랑이다. 감출 수 없는 숨길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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