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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21년 6월 24일 (목)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Solemnity of the Nativity of Saint John the Baptist)
세례자 요한은 사제였던 즈카르야와 성모님의 친척인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주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헤로데 임금의 비윤리적 생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의 간계로 순교한 세례자 요한은 ‘말씀’이신 주님의 길을 준비한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는 주님께서 그를 모태에서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그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열린 할례식에서 아기 아버지 즈카르야가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겠다고 하는 순간, 즈카르야는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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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다.
제1독서
이사 49장 1-6절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화답송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은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 알아차리시나이다.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헤아리시니, 당신은 저의 길 모두 아시나이다.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은 제 오장육부를 만드시고, 어미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나이다.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 작품들은 놀랍기만 하옵니다.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제 영혼이 잘 아나이다.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땅속 깊은 곳에서 짜일 때, 제 뼛속까지 당신께 드러났나이다.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제2독서
사도 13장 22-26절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그 무렵 바오로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22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 되어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라.
알렐루야!
복음
루카 1장 57-66절, 80절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영성체송
우리 하느님이 크신 자비를 베푸시니,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 데서 우리를 찾아오셨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유다 산악 지방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아 모시는 겸손한 사람이 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어린양의 잔치로 기운을 되찾고 비오니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복된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뻐하는 저희가 세례의 제정자이신 그리스도를 알아 모시게 하소서.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6월 24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6월 24일 (목)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세례자 요한을 닮아 가는 한 걸음
세례자 요한이 탄생합니다. 우여곡절을 거쳐 세상에 탄생합니다. 복음서에는 그의 탄생이 매우 놀라운 일로 묘사됩니다. 먼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그 이유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 엘리사벳이 출산하였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뜻하기에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입니다. 요한의 탄생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예고부터 시작됩니다. 탄생 예고 이후에 천사가 예고한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됩니다. 요한이 태어나고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기록되고서야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면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면서 이 이야기를 화제로 삼습니다. 만일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면 요한의 탄생이 놀라운 것은 그의 부모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탄생이 놀라운 마지막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의 탄생과 관련된 소문과 함께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지면서, 엘리사벳도, 즈카르야도 아닌 요한이 특별함의 이유가 됩니다. 복음사가는 그의 탄생이 특별한 이유가 바로 요한 자신임을 알려 줍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와 기적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난 특별한 인물,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는 더 큰 특별함과 놀라움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마르 1,7)
자신이 지닌 특별함에도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낮춘 겸손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우리도 요한만큼은 아니지만 매우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탄생도 특별하고 놀라웠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낮추고자 노력한다면, 세례자 요한을 닮아 가는 한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선구자
저는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을 지내며 오늘 전례 독서와 감사송의 말씀을 가지고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으니, 그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나이다."
무릇 성인들의 축일을 지내는 이유가 그저 성인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함이 아니라 성인의 삶을 본받고자 함이듯 오늘 세례자 요한의 축일을 지내는 것도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을 준비하는 삶을 우리도 특별한 영예로 삼고, 세레자 요한처럼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회개의 세례를 오늘도 미리 선포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천 년 전에 오신 것처럼 오늘도 주님께서 오시도록 우리가 준비하고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천 년 전에 한 번 오신 것으로 끝이 아니고 오늘도 계속 다시 오셔야 하고, 그러시도록 우리가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준비하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늘 인식하고 의식하며 살아야 하고 그런 존재라는 것을 특별한 영예로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감사송은 세례자 요한을 주님의 선구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선구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하는데 주님의 선구자라는 인식은 주님과 나를 떼어서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없이 어디 가지 않고, 주님 없이 무슨 계획을 세우지 않으며, 한 마디로 '당신은 당신이고, 저는 저입니다.'로 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주님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다고,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다."고 감사송은 노래하지요.
그렇긴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오심만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오실 것을 준비하고 있다가 주님이 오시자 자기 집에만 모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주님께서 마을에 오셨는데 자기 집에 감금한 셈인데 그러지 않았고 사람들도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사람들도 준비하게 한 분이며 주님이 오시자 주님을 사람들에게 가리킨 분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한이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을 먼저 알아 본 사람들의 선구자이고,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려 준 증거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은 주님과 자신을 떼어 생각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동떨어진 분이 아닙니다.
