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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6월 29일 (화) 매일미사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by 평화다방 2021.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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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

 

 

21년 6월 29일 (화)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Solemnity of Saints Peter and Paul, Apostles)

 

사도 베드로는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수에 인접한 벳사이다 출신으로 본이름은 시몬입니다.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어부 생활을 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베드로(반석)로 바꾸시고, 그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삼으셨습니다. 복음서에 소개되는 사도 베드로의 모습은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여 칭찬받기도 하고, 예수님의 수난을 반대하다가 심한 꾸중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첫 번째 교황이기도 한 로마 교회의 첫 주교인 사도 바오로는 67년 무렵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열두 제자와는 달리 비교적 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교를 열성적으로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뒤 유다교에서 개종하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방인들이 사는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들에게 보낸 많은 서간이 오늘날 『성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는 67년 무렵 로마에서 참수되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헤로데 임금은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지만, 천사가 나타나 그를 빼내 줍니다.

 

 

✠ 오늘 제2독서

 

사도 바오로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티모테오에게 고백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시자, 베드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6월 29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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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이 사도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의 피로 교회를 세웠으며,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되었네.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사도 12장 1-11절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헤로데의 손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그 무렵 


헤로데 임금이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을 해치려고 손을 뻗쳤다. 


그는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쳐 죽이게 하고서, 


유다인들이 그 일로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들이게 하였다. 때는 무교절 기간이었다. 


그는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네 명씩 짠 네 개의 경비조에 맡겨 지키게 하였다. 파스카 축제가 끝나면 그를 백성 앞으로 끌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에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천사가 베드로에게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어라.” 하고 이르니 베드로가 그렇게 하였다. 천사가 또 베드로에게 “겉옷을 입고 나를 따라라.”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따라 나가면서도, 천사가 일으키는 그 일이 실제인 줄 모르고 환시를 보는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10 
그들이 첫째 초소와 둘째 초소를 지나 성안으로 통하는 쇠문 앞에 다다르자, 문이 앞에서 저절로 열렸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어떤 거리를 따라 내려갔는데, 천사가 갑자기 그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11 
그제야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로데의 손에서, 유다 백성이 바라던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주님은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주님은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주님은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주님은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2티모 4장 6-8절, 17-18절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17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18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6장 13-19절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르셨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물음에 여러분은 시몬 베드로처럼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세상을 떠날 때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이 성찬의 성사로 교회에 활력을 주시어 저희가 언제나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빵을 나누며 주님 사랑 안에 굳게 머물러 한마음 한뜻으로 살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6월 29일 (화)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6월 29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교회 공동체는 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는 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닌, 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향하여 나아가는 지상 여정의 순례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베드로 사도는 명문가의 자제도 이른바 잘나가는 사람도 아닌 그저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며 두려움 속에서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 길을 멀리서 바라보았고, 주님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숨어서 지냈습니다. 그런 그가 교회의 반석이 되어 하늘 나라의 열쇠를 관리합니다. 

그럼 바오로 사도는 어떠하였나요? 그는 베드로 사도와는 달리 명문가 출신으로 율법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선동가며 하느님에 관한 가르침을 어지럽히는 불순분자였을 뿐입니다. 

그런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을 박해하는 사람에서 주님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렇게 베드로와 바오로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속에서 교회는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두 사도를 이끌어 주지 않으셨다면, 그 둘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갔을 것이고 우리는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완성된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변화되었듯이, 우리 자신도 우리가 만나는 공동체의 구성원도 하느님의 이끄심 안에서 변화될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들의 뜻과 계획이 아닌 주님의 뜻에 따라 완전하고 완성된 공동체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으로 묶인

 

오늘 우리 교회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를 같이 묶어 축일로 지냅니다. 그런데 열두 사도 중에 하나를 베드로 사도와 같이 축일로 지내지 않고 바오로 사도를 짝으로 우리 교회가 축일로 지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를 들어 주님께서는 중요한 순간마다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만을 동반하셨는데 왜 베드로를 야고보와 요한과 묶어 축일을 지내지 않고 바오로와 묶어 축일로 지낼까요? 

그것은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라고 하는 오늘 감사송처럼 두 분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묶어 하나의 교회를 세운 분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두 분은 어제 성무일도 찬미가에서 "거룩한 쌍둥이"라고 할 정도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교회의 중심이요 두 기둥이었지요. 

그러나 우리 초기 교회 안에서 두 교회 사이에 그리고 두 교회를 대표하는 두 사도 사이에 갈등과 긴장이 있었고, 인간적으로만 보면 두 분 사이가 사뭇 껄끄러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테살로니카 2장을 보면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베드로를 비판하고, 이런 직설적인 바오로로 인해 바르나바는 바오로와 갈라서고 마는데 베드로는 그래도 그러지는 않은 것으로 그러니까 베드로가 바오로를 품은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와 바오로이기에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운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 교회의 반석인 이유는 그가 무오류의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류에 대한 비판과 지적을 받았을 때 그것을 넓은 품으로 잘 받아들여 오류를 고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그대로 뒤집으면 바오로와 같이 오류를 비판하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교회가 오류에 빠지지 않았던 겁니다. 

