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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7월 1일 (목)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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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

 

 

21년 7월 1일 (목)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를 실행하려 하자 그를 말리시며 그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치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7월 1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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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창세 22장 1-19절

 

우리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그 무렵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사흘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멀리 있는 그곳을 볼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나와 이 아이는 저리로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부르자, 그가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11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14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브에르 세바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브에르 세바에서 살았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나는 주님을 사랑하네. 애원하는 내 소리 들어 주셨네. 당신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니. 나는 한평생 그분을 부르리라.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에우고, 저승의 공포가 나를 덮쳐, 고난과 근심에 사로잡혔네. 나는 주님의 이름 불렀네. “주님, 부디 이 목숨 살려 주소서.”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주님은 너그럽고 의로우신 분, 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네. 주님은 작은 이들을 지키시는 분, 가엾은 나를 구해 주셨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당신은 죽음에서 제 목숨을 구하셨나이다. 제 눈에서 눈물을 거두시고, 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하셨나이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9장 1-8절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봉헌하고 받아 모신 성체로 저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저희가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길이 남을 열매를 맺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1일 (목) 매일미사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7월 1일 (목) 매일미사 15시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와 함께 내가 걸어 주겠다. 함께 일어나 가자."

 

작년 한 해는 코로나19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사도, 성사도, 다른 이와의 만남도 모두 조심스럽고 위험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졌습니다. 방역 단계가 낮아져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이제는 해야만 하는 일마저도 귀찮아져 버렸습니다. 

살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많습니다. 게으름과 귀찮음, 나약함 때문이거나, 실패할까 두려워하는 경계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 보았자 결과는 같다고 생각하며 먼저 포기하고 절망해 버리는 패배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때때로 우리는 여러 핑계로 움직이지도 나아가지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중풍 병자는 온몸이 마비되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평상에 누워 있을 뿐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열정도 없이 그저 누워 있습니다. 그런 그를 위하여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합니다. 평상을 들고 예수님께 다가갔고 병자를 대신하여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희망과 열정을 보여 주십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려움과 패배감은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한, 자신이 더 피곤해지지 않기 위한 욕심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을까 염려하여 병자들을 멀리하였던 바리사이의 죄와 같을 것입니다. 

나태함, 두려움, 절망과 포기 속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일어나 걸어가는 것’, 그것이 죄에서 해방되는 또 하나의 발걸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와 함께 내가 걸어 주겠다. 함께 일어나 가자.”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잔인함일까요? 사랑일까요?

 

오늘 창세기 얘기는 하느님의 잔인한 테스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것, 그것도 물건이 아닌 사람이요 사람 중에서도 늘그막에 얻은 외아들을 포기하라는 테스트입니다. 

그런데 이런 테스트를 지금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잔인함일까요, 그렇게 이해하기 쉽진 않지만, 오히려 사랑일까요? 

테스트는 보통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의 상태나 정도를 알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단련이나 성장 또는 성숙을 위함입니다. 

저도 양성 책임을 맡고 있을 때 이런 의미에서 테스트를 하곤 했는데 예를 들어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가보겠다고 할 때 보내주기로 이미 마음먹고 있으면서도 갈 수 없다고 하고는 청원자가 포기한 것을 안 뒤에 허락을 하곤 하였지요. 

이때 청원자는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행사에 보내지 않는지 그 비인간적인 처사에 일차적으로 화가 나 부글부글 끓고 나중에 허락을 받고는 청원장이 자기를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에 더 큰 분노를 하곤 하였지요. 

그러나 저는 교육적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를 위한 것이고 사랑으로 그리한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족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기라는 가르침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자기 의지를 꺾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거였지요. 