주님에 앞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보다 앞서 주님을 알아보고 증거를 한, 주님의 선구자요 사람들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을 오늘 우리는 본받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녀가 사춘기 겪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태어나고 할례를 받을 때 받은 이름입니다. 보통은 가족의 전통적인 이름을 따르지만, 완전히 새로운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는 지금으로 말하면 세례입니다. 따라서 요한이라는 이름은 그 집안의 전통을 따름이 아닌 하느님 자녀로서의 정체성과 소명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게 되는데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게 된다는 뜻입니다. ‘도시’가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는 곳이라면 ‘광야’는 그런 것 없이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에게서 왔고 또 하느님의 소명을 따라야 한다고 정해진 요한. 그는 사춘기를 겪었을까요? 저는 안 겪었다고 확신합니다. 물론 사춘기를 겪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안 겪은 것처럼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사춘기의 자녀를 둔 부모들은 그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아이도 키워보지 못한 저에게 많은 것을 물어옵니다. 물론 그들도 제가 어떻게 대답할지 뻔하게 알면서도 그저 답답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춘기 아이들을 잘 이해하는지부터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의 성장이 빨라져 중2병이라 하지 않고 초4병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그저 엄마가 무슨 말만 하면 짜증이 나서 문이 부서지라 닫아버리고 자꾸 야동을 보고 게임에 중독되며 공부, 진로,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항상 우울해하며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버리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사춘기의 특징일까요? ‘이유 없는 반항?’ 이유 없는 것은 없습니다. 이유를 모를 뿐입니다. 그리고 이유를 몰라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를 뿐입니다.
이런 실험이 있습니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10대, 사춘기가 지난 20대 대학생, 그리고 30대 직장인이 실험에 참여했습니다. 자동차 운전게임입니다. 결승전에 일찍 도착할수록 보상이 커지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간에 노랑 신호등이 나옵니다. 노랑 신호등은 멈추어야 할지 빨리 지나가야 할지 애매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교통법상 노랑 신호등은 멈추라는 의미입니다. 노랑 신호등에 멈추면 3초가 더 걸리고 만약 무시하고 지나다가 사고가 나면 6초가 더 걸리게 해 놓았습니다.
과연 이 게임에서 사춘기 아이들이 결승점에 더 빨리 들어가려고 신호등을 무시하였을까요? 결과는 예상 밖입니다. 노랑 신호등을 가장 잘 지킨 사람들은 10대 사춘기였고 그다음이 20대 대학생, 그리고 가장 지키지 않은 사람이 30대 직장인이었습니다. 통념과는 달리 사춘기 청소년들은 지킬 것은 지켜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큰 아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춘기 아이들이 제멋대로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 실험에서 증명됩니다. 이번에는 각 또래가 지켜보는 가운데 같은 게임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10대가 노랑 신호등을 무시하는 경우가 20% 증가했습니다. 친구들이 지켜볼 때는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무모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 실험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춘기 아이들은 어떤 결정을 할 때 주위 관계에 따라 휘둘린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없다는 말일까요? 정체성이 약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사제라는 정체성이 명확하면 주위의 유혹이 있더라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가장이요, 엄마라는 정체성이 명확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피츠버그, 버클리, 하버드 대가 공동으로 벌인 한 실험에서 사춘기 아이들에게 어떤 소리를 30초간 들려주었더니, 아이들의 뇌가 멈춰버리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부정적인 영역은 활성화되고 공감 능력을 담당하는 긍정적인 영역은 축소해버리는 그야말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게 만드는 그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부모의 목소리’였습니다.
[참조: ‘청소년 사춘기, 반항의 이유’, 유튜브 채널, ‘EBSCulture’]
사춘기 때 부모의 목소리는 극도로 싫어하지만, 자신이 누구의 목소리를 따라야 하는지 몰라 친구에게 휘둘리고, 게임이나 야동, 혹은 자기 속에 파묻히는 등,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겪는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시기입니다.
다시 말해 사춘기는 부모의 자녀로서 부모의 말만 따르면 된다고 믿다가 이젠 부모가 자신의 원천이 아님을 깨닫고는 다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목소리를 따라야 하는가?’의 혼돈에 빠지는 시기입니다. 이때 어차피 먹히지도 않을 부모의 충고는 아이들에게 반항심만 유발할 뿐입니다. 아이의 통제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제 주님께 돌려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세례이고 유태인들처럼 정식적으로 첫영성체 때 이뤄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부모가 어떻게 아이들의 사춘기를 지나게 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바로 ‘세례’를 주며 ‘새로운 이름’을 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준다는 뜻입니다. 만약 부모가 자녀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마치 자신의 피조물처럼 놓아주지 않는다면 자녀는 언젠가는 사춘기를 크게 한 번 겪게 됩니다.
부모에게 절대 순종만 하던 착한 딸이 대학교에 들어가서 갑자기 아침에 걸을 수 없게되어 휠체어를 타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 이름 모를 병이 생기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자신을 놓아주지 않은 부모에 대한 반항입니다. 혹은 결혼해서도 성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늦게서야 동성애자로 변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혼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춘기를 겪지 않으면 한 번은 이렇게 크게 겪게 됩니다. 모양새만 다를 뿐 정체성 혼란의 사춘기를 겪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다행히’ 저를 놓아주셨기에 저는 사춘기라는 것을 눈에 보이게는 겪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7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는 말씀을 해 주셨기에 7살 때부터 사춘기를 조금씩 겪었습니다.
