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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6월 27일 (일)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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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3주일 -

 

 

21년 6월 27일 (일)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으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그들이 누리는 풍요로 가난한 이들의 궁핍을 채워 주라고 권고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 옷에 손을 댄 하혈하는 여자의 병을 고쳐 주시고, 회당장 야이로가 간곡히 청하자 그의 죽은 딸을 살려 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6월 27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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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지혜 1장 13-15절, 2장 23-24절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

 

13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14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15 
정의는 죽지 않는다. 

2,23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24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주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당신은 저를 구하시어, 원수들이 저를 보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주님, 당신이 제 목숨 저승에서 건지시고,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리셨나이다.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그분의 호의는 한평생이니, 울음으로 한밤을 지새워도, 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리라.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당신은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니, 주 하느님, 영원히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2코린 8장 7절, 9절, 13-15절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가난한 형제들의
궁핍을 채워 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13 
그렇다고 다른 이들은 편안하게 하면서 여러분은 괴롭히자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게 하자는 것입니다. 

14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15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5장 21-43절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어린 딸을 살리려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가 그 모습과 그분의 사랑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봉헌하고 받아 모신 성체로 저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저희가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길이 남을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6월 27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6월 27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닮은 듯하면서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

 

열두 해 동안 하혈하는 여자, 열두 살 어린 소녀. 열둘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입니다. 한 명은 난치병을 앓았고 다른 한 명은 죽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를 마주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에게는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체험하였다는 교집합이 생깁니다. 

물론 한 명은 예수님을 능동적으로 찾아가서 예수님께 손을 댔고, 다른 한 명은 수동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손이 잡혔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닮은 듯하면서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이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우리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갈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손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도 하고 예수님께 붙잡히기도 합니다. 숱한 고생을 하고 많은 의사에게 가진 것을 다 쏟아부으며 열두 해를 보낸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만 듣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아픈 딸을 고쳐 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그분을 집으로 모시고자 하였지만, 집으로 가는 동안에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예수님을 더 수고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던 회당장은 어떻게 예수님을 쉽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마주한 상황은 비록 다른 모습이었지만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처지라는 같은 상황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만났습니다.

그러한 이들과 예수님의 만남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해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믿음은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가 아닙니다. 적당한 인간적 사고 안에서 만들어진 타당성의 결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때로는 무모하게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이기도 하고, 그분께 손을 내밀기도 하면서 그분께서 건네시는 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는 어떤 자입니까?

 

연중 제13주일의 주제는 '삶과 죽음, 그리고 하느님'일 것 같습니다. 

오늘 독서 지혜서는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고 얘기하고 있고, 오늘 복음은 죽었던 소녀를 주님께서 다시 살리시는 얘기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지혜서 말씀은 주님의 말씀과 겹치면서 그렇다면 어쩌란 말이냐 하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하느님께서 죽음을 만들지 않았다고 지혜서는 말하는데, 그렇지만 죽음은 우리가 엄연히 경험하는 것이고 또 하느님께서 죽음을 만들지 않았는데도 죽는다면 그는 악마의 자식이라는 투로 말하고 있는데 복음의 주님께서는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물론 웬만큼 신앙생활을 한 사람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즉시 여기서 말하는 삶과 죽음이 이 세상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거라는 것쯤은 알지만, 이것은 우리가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 하는 얘기이고 당장 우리 느낌에 와닿고 피부에 와닿는 것은 죽음이고 죽음의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여기서 신앙의 정도랄까 깊이가 갈리는 것입니다. 죽음과 죽음의 두려움이 피부적으로 와닿으면 신앙이 없거나 약한 것이고, 하느님이 떠오르면 그것이 진정 신앙이 골수까지 들어와 찼다는 표시지요. 

신앙이 없는 이에게는 삶과 죽음만 있지만, 신앙인에게는 하느님만이 계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은 엄마는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신앙인에게 하느님이 안 계시면 삶도 삶이 아니라 죽음이고, 하느님이 계시면 죽음도 죽음이 아닙니다. 

세월호의 죽은 아이들이 죽어가며 찍은 영상이 아직도 제 뇌리에 선한데 그들은 죽어가면서 육체는 배 안에 있었지만, 마음과 사랑은 엄마에게 있었으며,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있는 죽음을 껴안은 것이 아니라 멀리 있는 엄마를 껴안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 눈에는 소녀가 죽었지만 죽음이 없는 주님께서는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인데 그래서 잠자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그러니 이제 다시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성찰해봅시다. 

우리는 죽음에 속한 자입니까? 하느님께 속한 자입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맛보는 자입니까? 죽음의 두려움을 맛보는 자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작은 기적이라도 청해야 하는 이유 : 더 큰 기적을 믿기 위해

 

오늘 복음은 두 치유의 기적을 소개합니다. 처음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아프다고 하여 치유하러 가시다가 하혈병 여인이 치유됩니다. 하혈병 여인이 치유된 이유는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면 나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믿음만 있다면 무엇이든 주시려는 하느님 자비를 나타낼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치유의 힘’이 나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이때 딸이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병을 고칠 힘을 지니신 저분께서 죽은 사람은 살리실 수 없으실까?’

