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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7월 4일 (일)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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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4주일 -

 

 

21년 7월 4일 (일)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자신을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셨다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힘이 자신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기쁘게 자신의 약점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7월 4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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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에제 2장 2-5절

 

반항의 집안도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때 나는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분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 왔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하고 말하여라.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

 

하늘에 좌정하신 분이시여, 저는 당신을 우러러보나이다. 보소서, 종들이 제 주인의 손을 눈여겨보듯, 당신을 우러러보나이다.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

몸종이 제 안주인의 손을 눈여겨보듯,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희는 죽도록 멸시만 받았나이다. 거만한 자들의 조롱을, 교만한 자들의 멸시를, 저희 영혼이 죽도록 받았나이다.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2코린 12장 7ㄴ-10절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6장 1-6절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의 힘이 머무를 수 있도록 기쁘게 약점을 자랑하고 싶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언제나 겸손하게 살아갑시다. 우리가 자만하지 않으면 주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나고,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다는 사실을 많은 이가 보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성체성사의 큰 은혜를 가득히 받고 비오니 구원의 은총을 풍부히 내리시어 저희가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4일 (일)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7월 4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순간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의 삶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갑니다. 그것은 아마도 대부분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다가도 다른 이들이 가진 것과 비교하기 시작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불행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우리에게 행복의 조건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악을 물리치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며 아픔을 없애 주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이에게 행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이내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자신과 비교하고 자신의 아들과 비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 삶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라는 행복을 체험하지만, 결코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행복하려면 내 곁에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해야 합니다. 받은 것에 감사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가지지 못할 것에 마음을 두는 순간, 하느님의 나라는 지옥으로 바뀌게 됩니다. 타인을 자신의 행복을 재는 도구로 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함께 기뻐해 줄 때 나에게도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로남불 말고 예언을.

 

오늘 주님께서는 그 유명한 말씀인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감히 이 말씀에 제가 토를 단다면 예언자는 고향뿐 아니라 어디서고 존경을 받지 못함은 물론 냉대를 당합니다. 

예언자란 하느님이 파견한 존재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대신 전하는 존재이기에 이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이미 잘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서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실 것이고 그러니 당신 말씀을 전하라고 예언자를 파견하실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어디에서건 예언자는 사람들이 싫어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가능합니다. 여기서 예언을 하면 여기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저기 사람들은 좋아하고 참 예언자라고 칭찬할 것입니다. 

인간은 거의 예외 없이 내로남불입니다. 비교적 엄격하게 자기에게 잣대를 대는 사람일지라도 내로남불이 얼마간 있습니다. 

현 정부와 진보진영이 근자에 내로남불의 공격을 받는 것은 과거 보수 정권이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그만큼 불의와 비리를 많이 저질렀을 때 그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자기들이 정권을 쥐자 똑같은 짓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국민이 이를 심판하자 보수 정권은 과거 자기들이 한 짓은 잊고 지금 살판이 났는데 이렇듯 인간은 내로남불이고 그래서 자기 잘못을 비판할 때는 그 예언을 싫어하고 남의 잘못을 비판하면 그 예언은 잘했다며 추켜세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 내로남불의 존재이고 그래서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예언은 싫어하기 마련이지만 하느님의 예언은 특히 더 싫어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앞서 봤듯이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하느님의 예언을 특히 더 싫어할 것입니다. 

이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 지혜를 얘기하는데 세상 얘기나 하고 있고, 더 나아가 하느님 나라 얘기를 하시는 주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자기들과 같이 살았고 그래서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얘기하니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우리도 자주 그러합니다. 다른 사람의 충고는 받아들이면서 가까운 사람의 충고는 잘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 너무나 잘 알기에 그 충고를 아니꼽게 여기며 너나 잘하라고 하곤 하고, 그러니 그것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를 하느님께서 내게 보낸 사람으로 받아들이지는 더더욱 않지요. 