‘그럼 나는 어디에서 왔고 나는 누구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 TV에서 ‘슈퍼맨’이 나왔습니다.
‘그래, 나도 그럼 슈퍼맨처럼 외계에서 온 것이 확실해!’
그때는 하늘을 나는 슈퍼맨 꿈만 꾸었고 실제로 날아보려 하다가 배가 바닥에 갈려 까진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날지 못하는 것은 내가 슈퍼맨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방법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성당에 처음 나가서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슈퍼맨 놀이를 그만두었습니다. 나의 원천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저는 사춘기를 겪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춘기는 분명 있습니다. 작게 겪느냐, 크게 겪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부모가 얼마나 빨리 아이의 이름, 곧 본성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자녀들에게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춘기를 겪었을까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주님의 것임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춘기는 한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므로 자주 이것을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빠르게 사춘기는 지나가겠지만 이 작업이 늦어지면 모두에게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광야’에서 살게 해 주어야 합니다. 광야까지 인도해주지 않은 부모는 도시에 사는 아이의 고통을 함께 겪어야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에서 자녀를 광야로 이끄는 부모가 됩시다. 주님과 1대1로 사는 곳이 광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의 뜻에 집중하고 있다면 사람들의 오해에 흔들리지 않아
사회생활에서 가장 힘든 일은 남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온전히 이해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해하지 못할 때, 상대는 ‘나’를 ‘오해’하게 됩니다.
오해는 다음과 같은 경로로 생깁니다. 첫째, 남이 이해 못 하는 말이나 행동을 내가 별 뜻 없이 해서 생깁니다. 둘째, 남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나의 것과 다른 경우입니다. 셋째, 남이 내 모습에서 과거의 누군가를 무의식적으로 떠올려서 오해했을 가능성입니다.
이해를 받는다면 상관없지만, 오해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분명 오해는 화나고 속상함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서워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도 한문을 숭상하는 학자들의 오해를 받았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도 무능력한 조정의 오해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도 오해를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요한 세례자는 어떻습니까? 그 역시 사람들의 오해를 받았습니다. 광야에 나가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모습에서 얼마나 많은 오해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에 흔들리지 않았기에 ‘지금’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은 어떤 것 같습니까?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보내면서, 복음은 요한 세례자의 명명식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요한’이라고 이름을 정한 아기 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지요.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거나 친척의 이름을 따라 하는 관습에서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을 할 수 없었던 즈카르야가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씁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오해를 가져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사람의 오해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계속된 오해에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곳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집중하는 사람은 오해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일을 충실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나의 커다란 획을 긋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에게는 그토록 결점이 많은 것은 아니다. 결점의 대부분은 거만한 태도에서 나온다. 먼저 거만한 태도를 버려라. 그러면 많은 결점이 스스로 고쳐질 것이다.
- 라 로시푸코 (La Rochefoucauld)
사실과 예측의 구분
어느 자매님에게 고민이 생겨서 본당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자기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이유에서였지요. 신부님께서는 남편과 대화를 나눠봤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고 합니다.
바람피운 것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스마트폰으로 받은 메시지로 증거가 생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전과는 다른 남편의 행동을 보면서 “바람피우고 있어.”라고 확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바람피우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라고 물으니, “제가 이 사람과 함께 산 시간이 몇 년인데 그걸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사실일 수도 있지만, 현재 상태는 100% 사실이라 할 수 없는 단순한 예측일 뿐입니다.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사실과 예측을 철저하게 분리해서 사실만을 쫓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예측이 사실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진리에 벗어나게 됩니다.
모든 관계가 어긋나는 것은 사실과 예측을 철저하게 구분하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든 시작과 마침에는 하느님이 계신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루카 1, 63)
소중한 이 순간이다. 탄생은 하느님과 관계 맺는 새롭고도 고유한 이야기의 시작이다. 삶 전체를 축복해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절실하신 하느님 사랑은 잊혀지지 않는다. 소중한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이 있다.
모든 시작과 마침에는 하느님이 계신다. 하느님께서 써 내려가시는 소중한 역사이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광야의 여정도 낯설지 않다. 은총은 또 다른 은총을 낳는다. 은총을 통하여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깨닫게된다.
생명은 말씀에 귀 기울이는 기쁨이다. 우리 삶을 존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여기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사랑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이다. 사랑으로 아름다워지는 사랑의 여정이다. 모든 탄생에는 하느님의 절실한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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