다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는 힘이 곧 죄를 용서하는 힘과 같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중풍 병자에게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병을 고치는 힘이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힘은 같은 원천에서 나옴을 말해줍니다. 이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믿음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이의 병을 치유해주고 죄를 사해주며 심지어 생명까지 다시 넣어주시는 힘이십니다. 

이렇듯 작은 것을 보고 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바로 ‘묵상’에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회당장 야이로는 하혈병 여인의 치유를 보며 자신의 딸도 살아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회당장 야이로는 분명 하혈병 여인의 치유를 통해 죽은 자신의 딸도 살아날 수 있음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병을 고치시는 분이 영원한 생명도 주십니다. 어떤 것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만들 수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원숭이는 자동차를 고칠 수 없습니다.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칠 수 있다는 말은 설계도와 에너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설계도와 에너지가 있으면 새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장 난 것은 작게 죽은 것이고 망가진 것은 크게 죽은 것입니다. 작게 죽은 것을 살릴 수 있는 분이 크게 죽은 것도 살립니다. 우리 주위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생명의 원천도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을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할 믿음입니다.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기적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장소는 ‘루르드 성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루르드에서 치유의 기적이 보고된 것은 7000여 건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이적들이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수많은 의사의 오랜 조사가 필요합니다. 이때 ‘루르드 의료국’이 소집되는데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분야의 의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적의 조사는 10여 년이 소요됩니다. 그렇게 루르드 의사국에 의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 인정되고, 또 그것이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초자연적 현상이라 믿어지는 기적은 현재까지 70건입니다. 기적의 단 1%만 이 과정을 통과한 것입니다. 

마지막 70번째 공식적 기적은 2018년에 공인된, 하반신 마비가 치유된 한 수녀의 사례입니다. ‘베르나데트 모리오’ 수녀는 허리 신경근이 압박을 받아 하반신이 마비됐습니다. 허리 통증과 하반신 마비 증상은 그가 27살이던 1966년부터 시작됐습니다. 모리오 수녀는 1968년부터 1975년까지 4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고 결국 1980년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한쪽 다리는 완전히 뒤틀려 보조기구를 착용해야 했으며 휠체어에 의존해 이동했습니다. 또한, 통증을 참기 위해 상당량의 모르핀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모리오 수녀는 2008년 성모 발현 150주년을 맞아 루르드를 순례했습니다. 당시 순례를 “은총의 원천”이라고 회상한 수녀는 “신기하게도 성모 동굴에서 성모와 성녀 베르나데트를 느낄 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녀는 순례 동안 고해성사를 하고 병자성사를 받았습니다. 수녀는 “당시 나는 치유를 바라지 않았다.”라면서 “그저 회심하길 바랐고 환자로서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순례를 마치고 보베에 있는 수녀원에 돌아온 수녀는 특이하게도 몸이 편안해지며 전체적으로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수녀는 한쪽 다리를 고정했던 보조기구를 풀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이를 풀었으며, 통증을 조절하기 위해 사용했던 신경자극기도 뗐습니다. 이후 수녀는 어떤 기구의 도움 없이도 걷기 시작했습니다. 통증도 사라졌습니다.

루르드 의료국은 모리오 수녀의 치유 사례를 2009년과 2013년, 2016년 3차례에 걸쳐 면밀히 조사했으며, 루르드 국제의학위원회에 이 사건을 보고했습니다. 루르드 국제의학위원회는 수녀의 치유가 “현재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베노아-고닝 주교는 “모리오 수녀가 이렇게 갑자기 완전히 상태가 호전된 것은 기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라며 이 사례를 기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사례 중 특이한 것은 63번째 공식 인정된 기적입니다. 주인공은 비또리오 미켈리(Vittorio Micheli)라는 이태리 사람입니다. 그는 군복무 중인 그의 나이 22세 때에 좌측 골반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검사를 거친 후 그해 6월 4일에 그의 병명은 치명적인 악성 종양으로 밝혀졌습니다. 일 년가량 군 병원에 머물며 종양으로 잠식된 엉덩뼈의 머리 부분을 잘라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관절은 냉혹하게도 점점 악화하여 갔습니다.

루르드에 순례를 하러 갈 때도 골반에서 발까지 석고 붕대를 하여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샘물로 목욕을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태리로 돌아왔을 땐 외관상 상태가 호전된 것으로 보였고 군인의 신분이었기에 그는 트렌토의 군 병원에 다시 입원하였습니다. 군 병원에서 여러 번 X선 사진을 찍었지만 제대로 판독을 못 해서 의료진은 그의 상태가 이전과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자 그는 놀라울 정도로 건강을 회복하여 통증이 없어졌으며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료진은 “그의 골반이 뚜렷하게 복구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루르드를 방문했고 루르드 의료국에 의해 “이러한 치유에 대해선 의학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라고 결론지어졌고,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지 13년이 지난 1976년 5월 26일엔 트렌토의 알렉산드로 고따르디 대주교는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힘으로 특별히 중재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잃었던 시력이 회복되고 암 덩이가 사라지는 것을 참으로 큰 기적입니다. 모리오 수녀 같은 경우처럼 40년 동안 휠체어를 타던 분이 연세가 들어서 두 발로 가뿐히 걷게 된 것은 더 큰 기적입니다. 그런데 비토리오 미켈리 같은 경우는 암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요, 그것 때문에 잘렸던 뼈가 다시 생겨나서 다리 길이가 같아졌다는 것이 더 기적입니다. 