내 아내나 내 남편이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내로남불의 내가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기도 어렵지만 내로남불의 너를 하느님의 예언자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내가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너를 하느님의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이 말은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도 어렵지만 다른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 너나 나나 똑같은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안에 시기심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너나 나나 똑같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나보다 더 나을 경우, 그것도 신앙적으로나 영성적으로 더 낫고 그래서 영적인 지혜를 내게 얘기할 경우 인간적인 시기심 이상으로 영적인 시기심이 발동하게 되는 것인데 이런 우리에게 프란치스코는 오늘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열린 마음을 가지기 위한 연습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고향인 나자렛에서 환영받지 못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닫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이 닫혀있다면 그 사람과 친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매일 톱을 들고 산으로 가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 할머니는 시집올 때는 예뻤지만 남편에게 심한 폭력을 당하여 마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이 죽자 아이들을 무시당하지 않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산에서 톱질을 해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건강입니다. 환상을 보고 환청을 듣습니다. 눈에서 고름이 나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다 성장했는데도 여전히 산에 올라 보통 사람이 들기도 어려운 커다란 나무를 메고 내려옵니다. 식수와 가스가 단절되어 더러운 물과 오래된 식자재로 식사를 합니다. 

할머니의 건강을 위해 제작팀에서 의료진을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할머니는 톱을 휘두르며 그들을 위협합니다. 할머니는 그들이 자녀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무디게 만드는 방해꾼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동네 사람들까지 음식을 가져다주며 도와주려 하지만 언제나 할머니의 마음이 열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출처: ‘긴급 출동한 의료팀이 톱으로 위협당함’, 유튜브 채널, ‘우와한 비디오’]

마음이 닫혔다는 말은 상대를 이미 내 방식대로 규정했다는 뜻입니다. 할머니는 자기 생각으로 모든 것을 규정합니다.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자신을 납치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이는 모두 이전에 받은 상처 때문에 생긴 두려움에서 기인합니다.

두려우면 자신을 해칠 사람인지 아닌지 저절로 구분하게 되기 때문에 상대를 규정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누군가가 다가가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밥을 주고 쓰다듬어 주려 다가가는데 자신을 해칠까 싶어 무조건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하는 개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마치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다 아는 듯이 말합니다. 그분의 부모와 형제들과 학교 성적까지도 다 아는데 자신들에게 무슨 복음을 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하시며 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제가 일반 대학 1학년 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제가 될 수 있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사적 계시는 무조건 좋지 않다는 편견 섞인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것에 대해 조금은 열린 마음이 있었기에 10권의 책을 다 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열린 마음이란 ‘규정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가 처음에 교회를 박해할 때 그를 적으로 여겼지만, 그는 가장 훌륭한 복음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우주보다도 큰 신비입니다.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규정하는 사람들은 일단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들에게 규정당하고 그렇게 자신이 믿어버리면 자신 안에서 일으키는 주님의 신비로움까지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베들레헴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마음이 닫혀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한 부부가 메시아의 부모가 될 것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판하는데 버릇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브루클린의 거리에서 구걸하던 한 노숙자 테드 윌리엄스. 

그가 구걸하는 표지판에는 자신에게 신이 내린 목소리가 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우연히 한 기자가 테드와 대화를 나누었고 그때 촬영한 그의 목소리가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자 여러 방송국에서 그를 성우로 섭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억대 연봉을 받는 성우가 되었고 노숙자들을 위한 구호단체도 만들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출처: ‘구걸하는 노숙자에게 말을 걸자 튀어나온 천상의 목소리’, 유튜브 채널, ‘타임스낵’]

한 사람은 온 우주보다 큰 ‘신비’입니다. 사람이 신비가 되게 하시는 분은 신비 자체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사람을 하느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우주도, 혹은 우리 육체도 잘 모르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을 안다고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을 규정할 때, 마치 성체를 눈에 보이는 밀떡이라고 믿어버릴 때 그 밀떡을 통해 오시는 그리스도를 막아버리게 됩니다. 