교회 안에 오류가 있는데 그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으면, 그리고 볼 줄 아는 사람이 있어도 그걸 말하지 않으면 교회는 오류에 빠질 것이고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 자체가 사랑이고, 비판과 지적을 사랑으로 해야 오류가 시정이 됩니다.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싫어하는 것을 무릅쓰고 비판과 지적을 하지 않을 것이고, 미움과 분노로 비판하고 지적하면 그것은 받아들여 지지 않고 거부되겠지요. 

사실 사랑없는 비판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일 뿐이고, 비난은 인신공격일 뿐이기에 오류를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성원 서로 적이 되고 원수가 되게 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비판을 하지도 비판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 교회가 잘 되기를 바라지도 않기에 서로 경쟁이나 하고, 비난이나 하고, 흉이나 보고, 파당이나 짓고 교회가 잘 되기 위한 건전한 비판이나 사랑의 지적을 하지 않지요. 

사랑이 자기 연민에 그치는 사람은 작은 비판도 큰 상처가 됩니다. 사랑이 자기 사랑에 그치는 사람은 비판을 공격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자기 사랑을 넘으면 비판 때문에 사랑을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하느님 사랑에 이르면 하느님 교회를 위해 밑돌들이 됨을 베드로와 바오로의 사랑을 통해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당을 지어야 할지 학교를 지어야 할지 고민하는 교회가 되어야!

 

오늘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이 위대한 두 성인을 같은 날 기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 베드로는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성 바오로는 선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성 베드로는 교회로 모여야 하는 의미를 말해주고 성 바오로는 교회 밖으로 나가 선교해야 하는 의무를 말해줍니다. 

마치 교회가 심장이라면 성 베드로는 심장 안으로 피가 모여야 함을 말해주고 성 바오로는 그 피가 다시 혈관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야만 함을 말해줍니다. 둘 중의 하나만 빠져도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둘이 하나이고 따라서 오늘 두 성인을 동시에 기념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 안에 성 베드로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 안에서만 봉사하고 밖으로는 나가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은 교회 안에서 봉사도 열심히 하였고 미사나 고해성사를 꾸준히 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신앙이 이상해졌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매일 성경책을 펴서 거기에서 나오는 말씀을 주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시는 말씀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식 이야기가 나오면 밥을 먹지 않고 번제 이야기가 나오면 분명 누군가는 불에 타야 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철저하게 믿었지만 실상은 거의 정신착란까지 간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성경을 점을 치는 행위와 같습니다. 성당이 아니라 점집에 다녔던 것입니다. 본인은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다고 믿었지만, 가정이 파탄 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내면에 베드로는 살지만, 바오로는 살지 않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께 가서 내어놓을 게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구원해 오라고 우리를 파견하셨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충실히 따르려고 하면서도 결국 선교를 제일 큰 목적으로 삼지 않으면 내가 머무는 교회는 점집이 됩니다. 돈 받고 그들 귀에 좋은 이야기만 해 주는 점집 같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 내 안에 바오로만 있다면 어찌 될까요? 나주 율리아처럼 교회와 단절된 상태에서 헛된 것을 전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마치 자신이 예언자나 된 것처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받고 예언을 해 줍니다. 사람을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을 성체의 힘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혈관이 피를 통과시키지 않고 자기 안에만 머무르게 한다면 거기는 썩어버리게 됩니다. 깨끗한 산소가 공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피가 함께 모일 심장과 같은 구심점이 없다면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고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선교해도 그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만 있는 교회는 안에서 썩고 바오로만 있는 교회는 밖에서 썩습니다. 베드로가 약화하고 바오로만 강조된다면 아이는 낳고 키우지 못하는 무책임한 부모처럼 됩니다. 

영화 ‘가버나움’은 자인이라는 아이가 부모를 고소하는 내용입니다. 가난하면서도 아이는 많이 낳아서 집세를 내기 위해 11살 딸을 시집보내버리고 자인은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선교만 하면 무엇하겠습니까? 베드로를 통해 오는 은총이 메마르게 된다면 교회도 고소를 당하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세례를 받고 5년 이내에 70%가 냉담 하는 상황이 이런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베드로와 바오로가 함께 머무는 균형 잡힌 교회와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주대학교 이국종 교수가 힘들어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돈이 중앙으로 집중되어야 한다는 기득권 의사들과 비교하면 그는 그런 것들이 외부로 나가는 데 더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에 있습니다.