우리 주위엔 크고 작은 기적이 이렇게 존재합니다. 신자들의 기도로 죽었던 사람까지 다시 생명이 되돌아온 예도 주위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묵상하다 보면 믿음이 더 강해져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 죽은 우리를 부활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어야 이 세상을 마치 여행하는 것처럼 즐기며 살 수 있습니다. 죽는 것이 두려우면 이 세상도 즐기지 못하고 나를 해칠까 봐 사람을 평생 두려워하며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살리러 가시는 예수님을 붙잡아서 시간을 빼앗은 하혈병 여인 때문에 화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녀 때문에 믿음이 더 증가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고치실 수 있는 분이 만드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망가진 고치실 수 있는 분은 분명 다시 만드실 능력도 있는 분이십니다. 작은 치유라도 바랍시다. 이것이 묵상을 통해 부활을 바라는 마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망가진 묵주를 고쳐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회복 불가능일 때 다시 만들어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유형 두가지

 

힘든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라면 모를까 그런 일만 찾아 나서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몸은 힘든 일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의대 연구팀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둘로 나눠 실험했습니다. 첫째 유형은 감각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맛난 음식, 좋은 환경, 사회적 욕구 충족의 안락함을 추구합니다. 다른 유형은 내면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 예를 들면 아이 돌보기, 치매 노인 섬기기, 인기 없고 힘들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것 등입니다. 
 
누구의 몸이 더 건강해졌을까요? 감각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내면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몸 안에 염증을 유발하는 유전자는 증가하고 항바이러스 유전자는 줄어들었습니다. 감각적 행복을 추구할 때 오히려 스트레스에 반응하며 염증을 일으키는 게놈이 더 많이 나타났습니다. 
 
우리 몸은 힘들어도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감각적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께 자기 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을 찾아가시지요. 그런데 그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이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죽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만 그리고 감각적으로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에게 “탈리타 쿰!”라고 말씀하십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곳에 있는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세상의 관점으로만 보고 있는 그 모든 시선을 벗어버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벌떡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세상의 관점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편안하고 쉬운 삶이 아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기쁨을 간직하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노력을 갖추며 사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놀라운 표징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을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마음의 문을 열고 무언가 받아들이려 손을 뻗으면, 인생의 단맛이 이런저런 형태로 다가온다.

- 에밀리 런

 

 

발해를 아십니까?

 

“발해를 아십니까?”라고 질문하면 대부분 안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저 역시 이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 안다고 대답했습니다. 
 
“고구려 멸망 후 대조영이 세운 고대국가입니다.”라고 답하자, “또?”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에 존속했던 나라였습니다.”라고 하자, “또?”라고 다시 묻습니다. 이 질문에 그다음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200년 넘게 존속했던 나를 단 2줄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 ‘앎’을 과연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진짜 앎이 아닙니다. 그보다 아는 것 같은 ‘느낌’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느낌뿐인 것을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우리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아는 느낌을 ‘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 앎은 진짜가 아닙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아는 느낌을 ‘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 역시 진짜가 아닌, ‘아는 느낌’으로 사는 것뿐입니다. 
 
진짜 앎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더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일상(日常)이 감사이다.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마르 5, 43) 

일상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일상은 주님의 선물이다. 다시 희망의 일상을 시작한다. 다시 깨어나는 믿음의 반복이다. 일상(日常)은 눈부시고 일상의 만남은 소중하다. 

믿음은 일상과 함께 삶의 관점을 감사로 바꾸어놓는다. 두려움보다 더 큰 믿음이 우리의 생활안에 있다. 절망을 치유하는 믿음이 있다. 믿음을 통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자신을 다시 보게된다. 믿음은 또 다른 길을 용기있게 걸어가게 한다. 

믿음의 길은 다채롭게 펼쳐져 있다.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구원이다. 모든 구원의 시작에는 믿음이 있었다. 구원이란 우리의 일상을 다시 건져올리는 기쁨이다. 우리의 현실을 치유하는 것은 다름아닌 믿음이었다. 

믿음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한다. 믿음으로 바라보면 모자라지 않는 행복이다. 결핍과 불행이 아닌 은총과 감사가 된다. 감사는 가장 가까운 가족의 먹는 모습에서 다시 깨어난다. 일상(日常)이 감사이다. 우리의 일상이 성체성사이다. 일상에 감사드리는 은총의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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