열린 마음을 가지기 위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자신의 처지를 겸손되이 인정하고 누구도 판단하거나 규정하지 않는 연습입니다. 판단을 멈추십시오. 그것이 겸손이고 지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를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너무 오래 살았어.”라고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또 평사원에서 대리로 승진한 후에 스스로 으스대면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또 수중에 몇 푼의 돈을 지니고서는 대단한 부자인 척한다면요? 
 
많은 이들의 비웃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를 향한 자랑은 모두 비웃음거리가 아닐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를 드러내는 데 너무나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기 PR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교만에서 나오는 것은 결코 지혜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진정한 인정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나를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결국 주님을 믿고 있다는 것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모두 빼앗아 가신다면 어떨까요? 아무것도 아닌 ‘나’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은 주님 없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굳게 믿는 사람은 결코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대신 겸손의 삶을 살면서 주님과 함께하게 됩니다. 그리고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십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영 시원찮습니다. 예수님을 이미 잘 안다고 여기면서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나자렛 사람들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점을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믿음의 힘은 병을 고치는 것 이상의 일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당연히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챌 수도 없고, 또 이런 이유로 기적을 굳이 일으키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안다고 여기면서, 예수님을 대단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이는 곧 자신을 드러내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단하다는 사람보다 자신이 더 훌륭했다는 것을 보여서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지요. 결코 지혜로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이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며, 하느님의 품 안에서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먼저 남에게 뽐내는 마음을 없애야 다른 마음이 쉬 없어진다.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과거에 머물지 마세요.

 

운전할 때 제일 중요한 방향은 어디일까요? 당연히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뒤를 바라보는 백미러와 좌우를 볼 수 있는 사이드미러는 왜 있을까요? 뒤로 가기 위함이 아니고, 좌우로 가기 위함도 아닙니다. 앞으로 잘 가기 위해 다른 방향을 보는 거울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도 그렇지 않을까요? 차 안의 백미러가 앞으로 잘 가기 위해 있는 것처럼, 과거는 지금을 잘 살고 또 미래로 잘 가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 자체 머무는 사람이 많습니다. 과거에 연연하고 후회하면서 과거에 매여 있습니다. 앞으로 갈 수가 없게 됩니다. 
 
과거는 내 인생이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임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복음의 꽃은 소통의 꽃이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르 6,3)

빗소릴 듣는다. 제대로 들을 수 없기에 제대로 나눌 수도 없다. 인간관계의 번지수를 늘 잘못찾는 우리들 삶이다. 신앙이 시작된 곳에서 신앙을 다시 묻는다. 인간적인 것을 뛰어넘는 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참된 신앙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응원과 지지에 연연해하거나 집착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길을 아시고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늘 상대가 원하는 것을 놓치고 사는 어리석은 우리들 관계이다. 갇혀있음과 열려있음 사이에 따뜻한 복음이 있다. 

저마다의 고향이 우리의 시작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의 시작점이시다. 예수님마저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서 냉대를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을 아신다. 아프게도 우리 마음 안에는 하느님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아신다. 비판과 폄하를 몸소 감수하신다. 

믿음의 길은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존경의 길이다. 소중과 존중이 빠지면 역할만 남을 뿐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인격체의 고유함과 존귀함을 되찾아주신다. 고유한 인격은 정보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다. 삶의 무게에 힘겨워하고 아파하는 우리 형제들이다. 

신앙은 거창하지 않다. 따듯한 기도가 따듯한 침묵을 배우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고향을 찾으신 예수님과 마음을 나누는 따듯한 마음의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함께와 홀로 사이에 마음을 울리는 복음이 있다. 사랑받고 싶고 배려받고 싶은 마음은 모두가 같다. 인간관계의 올바른 번지수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듣고 기쁘게 실천하는 것이다. 

복음의 꽃은 소통의 꽃이다. 하느님께서 답답한 우리를 위해 몸소 여기 이곳으로 오셨다. 이 시대의 기적과 치유는 소통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복음은 소통의 복음이다. 자만에서 벗어나는 소통의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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