지금 개신교가 겪는 어려움을 남의 일처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개신교가 왜 안 좋은 이미지가 되었을까요? 베드로와 바오로가 균형 잡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속으로는 돈이 집중되어 대형교회들이 세워지지만, 겉으로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소리치는 바오로의 모습만 비치기 때문입니다. 뉴스에는 계속 목사들이 수백억 원씩 착복했다는 내용이 나오고 신도들은 절에 가서 행패를 부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 교회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균형 잡히지 않는다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게 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베드로 당시는 베드로 대성당이 없었습니다. 지을 생각도 할 수 없는 때이기도 했지만 사람이 교회였고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바오로 사도가 찾아왔습니다. 돈이 흐르는 곳에 복음도 흐릅니다. 심장만 커지고 혈관이 축소되면 몸이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심장입니다. 바오로는 혈관입니다. 돈은 혈액입니다. 적당한 심장과 알맞은 혈관의 균형이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혈관으로 교회에 들어왔던 재물은 사회로 환원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건강하게 살아남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오늘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함께 기념하게 만든 의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앙인이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 안에 베드로와 바오로가 균형 잡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만약 예수님이라면 먼저 성당을 지셨을까, 학교를 지셨을까? 아마 학교를 지으셨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선교를 먼저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분명 이 말씀 안에는 결국 성당을 지어 자신에게 주어진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균형 잡힌 신앙이 결국 많은 이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에 비해 지금의 우리 모습은 당연히 ‘성당 먼저’가 된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성당을 짓고 났더니 돈이 부족하여 빚을 다 갚고 나면 이제 보수공사나 증축을 해야 하고 그렇게 밖으로 돌 수 있는 돈이 부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심장 안에 피가 쌓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교회는 끊임없이 가난해지려 해야 합니다. 

대신 그 피는 선교의 방향으로 흘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교의 열매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교회 건물이 조금은 더 작고 초라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때에 남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누가 더 멋있고 아름다워 보일까요?

 

나이가 들었어도 멋있고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두 부류로 나눠진다고 합니다. 
 

첫째, 포용할 줄 아는 여유가 생기는 사람.

둘째, 내가 옳고 내가 답이라는 노욕(老慾)이 생기는 사람. 
 

이 두 부류 중에서 누가 더 멋있고 아름다워 보일까요? 
 
만약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을 자주 한다면, 또 “너는 틀렸어.”라는 말을 자주 한다면 이 사람은 절대로 멋있지도 또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오히려 인상을 쓰면서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를 ‘꼰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들어주고 상대를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이유는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적게 듣고 많이 말하게 될 때는 ‘꼰대’가 되고 맙니다. 
 
멋있고 아름다운 삶이 어떤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내려놓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렇게 멋있고 아름다운 삶을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겸손의 삶이고 사랑의 삶입니다. 
 
오늘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볼품없는 어부 출신으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믿음도 부족했습니다. 바오로 역시 좋은 신분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습 그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겸손한 모습을 늘 간직했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복음에도 나오지만,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커다란 명예를 받았지만, 늘 겸손했고 대접받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유능함을 가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편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갑니다. 
 
이들 모두가 철저히 겸손의 삶과 사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그렇게 많았어도, 우리는 이들을 멋있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지향하고 있나요? 겸손과 사랑의 삶이 진정으로 멋있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

- 영화 ‘러브 액추얼리’ 중에서

 

 

인생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요즘 대학생들에게 ‘인생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이런 답을 듣는다고 합니다. 
 
1) 건물주가 되고 싶다.

2) 대기업, 공기업에 취업하고 싶다.

3) 여행 다니면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싶다. 
 
가장 많은 대답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정말로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헌신하고 싶은 목적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이 자체로 만족한다고 말한다면 아마 1, 2번의 삶은 사회의 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고, 3번은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삶에 불과할 것입니다. 
 
진정한 삶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건물주가 되고, 대기업, 공기업에 다니면서도 또 여행하면서도 어떤 삶을 만들어갈지 설명할 수 있는 자기 삶의 기준이 확실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시고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사랑의 삶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가장 의미있고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삶에서 무엇을 선택 할 것인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 16, 15) 

믿음이 깊으면 사랑도 깊다. 믿음의 여정안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뜨거운 울림의 삶이 있다. 목마름은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만남은 너와 나의 살아 있는 길이다. 

만남은 반드시 회개와 눈물의 십자가를 함께 건너간다. 삶은 믿음과 가깝다. 믿음은 삶을 바꾸어놓는다. 헤매지만 십자가로 다시 돌아오는 믿음의 삶이다. 두 분 사도는 전혀 서로 다르지만 서로 협력하는 믿음의 삶이다. 우리의 삶이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가는 믿음의 삶이다. 

믿음에는 마음이 있다. 마음이 있으면 못 갈 곳이 없다. 마음이 있는 곳에 새로운 변화가 있다. 두 분 사도의 마음을 만난다. 마음의 길이 삶의 길이다. 믿음의 길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노력과 은총의 여정이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두 분 사도의 삶을 통해 보게된다. 

삶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마음은 십자가를 받아들인다. 삶에서 무엇을 선택 할 것인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이시다. 삶의 최전선에서 만나게 되는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사도의 행복이다. 믿음이 행복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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