오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테스트하신 것도 이와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복음적 권고인 순종과 가난과 정결의 실천과 이 모든 실천의 기초인 믿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믿는다면 어떤 것을 명해도 순종해야겠지요.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것이 지금 보기에는 매우 잔인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나를 위한 사랑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다면 아무리 소중해도 그것을 포기해야겠지요. 하느님께서 선이시고 또 모든 선의 주인이시며 그 선을 주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소유한 것을 포기하는 것도 가난이지만 더 좋은 것을 더 좋은 때에 주시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주시도록 아예 소유하려는 마음 곧 욕심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가난입니다. 이것이 오늘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얘기하는 야훼 이레의 가난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이 믿는다면 만유 위에 하느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소중한 것도 하느님만큼 소중하지 않고, 아무리 부모와 자식을 사랑해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으며 하느님 사랑과 자식 사랑 중에 택일을 해야 한다면 하느님 사랑을 선택하고 오늘 아브라함처럼 자식 사랑을 포기하고 희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오늘 자기 외아들 이사악을 봉헌한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 그리스도를 우리에에 희생 제물로 봉헌하신 것의 예표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이런 하느님을 믿고 이렇게 하느님을 믿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포기하는 것이 더 쉬운데 아무튼,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테스트를 받고 있고, 하느님을 선택할 때까지 이 테스트는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잔임함일까요? 사랑일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을 모독하는 법 : ‘다’ 주실 수 없다고 말할 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보시며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얘야!”는 영어로 하면 ‘Son’, 곧 “아들아!”라고 부르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느님이시면서 아버지로서 자녀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않는 오류가 숨어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실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하느님께서 무언가 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실 수 있고 그 사람이 되시어 행하시는 모든 권한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해 그를 치유하시며 용서해 주십니다.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 말은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의 권한을 예수님만이 아니라 교회도 행사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고 사실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하면 거의 신성 모독죄를 지은 것처럼 나무라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신성까지 ‘다’ 주시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악보도 볼 줄 모르는 9살 아이가 피아노 음악이 나오는 영화를 한 번 보고 그대로 따라친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바로 ‘영재발굴단’에 나왔던 배용준이란 아이입니다. 힘든 가정형편에도 엄마가 팔지 않고 둔 낡은 피아노는 용준이가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그에게 정식적인 피아노 교육을 할 재력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살짝 ‘입양’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의 능력을 펼쳐줄 능력이 되지 않는 것에 너무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음악 시디도 남이 버린 것을 주워와서 듣고 그대로 따라치는 연습을 합니다. 장난감도 옷도 새것을 사 준 적이 없고 다 주워다 씻고 빨아서 아이를 키우는 형편입니다. 

아이는 천재인데 엄마는 아이를 뒷받침해 줄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안타깝게 여겨 입양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에게는 아이에게 생명도 주고 싶지만 자기 생명이 아니라면 아들을 다른 부모가 키우게 하고 싶은 마음마저 있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엄마의 마음입니다. 

물론 아이는 펄쩍 뛰면서 그러면 자기 죽어버릴 것이라 합니다. 아이는 엄마가 자기 목숨과 같습니다. 아이는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피아노를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용준이는 피아노를 치기 싫어합니다. 피아노 때문에 학교에도 못 가고 친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엄마를 위해 칩니다. 엄마의 사랑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1년 뒤 엄마는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픈 엄마를 위해 죽도록 하기 싫은 피아노를 칩니다. 엄마는 아프다가도 용준이 음악 소리만 들으면 통증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용준이는 피아노를 멈출 수 없습니다. 엄마는 자신이 없으면 용준이를 누가 돌봐주느냐며 걱정입니다. 자신이 죽는 것보다 용준이 미래만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용준이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이제 밥도 차리고 빨래도 하며 가정 살림을 돕습니다. 엄마는 죽어가면서 말합니다. 

“태어나, 저의 유일한 존재 이유가 용준이었습니다.”

용준이는 말합니다. 

“엄마는 ‘심장’이에요. 심장이 없으면 죽으니깐.”

용준이는 콩쿠르에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으로 대상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를 남기고 떠납니다.

용준이는 울지 않습니다. 그리고 4년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습니다. 그러다 엄마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기에 다시 피아노를 칩니다. 예원학교 2학년으로 꿈을 키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준 데는 용준이를 자신의 집에서 키우며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김지선 선생님도 큰 몫을 하였습니다. 결국, 엄마의 바람대로 엄마는 떠나고 더 능력 있는 분이 용준이를 맡아 키워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가 목숨으로 아이를 그렇게 봉헌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다른 집으로 가면 어떻겠냐고 말했을 때 아이가 얼마나 상처가 컸을까요? 그러나 엄마가 자기를 미워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닌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다만 용준이는 엄마가 줄 수 있는 것보다 엄마 자신을 원했던 것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다 줄 수 있고 자신이 주지 못하는 것까지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자신이 능력이 안 되어 아이를 입양시키려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내 생명까지도 다 내어주고 그것도 모자라면 다른 것도 찾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께 “그분은 이러저러한 것은 주실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닐까요?

개신교는 교회에 하느님께서 주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포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실 리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물론 살과 피를 주시는 성체성사도 포기했습니다. 인간에게 그 정도까지 주실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도 사랑하면 자신의 능력 이상을 주고 싶어 하는데, 사랑 자체이신 분이 어떻게 어떤 것은 주실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바로 그분의 심장입니다. 심장을 내어주실 수 있는 분이라면 신성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신성을 받아 우리가 본성상 하느님이 된다는 것이 무슨 신성모독이 되겠습니까?

예전에 성탄 자정미사가 끝나고 복사 아이들에게 집에 들어가며 떡볶이 사서 먹으라고 만 원짜리 몇 개를 주었습니다. 다음 날 그들은 그 돈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아마도 부모님이 사 주고 저에게 다시 가져다주라고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준 돈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을까요? 저는 그 정도도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오히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어떤 것을 주실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든 것을 다 주시고도 모자라 아마 더 주실 수 있는 것이 있으셨다면 그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것도 포기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되고 또 하느님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느님을 모독하지 않고 찬미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버지처럼 완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모처럼 할 수 있다고 믿는 자녀가 효도하는 자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정말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일까요?

 

‘악법도 법이다.’ 누가 한 말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일명 ‘테스 형’이라 불리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일까요?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일본의 법학과 교수였던 오다카 도모오가 했던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쓴 ‘법철학’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실정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악법도 법이므로 이를 지켜야 한다.’ 
 
이 글을 썼던 1937년은 일본 군국주의 시절이었습니다. 즉, 그는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논리로 이 글을 쓴 것입니다. 이것이 상식에 관한 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독재의 도구로 쓰였음은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잘못된 앎이 일제 강점기의 시대로 다시 살게 합니다. 법은 국가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앎으로 인해 과거 군국주의 시절로 우리를 계속해서 이끌고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앎도 제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들은 이 앎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율법의 조항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율법의 정신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려는 예수님을 향해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걷게 하심으로써 당신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율법 학자들의 비난이 근거 없음을 그리고 이제 그들이 당신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생각해서 보아야 함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중풍 병자를 걷게 하신 것은 중풍 병자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먼저 말씀을 건네신 이유를 복음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되어 있지요. 병자를 데려온 이들이 예수님께 올 수 있었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은총의 대상자 때문이 아닌, 그 옆에서 기도해주는 사람을 통해서도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늘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얘야, 용기를 내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얘야”라는 표현은 “내 아들아~”라는 사랑이 가득한 따뜻한 표현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당신의 사랑으로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의 믿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이심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변하지 않으면 당신은 사라지게 된다.

- 스펜서 존슨 (Patrick Spencer Johnson)

 

 

주님의 가치.

 

콜라하면 떠오르는 두 회사가 있습니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입니다. 이 두 회사의 경쟁은 자그마치 120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장 점유율을 어떻게 될까요? 우리나라 탄산음료 시장을 보면, 코카콜라가 45.1%, 펩시콜라가 11.3%입니다. 이는 전세계 안에서도 늘 코카콜라의 압승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맛 때문에? 
 
브랜드를 노출하지 않고 콜라를 마시게 한 후, 맛이 더 좋은 쪽을 선택하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습니다. 그 결과 펩시콜라가 더 맛있다는 사람들의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코카콜라가 더 많이 팔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좋다는 것을 알지만, 자기 가치의 기준이 그 좋은 것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돈. 무엇이 더 좋은 것일까요? 당연히 주님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돈을 선택합니다. 주님에 대해 막연히 좋다고만 생각할 뿐, 진정한 가치를 따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돈에 끌려가는 삶이 아닌, 주님과 함께 하는 참 좋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마태 9, 2) 

먼저 우리자신이 우리자신에게 따뜻한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복음이다. 주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용기를 이 아침 청한다. 마음은 말씀을 향한다. 용기란 도망갈 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도록 참된 믿음을 청하는 일이다. 처음으로 주님께 아픔과 슬픔을 맡겨드리는 이 아침이다.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다. 용서도 치유도 내 것이 아닌 모두 주님의 것이다. 부족함과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용기이다. 용기 뒤엔 용서가 있다. 믿음 뒤엔 치유가 있다. 치유 뒤엔 구원이 있다. 

용서는 주님과 함께 나누는 구원의 은총이다. 순간순간의 나눔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주님께로 가는 길은 이렇듯 용기와 용서로 이어져있다. 용기 없는 영혼 용서 없는 영혼은 복음의 삶이 아니다. 용기와 용서가 평상을 들고 가듯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한다. 

믿음은 우리의 일상에서 피어나는 가장 기쁜 꽃이다.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이다. 오늘을 감싸주시고 사랑하여 주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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